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96)

 #74

 재희는 눈앞에 보이는 빌딩을 힐끗 올려 보다가 민망한 얼굴로 대꾸했다.

“지금 회사에 막 도착했어요. 지각이네요.”

 -…그래요.

 약간의 정적 후, 짧게 대답한 강주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 인사나 마무리는 없었다. 새까매진 화면을 향해 여보세요? 하고 묻던 재희는 뒤늦게 전화가 끊겼음을 알고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화가 난 걸까? 혹시 차 회장의 일을 일방적으로 터뜨렸다며 질타하는 건 아닐까. 재희는 한숨과 함께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자리에 도착한 재희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어색한 표정의 팀원들이 이제 왔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차강주 상무의 관계를 아는데 지각이 아닌 결근을 한들 타박할 수 있을 리 없다.

 그 점이 재희는 오히려 싫었다. 든든한 백을 믿고 설치는 사람이라도 된 느낌이라 묘하게 찝찝함이 밀려왔다.

 차장을 향해 걸어간 재희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사정이 생겨 연락 없이 늦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아. 늦을 수도 있지.”

 그녀의 부재에도 전화 한 통 하지 못했던 차장이 손사래를 쳤다. 비꼬는 게 아니라는 방증으로 눈빛에 진심만이 가득했다. 재희는 꾸벅 숙였던 허리를 펴며 속으로 한숨을 뱉었다.

‘물 흐리는 미꾸라지라도 된 기분이네.’

 다시는 지각하지 않게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선 채 허리만 굽혀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불현듯 분위기가 싸해졌다.

 이 감각, 언젠가 느껴 본 적이 있다.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뒤를 돌려 하자 낮은 저음이 먼저 그녀를 잡아챘다.

“재희 씨.”

 재희는 가만히 뒤를 돌았다. 역시. 강주다.

 안녕하세요, 상무님, 하고 팀원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강주가 일 보라는 듯 손짓하자 모두 일사불란하게 자리에 앉아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모든 건 평소와 똑같았다. 다들 무섭도록 일상을 가장했다. 차 회장의 일이 있기에 다들 힘껏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화제의 중심이 된 차 회장의 아들이 옆에 있는데 티를 낼 수는 없지 않은가.

 타각타각 힘차게 울리는 키보드 소음을 뚫고 강주가 재희의 손을 잡았다. 그런 뒤 무작정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재희는 어디 가느냐는 질문조차 하지 못한 채 그에게 끌려가듯 걸었다.

 모니터에 얼굴을 처박은 사원들이 시선으로만 둘을 따랐다. 그러다 둘의 인영이 사라지자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상무님?”

 재희의 부름에도 강주는 내내 말이 없었다. 재희는 불안한 얼굴로 그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조각처럼 단정한 얼굴은 일말의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복도 끝에 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오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재희는 절 꽉 잡은 그에게 이끌려 휘청이듯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그에게 끌려가 꽉 안겼다.

“아-!”

 급작스러운 행동으로 재희는 그의 가슴팍에 콩 이마를 박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살피려 했으나 단단한 팔에 다시 감겨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억세게 휘감긴 팔이 버겁다. 차마 그를 마주 안지 못하고, 재희는 숨만 꼴깍 삼켰다. 아무리 엘리베이터 안이라고는 하나 사내 아닌가. CCTV도 있을 텐데 자칫 누구에게 보이기라도 하면.

“강주 씨, 여기 회사 엘리베이터인데…….”

 그가 모를 리는 없겠으나 우선은 부질없이 중얼거려 보았다. 다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지만, 정수리에 뺨을 대는 강주의 행동에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불안한 숨결이 머리 위에 떨어졌다. 흐트러진 목소리가 이어 울린다.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더라고.”

“죄송합니다, 깨울까 봐…….”

“정신을 차려 보니 영상으로 난리가 나 있는데, 넌 내 연락을 받지 않아.”

 강주의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악력에 숨이 턱 막혔지만 재희는 차마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언제 도착했는지 엘리베이터 문이 묵직한 소음을 내며 열렸다. 강주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미동도 없었다. 혼잣말 같은 목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졌다.

“네가 오지 않을 줄 알았어. 이제 내 도움은 필요 없다며 그대로 사라진 줄만…….”

 아주 작은 목소리는 재희의 귓가에 제대로 닿지 않았다. 들을 수도 없이 홀로 흩어진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혔다.

 강주는 재희의 어깨에 무너지듯 기대어 이마를 붙였다. 머뭇거리던 재희가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굳어진 커다란 몸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분명 절 안고 있는 그인데, 이상하게 자신이 그를 품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제게 매달린 것처럼 붙은 그에게서 초조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창고에 몸을 맞댔던 그때의 강주 오빠로.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부둥켜안았던 그때의 그로. 그 시절 강주 오빠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차강주 상무님인데.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위태로운 모습이 그때의 ‘강주 오빠’를 닮아 있다.

 화가 난 걸까. 혹은 무언가 불안한 걸까. 막상 차 회장이 공격당하니, 회사가 흔들릴까 두렵기라도 한 걸까.

“혹시 화나셨어요……?”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여 그가 불쾌해할까 봐 차마 손바닥은 대지 못하고 손끝으로만 쓸어내리듯 톡톡.

