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차 회장 앞에 선 영현이 명령처럼 말했다.
“변명할 거 있으면 변명해.”
평소에는 재벌가 사모님답게 우아하면서도 어린 소녀같이 활기찬 영현이었으나, 이따금 무섭도록 냉랭해질 때가 있었다. 화를 내는 일은 드물었지만, 분노를 표출할 때는 언동에 인정사정이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 차 회장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숨을 죽이고 있을 시간이었다.
두 사람을 살피던 권 실장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안쪽 소음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단단히 틀어막는다.
영현이 소파에 평온히 앉았다. 차 회장의 뺨을 내리치자 격했던 감정이 일단락됐는지 표정도 조금 풀어져 있었다. 화끈거리는 뺨을 쥔 차 회장을 보며 눈꼬리를 말아 웃는다.
“변명하래도? 시은 아빠가 변명하지 않으면, 난 내 좋을 대로 생각할 거야. 그래도 돼?”
차 회장은 미소 섞인 그녀 목소리에 모가지가 콱 졸린 기분이었다. 큼큼, 막힌 숨을 억지로 뚫고는 침통한 표정으로 턱을 내렸다. 이 사태를 어찌 모면할 것인지 고민하는 듯했다. 눈동자 위로 모멸감과 난감함이 뒤섞였다.
그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유 관장, 오해야. 그 아이의 가정환경이 딱해서 도와주려고 했을 뿐이야.”
차 회장 역시 말도 안 되는 변명임을 알고 있었다. 다만 무어라도 해 보기 위해 목소리를 애써 쥐어짜 내는 것이었다. 영현의 입꼬리가 어이없이 올라갔다.
“당신이 언제부터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았어? 언제부터 그렇게 동정심이 넘쳤고?”
“…….”
“일을 저질렀으면 끝까지 당당하든가……. 수습하지 못하겠으면 꼬리 말고 엎드리든가……. 자존심도 챙기고 싶고, 근데 차마 세게는 못 나가겠고. 사람이 어쩜 그래?”
어지간해서는 상대를 비꼬지 않는 영현이 대놓고 차 회장을 빈정거렸다.
차 회장의 낯이 창백히 가라앉았다. 제 부인의 말에 부아가 치미나 부정할 수 없음에 더욱 마음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속으로 여러 계산이 오갔다. 사외 이사인 영현의 지분. 강주의 지분. 영현의 외삼촌과 그를 위시한 세력의 지분.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낯짝 두껍게 튕길 수 없는 처지였다. 녹록지 않은 현실에 새삼 모멸감마저 치밀어 올랐다.
‘오늘만 우선 잘 넘긴 후, 때가 되면 저년도, 차강주 그 새끼도…….’
홀로 의지를 짓씹는 차 회장을 보며 영현은 앉음새를 고쳐 앉았다. 한쪽 다리를 꼬아 앉으며 다시 묻는다.
“도대체 걔는 누구야? 응?”
“…….”
“데려와 봐. 당신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던데, 얼굴이라도 보며 위로해 주게.”
“…….”
“왜 아무 대답도 안 해? 거기서는 말만 잘하던데? 응?”
차 회장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삐죽삐죽한 말이 절 가차 없이 찌르고 있었으나 그중 다행인 건 영현이 아직 효정의 정체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마저 밝혀지면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질 게 분명했다. 상대가 사돈아가씨라니.
분노를 넘어 혐오마저 자아낼 일이다. 효정을 향해 당당하게 드리웠던 유혹이었으나 그 유혹이 떳떳하지 않다는 사실쯤은 차 회장 역시 알고 있었다.
차 회장이 먹먹하게 잠긴 목구멍을 억지로 열었다. 그리고 박박 긁히는 목소리를 이끌고 거칠게 말했다.
“오해야. 그 영상, 악의적으로 편집된 거야. 누가 날 작정하고 구덩이에 빠뜨린 거라고.”
“…….”
