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96)

 #75

 얼굴에 닿는 강주의 시선이 따끔거렸다.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자, 속을 알 수 없이 절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깊고도 침착한 눈동자 안에 일말의 감정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강주는 잔을 든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이윽고 잔을 내리고는 가볍게 말했다.

“오히려 잘됐어요.”

“…네?”

“슬슬 제 쪽에서 시작하려고 했는데 물꼬가 이렇게 터졌으니 잘된 일이죠.”

 강주가 찬찬히 눈을 맞추며 물었다.

“효정이는 안전한 곳에 잘 데려다 놓았어요?”

“아… 네…….”

“제 아버지란 사람이 사람까지 사주해서 헛짓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모르는 거니까.”

 재희의 손끝이 차갑게 질렸다. 워낙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갑자기 사라진 제 행동의 연유를 대번 파악한 듯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었다. 본인이 새벽에 그림자처럼 빠져나가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도 영상이 올라온 날에.

 강주를 믿고 있었으나, 재희는 굳이 효정이의 행적을 고해바치지 않았다. 이건 그를 향한 믿음과, 가슴속에 담고 있는 사랑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소중하고 소중한, 제 동생의 안위와 관련된 일이었으니.

 한동안 말이 없는 그녀를 향해 강주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넸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효정이의 위치를 알려 줄 필요도 없어요.”

“…네.”

“다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도 좋아요.”

 얼핏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잠시 머물던 감정은 바람처럼 곧 휘발됐다.

“네, 강주 씨. 신경 써 주어 고마워요.”

 꽉 다물렸던 재희의 입이 대답할 때는 쉽게 열렸다.

 일은 이미 벌어졌다. 이제 자신은 물살에 휩쓸려 가는 수밖에 없다. 강주가 드리운 구명줄을 꼭 붙들고 빠지지 않게 온몸으로 물살을 가르며.

 19장. 난파

 재희는 굳은 얼굴로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았다. 고등학교 동창 그룹 채팅 창에 찌라시 기사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주로 연예계 뒷얘기를 다루는 일간지발 기사로, 제목부터 자극적이었다.

「재벌가 회장과 정분났던 모 여대생, 알고 보니 엄청난 꽃뱀?」

 재희는 기사 얘기를 나누느라 정신없이 내려가는 채팅 창을 끌어 올려, 기사를 클릭했다.

「20XX년 X월 X일: 분류(재계)

최근 화제가 된 대기업 회장, 사실은 여대생의 ‘꾼’에게 걸린 것으로 드러나.

순진한 대학생인 줄만 알았던 A 모 양. 입학 때부터 미모로 화제가 됐던 그녀가 사실 고등학생 때부터 원조를 받으며 명품을 즐기던 꽃뱀으로 드러나. 별명이 아저씨 킬러라고.

그녀를 알고 지내던 제보자 증언에 의하면, 선하고 청순한 미모로 유부남을 뜯어먹는 데 도가 텄다고 한다. 가정환경이 유복하지 않았는데, 동정심을 무기로 하여 상대의 마음을 녹이는 수법을 주로 사용…(후략)」

재희는 차마 기사를 끝까지 읽지 못하고 그대로 창을 껐다. 자극적인 제목만큼이나 내용 역시 자극적이었으며 동시에 저렴했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뛴다. 차가운 소름이 등골부터 타고 흘렀다.

 재희는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이건 분명 차 회장 측에서 올린 기사일 터다. 친분 있는 기자를 이용하여 적당히 자극적으로, 제 쪽에 유리하게 편집하여 퍼뜨린.

 감히, 감히 효정이를 꽃뱀이라 칭하다니. 내 순진하고 착한 동생을, 감히 어떻게.

 재희는 휴대 전화를 으스러지도록 꽉 쥐었다.

 차 회장의 의도야 뻔했다. ‘꽃뱀’이라는 소문으로 효정이를 폄하시키고 본질을 뭉개려는 작정일 터다. 댓글 조작과 여론 몰이가 계속된다면 그가 원하는 쪽으로 여론이 흘러갈 수도 있겠지.

‘차 회장, 이 비열한……!’

 분했다. 분하고 억울해 눈물까지 비집어 나올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무 살 어린애에게 마수를 뻗치려던 것도 모자라 이딴 싸구려 기사까지 흘리다니.

 명품은커녕 흔한 스포츠 브랜드 신발도 제대로 사지 못했던 그런 애를. 그런 착하고 순수한 효정이를 어떻게…….

