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사내는 고요했다. 금요일 아침. 보통 때라면 아침을 여는 활기찬 인사와 곧 다가올 주말을 기다리는 새된 목소리가 오갔을 텐데 싸한 정적만이 맴돌 뿐이다.
재경 팀 사원 둘이 눈짓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란히 탕비실에 들어선 후 참았던 숨을 크게 토해 낸다.
“너도 그거 봤어?”
후우, 하고 긴 숨을 내쉰 직원이 말문을 텄다.
“어어, 너도? 분위기 보니까 다 아는 거 같던데.”
“어, 무서워서 댓글도 못 달겠더라. 내 친구들도 메시지 보내고 난리 났어, 지금.”
억센 속닥거림이 공간 안에 울렸다. 차마 메신저로도 나눌 수 없던 주제였다. 출근했을 때부터 입이 근질거려 미칠 것 같았는데 이제야 털어놓을 수 있게 된 가십거리.
단발머리 여자가 탕비실 문을 돌아보더니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속삭였다.
“그런데 그거 진짠가? 합성 아니야?”
“진짜겠지. 얼굴까지 다 나왔잖아. 그리고 어느 미친 인간이 그런 걸 조작해서 인터넷에 올려? 인생 종 칠 일 있나…….”
상상만으로도 두렵다는 듯 둘의 어깨가 후르륵 떨렸다.
“우리 주식 안 떨어지려나 몰라. 나 2천만 원어치 묵혀 뒀는데.”
“그나저나 진짜 돈 거 아니야? 키다리 아저씨래. 미친…….”
말을 하면서도 어이가 없는지 문장 사이로 피식피식 헛웃음이 배었다.
“그러니까. 그런데 그거 찍은 앤 누구래?”
“모르지. 목소리 앳되던데. 대답할 때 신입생이라고 했잖아. 고등학교 신입생이면 그냥 뭐 볼 것도 없이 철컹철컹이고 대학생이면 스물인 건데… 나이 차이가……. 그냥 말을 말자.”
어젯밤. 대형 포털 사이트에 <대기업 회장님의 사생활>이라는 평범한 제목으로 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그다지 주목받는 글이 아니었다. 아무런 부가 설명 없이 동영상만 첨부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호기심에 영상을 본 한두 사람이 댓글을 달기 시작했고,
[헐. 이거 진짜임?]
[와 미쳤다. 무서워서 댓글도 못 달겠네…….]
그렇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댓글이 몇 개 달리자 게시물이 집중받기 시작했다.
동영상 주소가 들불처럼 여기저기로 퍼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밤이 되자 삽시간에 그 게시물은 화제의 중심에 섰고, 심지어 같은 아이디로 작성된 다른 게시물이 다른 포털에까지 올라가기 시작했다.
외설적인 동영상은 아니었다. 자극적인 영상 또한 아니었다. 그저 대기업 회장님과 누군가의 대화 장면이 찍혔을 뿐이다.
영상 속 인물은 선강 그룹 차병준 회장이었다. 영상 속 그의 태도는 부드러웠고 정중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문제는 대화 내용과 차 회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 상대의 정체였다.
누군지 밝혀지지 않은 여자애. 신입생이라고 답했던 갓 소녀를 지난 앳된 아이.
그리고 그 여자애에게 ‘모든 걸 줄 수 있다’며 속삭이던 차 회장의 목소리. 남자 친구가 있느냐며 물어보던 차 회장의 미소. 그것이 커다란 문제였던 것이다.
결론은 간단했다.
차병준 회장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자애에게 손을 뻗었다.
그 동영상은 밤새 포털을 휩쓸었고 온라인을 들썩거리게 했다. 철모를 나이 소녀에게 마수를 뻗친 차 회장을 비웃었고 그 앞에서 당황하여 머뭇거리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동정했다.
아침이 되자 동영상은 모두 삭제된 뒤였다. 관련 게시물 역시 상당수 지워졌다. 선강에서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모른 척 넘어가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사실이 아니라는 공식적인 반박 기사조차 없었기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이기는 하구나.’ 하고.