차 회장의 변명에도 영현의 눈동자는 미동 하나 없었다. 침전된 눈빛으로 차 회장을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다.
“어쩌면 유상 그룹 쪽 애일 수도 있어. 이번에 면세점 입찰 건으로 우리와 경쟁하고 있으니 날 끌어내리려 작당했던 게 분명해.”
되지도 않는 말을 들먹이며 차 회장은 영현의 시선을 피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영현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차라리 화를 내면 좋으련만, 영현의 침묵이 버거워 차 회장은 괜히 목울대를 한 번 매만졌다.
영현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말레이시아 UJC 코퍼레이션, 이집트 쓰리 플라이.”
차 회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동요하고 싶지 않으나 순간적으로 주춤 그녀를 피해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영현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이거 말고도 하나 더 있는 것 같던데 거기는 아직 조사 중이라 보류.”
“…….”
“시은 아빠, 나 몰래 여기저기 뭘 많이 했더라? 페이퍼 컴퍼니를 아주 예쁘게 꾸며 놓았더라고. 하마터면 모를 뻔했어, 나도.”
차 회장은 아니라는 짧은 대화도 뱉지 못했다. 그렇지 않다는 상투적인 답변조차 죽은 것처럼 뭉그러졌다. 발뺌하면 오히려 영현의 불길을 더욱 타오르게 할 것 같아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저렇게 콕 집어 말할 정도면 이미 어느 정도 조사가 끝났다는 얘기다. 어떤 변명도 지금으로선 무의미할 뿐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 뒤로 꿀꺽하는 거, 상관없어. 괜찮아. 그럴 수 있지.”
“…….”
“당신이 뒤로 누구를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야. 어디서 누구랑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묻고 싶지도 않아. 관심도 없어.”
허리를 펴고 꼿꼿이 앉은 영현이 무심하게 읊조렸다. 차 회장은 혼잣말 같은 그녀의 말을 상대로 입술만 달싹였다. 분명 차명 계좌를 통해 작업했는데 어찌 파악한 걸까. 심장이 두근거리고 뒷골이 송연해진다.
영현이 싱겁게 웃었다.
“그런데 그걸 들키지는 말아야지. 하려면 제대로 하든가. 사람이 어쩜 그렇게 허술해?”
“유 관장, 그건…….”
순간 영현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지워졌다.
“그리고. 내게는 들켜도 세상에는 들키지는 말아야 하는 거야. 당신의 치욕을 왜 내가 감당해야 해. 내가 왜!”
말하는 도중, 속에서 불길이 이는지 영현의 어조가 격하게 높아졌다. 이를 악문 채 한참이나 차 회장을 노려보던 영현이 이윽고 긴 숨을 내쉬었다. 홀로 감정을 추스르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물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낯 위로 다시 가면 같은 무표정이 올라왔다.
“이 일, 잘 수습해. 깨끗하게 빨아서 얼룩 하나 없게 만들어. 당신을 남편으로 둔 내게, 흠집 하나 남지 않게 하란 말이야.”
허튼 짓거리 하지 말고 꼭두각시 역할이나 잘하라는 경고였다.
“…그래.”
차 회장은 모멸감을 겨우 억누른 후 고분고분 답했다.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영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그와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혐오스럽다는 듯 길쭉한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여 밖을 향해 빠져나간다. 차 회장은 우두커니 서서 제 곁을 스치는 그녀를 바라만 봤다.
영현이 문고리를 잡은 채 발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자, 세상을 내려다보는 회장실 안에 서 있는, 자그맣고 초라한 제 남편이 보였다. 그를 향해 영현은 마지막 말을 던졌다.
“당신, 잊은 거 아니지? 지금 그 자리가 원래 누구 건지.”
“…….”
차 회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잔혹한 말을 끝으로 쿵, 하고 문이 무겁게 닫혔다. 영현이 사라진 회장실 안에는 짓눌린 침묵과 터져 나오는 분노만이 남았다.