 재희는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미안해, 효정아. 언니가 미안해…….’

 언니가 힘이 없어서 이토록 더럽고 난잡한 전쟁터로 널 끌어들이고 말았어.

 효정이를 은밀히 데리고 오던 새벽. 재희는 효정이에게 애써 묻지 않았다. 왜 차 회장을 둘이 만나 그런 동영상을 찍었으며, 어째서 그런 위험한 짓을 했던 건지.

 사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효정과 자신은 자매였기에 너무도 닮아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차 회장에 대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를 옭아맬 무언가를 쥐려던 심산이었겠지. 그리고 그 행동은 언니인 재희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을 게 분명하다.

 재희는 애써 숨을 골랐다. 격하게 출렁이는 감정을 애써 내리누른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메시지 창을 끄고 현실을 외면하는 것밖에 없었다. 차 회장을 향한 울분과 원망을 온 마음에 가득 품은 채.

 한편, 강주의 사무실은 아주 고요했다. 휴대 전화를 든 채 강주는 눈동자만 조용히 움직였다. 그의 전화 창 위에 재희가 보던 그 기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살며시 가느다래진 그의 눈매가 이내 묘하게 휘었다.

 이윽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희미하게 웃은 강주가 휴대 전화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텅그렁. 금속 맞붙는 소음이 났다. 동시에 그의 낯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뒤이어 따라온 감정은 일렁이는 분노였다.

 강주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데스크를 툭툭 두드렸다가 다시 휴대 전화를 쥐었다.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아 상대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네, 상무님.

 전화 건 이가 누구인지 아는 상대는 불필요한 인사치레조차 건네지 않았다. 그런 상대를 향해 강주 역시 깔끔하게 본론만 넘겼다.

“준비된 자료 지금 미술관으로 보내세요. 발신인 추적되지 않게 신경 써서.”

 -네, 차질 없이 진행하겠습니다.

 아주 간단명료한 대화를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그 뒤로도 강주는 한참이나 새까만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8층, 제 계약 연인이 있을 마케팅 팀을 향하여.

 재희는 전화기를 어깨와 귀 사이에 끼고 열심히 메모장에 끄적였다.

“네, 아, 네, 저도 들었어요. 그거 이미 협의됐다고 하던데……. 상품 팀에서도 얘기 나오지 않았어요?”

 아침부터 저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몹시 강렬했다. 당연한 일이다. 차강주 상무와 제 사이는 이미 공식 발표도 전에 기정사실로 됐는데, 시아버지 될 사람이 추문에 휩싸이니 시선을 받을 수밖에. 상대가 꽃뱀이니 어쩌니, 하는 소문이 휘돌자 그 눈초리가 더욱 따가워졌다.

‘다들 얼마나 궁금할까.’

 하지만 우선 모든 눈길을 무시했다. 잠시 연예인이 됐다고 상상하면 되는 것이다. 이곳은 사내고 자신은 사원인 이상 지금 할 일은 업무였다.

 달력에 별표까지 쳐 가며 통화를 이어 가고 있노라니 조용했던 사무실 안에 더욱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절 향한 눈길도 더욱 짙게 감기는 것 같아 재희는 어렴풋이 고개를 들었다.

“…….”

 그녀는 곧 시선으로 상대를 훑으며 입술만 간신히 움직였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체크해 보고 곧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재희가 물끄러미 강주를 응시했다. 부드럽게 웃는 그의 입꼬리가 보였다.

“급한 불 다 껐어요?”

“네, 상무님.”

“그럼 우리 데이트 좀 하죠.”

 허리춤에 커다란 손이 쑥 들어왔다.

 데이트라니… 지금 업무 시간인데요, 상무님. 그런 대답도 하기 전에 재희의 허리를 붙들어 일으키고는 손을 낚아채듯 쥐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온 강주는 다짜고짜 그녀를 이끌고 제 개인 사무실로 왔다. 그리고 재희를 소파에 앉힌 후 따뜻한 물 한 잔을 테이블에 올려놔 주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 옆에 앉았다.

“…….”

 그가 주니 우선 마시기는 하는데……. 재희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물을 마셨다. 그러다 오래지 않아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강주 씨도 그 기사를 봤겠지. 꽃뱀이니 어쩌니, 하는 더럽고 치졸한 찌라시. 의논이라도 하려 날 부른 걸까. 차 회장이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으니 다른 방법으로 눌러 놓자는.