단발머리 여성이 픽 웃었다.
“우리 회장님 쪽팔려서 진짜 어떡하냐?”
“그러게, 말하는 거 보니까 그 짓거리 한두 번 한 게 아닌 것 같던데. 수작이 몹시 자연스러웠어.”
“그러니까.”
둘 사이에 한동안 피식피식 웃음이 샜다.
***
효정은 푹신한 침대 위에서 기지개를 쭉 켰다.
“아그그그…….”
이곳에 급히 오느라 아침이 되어서야 잠들었는데 생각 외로 아주 푹 잤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눈을 뜬 효정은 침대에서 나와 휘청휘청 창문으로 걸어갔다. 암막 커튼을 걷어 내자 쨍한 햇살이 쏟아졌다.
“날씨 좋네.”
길쭉하게 이어진 도로를 달리는 미니 블록 같은 자동차를 본다. 잠시 현실감각이 없었다.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 뜬 효정이 다시 침대로 가 누웠다.
어제 동영상을 올렸다. 차 회장을 건드려 원하던 발언을 끌어냈던, 차 안 대화를 모조리.
아이디를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추적된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어차피 제 정체를 숨기려 해 보았자 차 회장이 동영상의 출처를 모를 리 없었거니와.
“뭐 죽이기야 하겠어?”
차 회장이 감히 자신을 건드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 혼자 얽혔다면 모를까. 제게는 재희 언니가 있고 재희 언니 옆에는 차강주 상무님이 있었다. 바로 차 회장의 아들인 강주가.
아무리 차 회장이라고 한들 실타래처럼 얽힌 이 관계를 쉽게 끊고 자신을 처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침대에 배를 깔고 엎드려 시트를 쓸었다. 고급스러운 천이 만져졌다.
이곳은 언니가 남몰래 데려다 놓은 곳이었다. 동영상을 올린 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언니가 찾아왔었다. 초조함이 반, 당황이 반 섞인 눈동자를 하고는 애써 담담한 척 절 마주했었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은 차마 숨기지조차 못한 채 기숙사로 곧장 온 것이다.
그랬으면서도 자신을 나무라지 않았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느냐며 묻지조차 않았다. 혹시 모르니 며칠만 학교를 쉬고 이곳에 있으라는 말을 했을 뿐이다.
덕분에 편하게 푹 쉬고 있었다. 효정은 재희를 떠올리다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솔직히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꼭 해야 할 일이었다.
효정은 아직 어렸지만 현실이 녹록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언니가 아무리 발을 동동거리며 절 품어 키웠어도, 가난한 고등학생에게 세상은 늘 어렵기만 했다.
이미 돈의 논리를 알았고 재화가 이끄는 세상의 잔혹함 역시 몸소 깨달았었다.
“아마 그 사람이 처벌받기는 힘들겠지.”
베개 위로 허탈한 목소리가 처박혔다.
차 회장이 ‘회장’인 이상. 재판은 흐지부지 흘러갈 가능성이 컸다. 부와 권력을 지닌 바윗덩이를 향해 온몸을 던지는 달걀이 될 게 뻔하지 않은가. 처음에는 모두 주목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관심도 사라질 테고, 사건은 그대로 묻히게 될 것이다.
“그건 안 돼.”
그렇다면 엄마는 여전히 도둑일 테고, 차 회장은 언제까지고 떵떵거릴 테지.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늘 그래 왔으니까.
그렇기에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이렇게 차 회장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고, 그의 명성에 오물이라도 퍼부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정중한 재판으로 이길 수 없다면 개싸움이라도 해야지. 그게 효정의 정의였다.
“쪽팔려 죽겠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이어 중얼거렸다.
“차 회장, 진짜 쪽팔려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시각. 차 회장은 효정의 예상대로 분노와 치욕감에 젖어 있었다.
