#76
“회장님, 유 관장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권 실장의 목소리에 차 회장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안으로 모셔.”
말이 끝나자마자 영현이 권 실장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회장실은 고요했다. 그녀의 침착한 발걸음이 이어져 차 회장 앞에서 멈췄다.
자리에서 일어난 차 회장이 서늘하게 굳어 있는 영현의 표정을 살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차 회장의 얼굴 위로 사진 뭉텅이가 스치고 날아갔다. 영현이 그를 향해 집어 던진 것이었다. 차 회장은 제 뺨을 스치고 지난 날카로운 사진을 내려 보았다. 희미한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사진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것이 무언지 가늠하던 차 회장이 충격으로 표정을 굳혔다. 사진 속에 제가 잘 아는 이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늘 거울로 마주하는 남자, 바로 차병준 자신이.
사진 속의 자신은 미소 지었으며, 외도했으며, 나체로 짐승처럼 상대와 얽혀 있었다. 별장에 은밀히 숨겨 놓은 가짜 미령이와 함께.
차 회장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다급하게 변명을 달싹이려던 입술이 영현의 조용한 목소리에 막혔다.
“내가 들키지 말라고 했잖아. 뒤로 뭔 짓거리를 해도 좋으니 내게 들키지만 말라고.”
“…….”
“그 쉬운 거, 그거 하나 못 해? 등신 머저리도 아니고 어디서 이딴 걸 찍혀서…….”
영현은 구두 굽으로 사진을 짓이기듯 밟았다. 동요 하나 없이 침착한 음성이 오히려 그녀의 분노를 선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오해, 오해야… 이, 이건 어디서…….”
“지금 궁금한 게 이 사진의 출처야? 고작 그거?”
“…….”
영현이 구두 끝으로 사진을 툭 차 날렸다. 그녀 속을 휘감고 있는 분노는 배신감에 기인한 감정이 아니었다. 자존심에 상처 입었다는 수치심으로부터 밀려온 분노에 가까웠다.
사람들이 절 향해 무어라 떠들 것인가. 제 남편이 저지른 잘못으로 제 얼굴이 화끈거리게 생겼다.
재벌 사모면 뭐 해, 남편이 바람이나 피우는데. 도대체 얼마나 매력이 없기에 남편이 대학생에게 지분거리고 20대 내연녀를 만드나. 그런 시시껄렁한 농담을 지껄이며 동정하고 혀를 찰 것이다.
“차라리 물건을 훔치지 그랬어. 수치스럽게 이딴……!”
사람들이 이 일을 화두에 올리며 ‘차라리 내가 낫다.’라며 위안하는 꼴은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한데 곧 그렇게 되게 생겼다. 누군가 자신을 동정하며 얕잡아 보게 생겼다. 고작 저딴 사내, 저딴 사내 때문에.
제 자존심이 뭉개지는 꼴을 영현은 참기가 힘들었다. 애초에 저 남자를 남편으로 둔 이유도 그것 아니었나. 제 새끼, 강주를 누군가 동정하는 꼴을 볼 수 없어. 미혼모의 자식이라며 제 아들을 깔보고, 사생아를 낳은 여자보다는 자신이 낫다며, 누군가 절 향해 우월감을 가질까 봐. 그 꼴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래서 귀 닫고 눈 감을 차병준이란 꼭두각시를 세웠다. 한데 그 꼭두각시가 제 머리 위에 흙탕물을 부어 버렸다. 그것도 아주 더러운 흙탕물을.
“가만히 있는 것 하나 못 해? 그거 하나 못 해서 날 이 꼴로 만들어? 변태도 아니고……. 갓 스무 살 된 애, 본인 딸만 한 애를 만나면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생각은 하고 사는 거야?”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영현이 그를 거세게 힐난했다.
차 회장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바닥 위, 흩어지고 밟힌 사진을 훑는다. 가짜 미령과 함께 있는 사진 속 자신은 행복해 보였다. 유영현이라는 저 차가운 여자 앞에 있을 때보다 더욱. 보라, 지금도 그녀 앞에서 처참한 마음만 붙들고 있지 않은가.
문득, 분노가 치밀었다. 영현의 발아래 짓눌린 사진처럼, 짓밟히고 짓눌린 자존심이 비죽 고개를 들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해서.’