 머릿속으로 씁쓸한 생각을 되뇌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 계약 관계에서 기인한 딱딱한 말이 나오리라 예상했는데 그에게서 나온 말은 의외로 제 안부였다.

“괜찮아요?”

 그것도 걱정이 깊이 밴 목소리로 다정하게 건네는.

 재희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무어가 괜찮냐 묻는 건지 이미 알고 있는데도. 예상하지 못한 태도를 마주하자 네? 하고 희미한 반문만 나왔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차 회장의 마지막 발악이니까.”

“저도… 저도 알아요. 화가 나긴 하지만 굳이 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요.”

 눈을 내리깔며 가만가만 답했다. 흘러내린 머리칼 위로 그의 상냥한 손길이 닿았다. 사락거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강주는 그 손길만큼 다정한 목소리를 건넸다.

“어머니 반응이 초조해 자충수를 둔 거예요. 효정이 신원 절대 드러나지 않게 할 테니 재희 씨는 걱정하지 말고 있어요.”

“…….”

 재희는 고개를 더욱 숙였다. 차라리 머리카락이라도 내려와 제 표정을 가려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의 손길에 자꾸만 얼굴이 드러났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새빨개진 눈가가 보일 것이다. 들키고 싶지 않은데.

 울먹이느라 달아오른 뺨 위에도 강주의 손바닥이 닿았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언 그녀의 마음을 녹이듯 부드럽게 맞닿는다. 재희는 아예 눈을 감았다.

 이 말을 해 주려 나를 불러서. 기사를 봤을 내 마음을 생각해서.

 불안한 호흡이 차차 가라앉았다. 괜스레 그를 향한 원망마저 치밀었다. 이렇게 다정하기만 한 강주를 괜히 탓하고 싶어진다.

 내게 이렇게 다정하면… 자꾸만 당신을 향해 흘러가고 고이는 내 마음은 어찌하라고.

 ***

 겉으로는 평온한 하루였다. 창가에 선 영현은 차를 마시며 미술관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수면 위로 파문을 만들며 노니는 원앙 한 쌍이 보였다.

“후우.”

 무표정한 얼굴 위로 기어코 짧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제 남편, 차 회장이 중심이 된 추문. 그건 깔끔히 잊기로 했다. 차 회장이 영현 본인의 얼굴에 검댕을 끼얹은 건 화가 났으나 이미 벌어진 일 아닌가. 다행히 별다른 짓거리 없이 차 안에서 나눈 대화만 있었으니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다. 영현은 그렇게 스스로 자기 합리화했다.

 그래서 잊기로 했다. 차 회장 잘못을 눈감아 주면 모든 게 일상으로 돌아간다. 기실 이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도, 강주가 사생아가 아닌 당당한 제 아들로 있을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차 회장 덕 아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씁쓸한 말을 중얼거리며 창가에서 등을 돌릴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관장님, 퀵으로 우편이 하나 왔습니다.”

“들어와요.”

 곧 비서가 들어와 갈색 봉투 하나를 건네더니 밖으로 나갔다. 영현은 서랍을 열어 편지 칼을 꺼냈다. 삭삭삭, 두꺼운 종이를 자르니 내용물이 툭 쏟아졌다. 종이와 사진 몇 장이었다.

 영현은 아무 생각 없이 종이 위 내용부터 읽었다.

“이름, 윤정미… 나이 27세… 사는 곳 경기도……. 이게 뭐야?”

 영현의 고개가 옆으로 슬쩍 넘어갔다. 그녀는 누군가의 신상명세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이번엔 사진을 집어 들었다. 사진 속에 담긴 누군가의 희미한 형체. 정원으로 보이는 곳에서 웬 여자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하.”

 굳은 얼굴로 사진을 내려다보던 영현에게서 헛웃음이 흘렀다. 사진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초리가 새파랗게 튄다. 영현은 급하지 않은 손길로 흐트러진 사진을 한꺼번에 집어 들었다.

 테라스에서 나체로 몸을 겹치는 두 남녀의 형체가 희미하게 드러났고, 손을 잡은 채 정원을 노니는 둘의 모습이 찍혀 있기도 했다. 영현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윽고 희미한 형체만 보였던 중년 남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선명히 드러났을 때.

 와장창! 영현은 책상 위에 있던 꽃병을 집어 던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차병준, 이……!”

 소음을 듣고 놀란 비서가 다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향해 영현이 표독스레 외쳤다.

“당장 차 준비시켜!”

 눈동자가 분노로 반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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