“씨발!”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헉헉거리던 차 회장이 의자를 향해 발길질했다. 거친 소음과 함께 의자가 넘어졌다.
“거지 같은 년들이!”
절 기만했던 효정과 절 비웃었던 영현의 얼굴이 뒤섞였다. 뭉개지고 헝클어져 차 회장 머릿속에서 시뻘겋게 흘러내렸다.
차 회장은 데스크 위에 있던 서류마저 몽땅 쓸어 던졌다.
“이런, 개 같은……!”
그리고 바닥을 뒹구는 스탠드마저 거칠게 걷어찼다. 우당탕거리는 마찰음이 거칠게 공간을 긁었다. 홍수처럼 들이닥치는 치욕감과 모멸감이 그를 강하게 휩쓸고 있었다.
***
이른 새벽. 효정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 재희는 동생을 서울 한복판 호텔에 데려다 놓았다. 차 회장이 누군가를 사주하여 효정을 해치리라는 상상은 하지 않았지만 불안하고 또 불안하여 참을 수가 없던 것이다.
기왕 숨기려면 자신과 가까운 곳에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여. 더불어 등잔 밑이 어둡다는 생각에 선택한 장소였다.
‘언니, 여기 되게 좋다.’
아무렇지 않은 척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효정은 동틀 무렵에야 잠이 들었다. 옆에 앉아 머리를 한참이나 쓸어 올리고 뺨을 매만져도 깨지 않을 정도로 깊이 곯아떨어졌었다.
담담한 척하지만 떨렸을 테지.
재희는 푸른 새벽빛이 아른거리는 효정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커튼을 모두 내렸다. 그런 뒤 어둠이 평화롭게 깔린 방을 뒤로하고 호텔을 나왔다.
“어쩌지. 엄청 지각이네…….”
휘청휘청 걸어 회사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어쨌든 출근은 해야 한다. 불안하지만 일상을 사는 편이 더욱 안전할 수도 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밝은 세상을 타인처럼 응시하며, 익숙한 정류장에서 내렸다.
효정을 향한 걱정.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약간의 초조함을 안고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출근 시간을 넘긴 거리는 한산했다. 일시적인 휴식이 깔린 거리를 걸으며, 재희는 눈앞에 보이는 빌딩을 응시했다. 선강 그룹. 차 회장이 맨 꼭대기에서 교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을 바로 그 빌딩.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위만 바라보다가 뒤늦게 핸드폰 전원 버튼을 켰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효정과 같은 호텔에 있을 때 위치 추적이라도 될까 두려워 꺼 둔 것이었다.
전원을 켜자마자 부재중 메시지가 올라왔다.
[재희 씨, 어디예요.]
[부재중 보면 연락해요.]
시간을 두고 보낸 강주의 메시지였다. 그리고 뒤이어 메시지보다 많은 수의 부재중 통화 내역이 눈에 들어왔다.
차강주 상무님 여섯 통.
“…….”
재희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효정이와 얽힌 일이라 강주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집을 빠져나왔었다. 그의 따뜻한 품을 빠져나와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걱정했을지도 모르니 어서 전화해야지. 재희는 손가락을 움직여 전화를 걸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지이잉- 하고 휴대 전화가 먼저 울렸다. 재희는 진동이 두 번째로 울리기도 전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강주 씨.”
그리고 여보세요, 라는 말을 하기도 전 변명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부재중 통화가 많이 와 있었네요. 제가 사정이 있어서 휴대 전화를 못 켰어요. 죄송합니다.”
-…….
전화 너머에서 답이 없었다. 고요한 침묵만이 반대편에서 넘어왔을 뿐이다.
“강주 씨?”
재희는 통화가 끊겼나 싶어 화면을 확인했다가 다시 전화를 향해 물었다.
“여보세요?”
-…지금 어디예요.
강주의 깊게 잠긴 목소리가 심연을 긁듯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