꼭두각시처럼 있으라 하여 그리했다. 차강주라는 애새끼를 데리고 와 친자로 올리라 했기에 그리했다. 유영현이 원하는 대로, 그녀의 손아귀 아래 휘둘리며 착하게 놀아 주었다.
어차피 사랑 따위 없던 결혼이다. 딱딱하고 차갑기만 한 영현 대신, 안식처가 되어 줄 이를 찾아 쉼을 얻고자 했을 뿐인데 이런 치욕적인 비난을 일방적으로 들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애초에 저 여자가 내게 다정했다면. 애초에 집에 붙어 있었다면 될 일이었어.’
부인이라는 여자가 괜히 관장이라는 명함을 달고 해외를 기웃거려 이 꼴이 된 것이다. 만약 영현이 절 다정하게 품어 주고 사랑을 주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지. 차 회장은 그리 확신했다.
“당신이 날 이렇게 비난할 자격이 있기나 해?”
그의 반격에 영현의 눈초리가 가느다래졌다.
“뭐라고?”
“어차피 당신도 나 몰래 많이 만났을 거 아니야. 당신과 나의 다른 점은 들켰냐 안 들켰냐 정도의 차이밖에 없지 않아?”
차 회장은 움츠렸던 어깨마저 쭉 폈다. 이왕 말을 꺼낸 것 과감해질 요량이었다. 만용에 가까운 꼴이었으나 영현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침묵하며 웃었다. 차 회장의 말투가 대번 기세등등해졌다.
“당신도 당당하지만은 않잖아. 결혼 전부터 배가 불러 있었는데.”
“…….”
“내가 그거 다 눈감아 주기로 했으면, 당신도 눈감아 주는 게 있어야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
아무 말 없는 영현의 반응에 차 회장은 기선 제압을 한 기분이었다.
‘그럼 그렇지, 누구 앤지 모를 애새끼를 제 아들로 만들어 줬는데, 어딜 감히.’
진작에 당당할 것을 괜히 움츠리고만 있었다. 생각해 보면 좋은 패를 쥔 건 오히려 자신 쪽이었다. 고고한 자존심에 상처 입는 걸 그 무엇보다 싫어하는 유영현인데, 강주 일로 당당할 수 있을 리가.
“생각해 봐, 유 관장. 내가 차강주 그놈 비밀 터뜨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언론에서 사방팔방 강주 사진 뿌려 대며 ‘친부는 누구인가’ 하는 기사라도 터뜨리길 바라는 거야? 당신 아들, 세간의 싸구려 시선 받게 내버려 둘 거냐고.”
“…….”
영현은 입을 꽉 다문 채 차 회장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확 피어올랐다. 생각이 정리된 모양이었다.
“시은 아빠, 난 맹세코 다른 남자 만난 적 없어. 누구처럼, 여기저기 전봇대에 오줌 싸고 돌아다니는 개새끼는 아니거든.”
“개새끼라니 말이 너무……!”
“잠자코 들어.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우리 강주 이름을 올려? 당신이 내 남편이 될 수 있던 건 오로지 강주 덕분이야. 그 조건 없었다면 감히 당신 따위가 나와 결혼할 수 있었을 것 같아? 주제를 알아야지.”
싸늘한 영현의 웃음이 차 회장의 심중을 콱 찔렀다.
너 따위. 너 같은 것들. 그 말은 차 회장이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었다. 타인과 자신 사이에 계급을 갈라 우위에 앉은 채, 권력으로 상대를 짓밟던 발언. 그 말을 지금 자신이 듣고 있다. 영현의 발치에 깔려 치욕을 모조리 받아 내고 있는 것이다. 현실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차 회장을 향해 영현이 조소를 흘렸다.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 난 바람도 피울 거고, 그런 주제에 당당하게 행동할 거야, 라고. 그러면 주제도 모르는 개새끼, 몽둥이로 두드려 패서라도 쫓아냈을 텐데.”
졸지에 차 회장은 주제도 모르는 개새끼로 전락했다. 치욕을 참아 내느라 차 회장의 목덜미에 벌건 핏대가 섰다.
영현은 결정했다. 이제 눈앞의 남편, 차병준을 내쳐야겠다고.
강주의 비밀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에 넘어가면 미래야 뻔한 일이다. 저 비열한 인간은 제게 ‘강주’라는 목줄을 감아 평생 옥죄어 흔들려 할 게 분명하다.