어젯밤 진위를 알 수 없는 영상이 올라왔다. 부랴부랴 삭제를 지시했지만 이미 영상은 퍼질 대로 퍼진 뒤였다. 차 회장은 열띤 침묵에 휩싸인 채 평소처럼 회장실로 출근했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면 동요하는 의중을 들킬까 두려워서였다.
영상의 진위를 파악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것이 언제, 어디서 찍힌 것인지 이미 치가 떨리도록 잘 알고 있었다.
‘그 조그마한 년이, 감히……!’
씩씩거리던 차 회장이 만년필을 냅다 집어 던졌다. 텅! 바닥에 떨어진 만년필이 차가운 바닥을 굴렀다. 새카만 잉크가 점점이 떨어져 번졌다. 마치 지금 그가 뒤집어쓴 새까만 소문처럼.
화를 참지 못하고 차 회장은 격한 숨을 연신 내쉬었다. 영상이 모두 내려갔으나 아마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조작된 영상이라 해명해?’
잠시 고민하던 차 회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소문과 추문은 얇은 양철 냄비와 같아서 부글부글 끓다가도 시간만 지나면 금세 식기 마련이다.
그래, 그런 뜬소문쯤이야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효정의 정체였다. 만약 자신과 대화하던 이가 누구인지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차 회장의 낯빛이 금세 시꺼멓게 죽었다. 며느리가 될 아이의 동생 아닌가. 가족이 될 어린애에게 손을 뻗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타격이 클 터였다.
다행히 영상 속에는 효정의 정체를 유추할 만한 그 어떤 단서도 없었으나…….
“이런 개 같은 상황이 있나.”
차 회장의 잇새로 자그마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효정을 만나 잘 설득한 후, 정체만은 숨겨야 했는데 도무지 만날 수가 없었다. 전화도 꺼져 있는 데다가 자신이 보낸 문자도 확인하지 않는 듯했다.
효정을 만난 건 독단적인 행동이었기에 권 실장도 모르는 일이었다. 때문에, 효정을 만나려면 직접 기숙사로 가야만 했는데 혹여 파파라치라도 붙을까 불안하여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씨발……!”
차 회장은 들고 있던 서류를 와작 구겨 버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에서 불안한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동안 화를 참지 못해 홀로 콧김만 훅훅 뱉을 때였다. 회사 전화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차 회장은 무시할까 하다가 대충 수화기를 귀에 붙였다.
“왜.”
-회장님, 지금 유 관장님께서 찾아오셨- 앗, 관장님, 잠시만 기다려 주…….
당황한 권 실장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문 뒤에서 작은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아.”
차 회장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내렸다. 유 관장이 왔다니. 언젠가는 나올 말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강주의 결혼 일 해결을 위해 당분간 한국에 머무르기로 한 그녀는, 집보다는 미술관에 묵는 경우가 잦았다. 어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젯밤 그녀가 자택에 없었기에 한시름 놓았었는데 동영상을 보고 찾아온 게 분명했다. 평소처럼 해외에 기거했다면 귀국하는 동안 어찌어찌 사건을 무마시켜 놓았을 텐데 지금은 시기가 일러도 너무 일렀다.
변명해야 하나. 발뺌해야 할까. 고심하는 사이 문이 벌컥 열렸다.
“관장님!”
“내 남편 사무실에 내가 들어가겠다는데 왜 막는 거야?”
서릿발 같은 영현의 목소리가 냉담하게 울렸다. 차 회장은 구겨진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권 실장을 뒤에 달고 온 유 관장이 또박또박 안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차 회장은 가까워지는 그녀를 보며 인사보다 변명부터 입에 올렸다.
“유 관장, 무얼 보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의 말은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다. 영현이 인사도 전에 손부터 추어올렸기 때문이다. 철썩! 별안간 날카로운 타격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차 회장의 문장 끄트머리가 따귀에 뭉개졌다.
“네가 감히 날 창피하게 만들어……?”
까마득히 가라앉은 유 관장의 목소리가 차 회장을 깊게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