 한참이나 재희를 부둥켜안고 있던 강주가 이윽고 몸을 떨어뜨렸다. 그러곤 대답 대신 급하게 입술부터 겹쳤다.

 갑작스럽게 엉기는 혀에 놀라 재희가 한 걸음 뒤로 달아났다. 멀어진 만큼 강주가 더욱 가까워졌다. 거칠게 입 안을 헤집고 혀를 끌어당겨 빨았다. 끙끙거리는 그녀의 신음도, 호흡마저 제 속으로 모조리 집어삼켰다.

 재희의 뒷걸음질에 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쿵 하고 부딪친 엘리베이터 벽이 차갑다. 재희는 엘리베이터 철제 벽과 그의 단단한 가슴팍 사이에 끼여 끙끙거렸다. 무거운 몸이 압박하자 우선 숨부터 막혔다.

 강주는 재희의 달뜬 숨결을 갈라 혀뿌리를 빨아 당기고, 질척한 점막을 훑어 아프도록 헤집었다. 폭력적인 키스가 이어졌다. 재희가 할딱거리며 도망가면 그가 다시 휘감았다.

 강주의 다급한 손길이 그녀의 옷깃을 파고들었다. 마치 굶주린 것처럼 키스하며 사납게 돌진한다. 화들짝 놀란 재희가 감았던 눈을 떴다. 엘리베이터 구석, 동그랗게 달린 CCTV가 보였다. 누군가 보고 있을 리 없으나 불안함이 밀려와 그의 어깨를 밀었다. 묵직한 몸은 미동도 없었다.

 재희는 두어 번 정도 더 그를 밀어내다가 이내 포기하기로 했다. 한번 무언가에 꽂히면 뒤돌아서는 법이 없는 그의 성미를 아는 까닭이다. 대신 그녀는 그를 떨어뜨리려 시도하는 대신 그의 목에 조심스레 팔을 둘렀다.

 애원처럼 쏟아지는 입맞춤을 받아들이고 조심스레 그의 입술을 빨아 당겼다. 달아나려던 그녀가 다가오자, 그제야 강주가 달라졌다. 혀를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녀를 따라 천천히, 그리고 사뭇 부드럽게 움직임이 잦아든다.

 재희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보다 달콤해진 키스 하나로 몸이 녹아들었다. 질척한 살덩이가 안을 쓸고 비빌 때마다 신음이 흐트러졌다. 하지만 호응하며 그를 받아들이다가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이곳이 어디인지 새삼 깨달은 까닭이다.

 재희는 강주의 두 뺨을 붙들고 천천히 혀를 물렸다. 질척하게 엉기던 혀가 차근차근 틈을 벌렸다.

“…강주 씨.”

 여전히 입술을 약하게 붙인 채 재희가 그를 불렀다. 서로의 숨결이 입술 틈으로 흩어졌다. 탁하게 잠긴 그의 눈동자가 재희를 파헤쳤다.

“저도 강주 씨와 이러는 게 좋긴 한데……. 여기보다는 강주 씨 사무실에서 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강주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표정이었다. 초조함을 적당히 숨긴 사뭇 침착해진 시선이 그녀를 훑었다. 한참이나 제 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하려는 듯 재희만 훑던 그가 이내 천천히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어요.”

 그에게서 영문 모를 말이 흘러나왔다. 재희는 눈을 끔뻑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가까이 마주하고 있음에도 그에게 오목히 담긴 감정을 읽기 힘들었다.

 강주의 팔이 재희를 다시 강하게 끌어당겼다.

“우리 계약은 아직 유효해요. 그러니까, 계약이 끝날 때까지. 재희 씨는 먼저 돌아서면 안 돼요. 절대.”

 단어 하나하나에 강주의 억센 의지가 담겼다. 마치 강요처럼 뱉어진 그 말에 재희는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그제야 강주의 굳은 얼굴이 흐트러졌다.

 상무실로 돌아온 강주는 다시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아까의 동요는 찾아볼 수 없는 멀끔하고 침착한 상무님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재희를 소파에 앉히더니 커피까지 내려 가지고 왔다.

 그런 강주가 갑자기 익숙하게 느껴졌다. 어릴 때도 그렇지 않았나. 창고 안, 어둠에 젖어 있던 소년을 햇살 아래에서 마주하면 곱고 티 없는 재벌가 도련님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침착하고 고요한 미소 속에 숨겨진 속을, 자신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때.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강주가 맞은편에 앉았다.

“알고 있었어요?”

“…….”

 무거운 본론이 아무렇지 않게 치고 들어왔다. 재희는 동요하는 눈동자를 숨겼다. 커피 잔을 들어 다급히 표정을 가린다.

 그의 문장은 모호했으나 무얼 묻는 것인지는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마도 효정이가 올린 동영상을 말하는 것이겠지. 어젯밤을 한바탕 뒤집어 놓았던 그 동영상을.

 재희는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마신 후 고개를 들었다. 긴장감이 뜨거운 열기와 함께 가슴을 타고 넘어갔다. 효정이의 동영상 업로드. 몰랐던 일이다. 진실로 몰랐다. 물론 안다고 하여도 그다지 달라질 일은 없을 테지만…….

 강주는 이제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화를 낼까. 질책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재희는 약간의 두려움을 안고 담담한 척 입을 열었다.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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