차라리 크게 한 번 흔들리자.
허리가 꺾이는 한이 있어도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할 일이다. 그 끝이 파국이라 하더라도 감내해야 할.
깊이 생각하고 고민할 문제였으나 영현은 이 자리에서 쉽게 답을 내리기로 했다. 본디 성정이 그러했다. 한번 결정하면 그길로 끝이었고 뒤돌아 후회하는 일은 없었다. 강주와 무섭도록 닮은 성격이었다.
“강주가 혼외 자식이든 뭐든 걔는 내 아들이야. 선강가 사람이라고. 그런데 당신은? 내게 내쳐지면 끝이야. 유영현 남편이라는 타이틀 떼면, 그냥 허수아비라고.”
말을 마친 영현이 자신보다 키가 큰 차 회장을 내려다보듯 눈을 깔았다. 차 회장은 핏발 선 눈으로 영현을 노려보기만 했다. 차마 반박하기도 힘든 말이라 입도 벙긋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영현이 그를 스쳐 문을 향해 걸었다.
“강주 일 터뜨리든 말든 당신 마음대로 해. 뒷일 다 감당할 수 있다면.”
“…….”
또각또각. 영현의 구두 굽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차 회장은 씨근거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퍼렇게 선 핏대가 손등 위에 불룩 불거졌다. 고요한 공간 안에 악에 받친 그의 목소리만 울린다.
“하라면 못할 줄 알고?”
바짝 독이 찬 눈동자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
다음 날 저녁, 찌라시 기사 하나가 다시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선강 그룹과 관련된 기사가 올라온 것이다. 효정을 꽃뱀이라 몰아간 일간지에서 올린 기사였다.
「재벌 사모님의 아찔한 과거. 대기업 후계자의 친부는 과연 누구?
최근 꽃뱀에게 걸려 곤욕을 치른 재벌가 회장님. 이번에는 부인에게 배신당해……. 애지중지 키워 온 아들이 친아들이 아니었다니? 겉으로 보기에는 잉꼬부부인 두 사람. 하지만 사실상 별거 상태에 가까워 외도라고 보아도 무방한…(후략)」
영현은 커피를 마시며 기사를 대충 훑어 내렸다. 모든 이름은 이니셜 처리돼 있었으나 바보가 아닌 이상 ‘재벌가 회장님’이 누구인지, ‘애지중지 키워 온 아들’이 누구인지는 뻔히 드러난 사실이다.
기사의 방향이 대놓고 기울어져 있었다. 차병준 회장의 외도를 변호하며, 강주를 도마 위에 올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누군가의 사진이 찍혀 모자이크 처리된 채 올라와 있었는데.
“얼굴이 가려져도 미남인 게 딱 티가 나. 누가 내 아들 아니랄까 봐…….”
영현은 웃으며 기사 속 강주 사진을 저장했다. 모자이크로 얼굴을 가려도 훌쩍 큰 키나 너른 어깨, 깔끔한 옷 태가 딱 강주였다.
혹시 이 기사로 상처받지는 않겠지, 내 아들. 함께 이겨 내야지.
오래전 겪었어야 할 일을 돌아 돌아 지금 겪을 뿐이다. 그간 외면하고 덮어 놓았던 죄를 이제 돌려받는 거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영현이 비서를 불렀다.
“대응하지 말고 그냥 무시해. 대신 이거 바로 띄우고. 상대 얼굴은 철저하게 가려.”
“네, 관장님.”
비서는, 차 회장과 가짜 강미령의 외도 장면이 적나라하게 찍힌 사진을 들고 관장실을 나갔다.
영현은 의자에 등을 푹 기댔다. 새삼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깨가 욱신거린다. 마음이 복잡하니 몸까지 쑤시는 기분이었다.
차 회장의 수작은 예상했던 결과였다. 어차피 진흙탕에 발을 담근 것, 최대한 빨리 빠져나와 먼저 오물 씻어 내는 사람이 승자다.
누구를 원망할 생각도 없었다. 잘못이라면 차병준이라는 작자를 선택했던 제 안목에 있었으니.
영현이 제 책상 위에 있는 가족사진을 들었다.
“여보, 누가 이기나 해 보자고.”
사진 속 차 회장의 얼굴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영현은 가볍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아마, 내가 이길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