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흐릿한 화면 안에서 차 회장은 독주하듯 지껄이고 있었다. 몰래 찍는 카메라가 가슴팍 부근에 있는지 차 회장의 얼굴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얇고 핏기 없는 차 회장의 입술이 홀로 달싹거렸다.
『키다리 아저씨라는 소설을 알지?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가끔 만나 이렇게 진솔하게 이야기 나누고……. 네가 무서워할 것 아무것도 없어. 물론 그러다 더 친밀한 사이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툭. 강주가 듣던 중간에 파일을 꺼 버렸다. 더 듣지 않아도 충분히 파악했다는 뜻이었다. 혐오스러운 것을 마주한 듯 강주의 굳어진 얼굴이 무섭도록 냉담했다.
효정이 강주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문을 틔웠다.
“갑작스러운 일에 황당하셨겠지만… 이거 진짜예요.”
목소리에 주저가 생겼다. 강주가 보이는 적의가 누구를 향해 있는지 알 수 없어 더욱 그랬다. 저 분노가 차 회장을 향한 것이라면 좋을 텐데, 혹시 아니라면. 제 아버지를 함정에 빠뜨렸다며. 선강 그룹에 파문을 일으킬 셈이냐며 불같이 화를 낼 것 같아 불안해졌다.
강주가 저렇게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건 처음 봤다. 그래서 더 초조한 것일 수도 있다. 눈앞에 있는 다정한 강주 오빠가 갑자기 선강 그룹 후계자 차강주 상무님이 되어 절 새파랗게 튀는 눈으로 노려볼까 봐.
자신이 차 회장의 치부를 들고 온 이상, 강주에게 충분히 죄인일 터다. 아비를 해칠 날카로운 낫.
강주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이윽고 다시 드러난 얼굴은 평소와 같이 고요했다.
“오빠, 화났죠?”
“그래, 화가 나네.”
강주의 입꼬리에 쓴웃음이 배었다.
효정이 찬찬히 눈동자를 내렸다. 역시. 역시 강주 오빠는 절 원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후회하지는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차 회장, 그 노망난 아저씨가 언니에게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걸.
언니가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 왔듯, 자신도 언니를 지켜야 했다. 그건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이거 언니는 모르는 일이에요. 언니한테 뭐라고 하시면 안 돼요.”
“…….”
“저번에 언니 바라보는 눈길도 이상했어요. 그러니까, 오빠가 언니 사랑한다면 언니 지켜 줘야 하는 거예요. 사실, 마음 같아서는 이 결혼 반대하고 싶어요. 저 같은 게 감히 누굴 반대하는 건지 우습긴 한데…….”
테이블만 내려다보며 효정은 먹먹히 읊조렸다.
“그런데 언니가 오빠 좋아하니까 제가 반대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런 선택 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해는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저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요, 오빠.”
울 것같이 속삭이다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절 바라보는 강주가 앞에 있었다. 냉랭한 눈을 마주하니 머리부터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차 회장 앞에서도 당당했던 소녀가 강주 앞에서는 움츠러들었다. 강주가 무섭거나 두려워서 때문은 아니었다. 혹여 이 일로 언니가 파혼이라도 당할까 봐. 사랑하는 두 사람을 자신이 갈라놓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치민 탓이다.
언니를 위해 한 행동이었다.
차 회장은 이런 사람이니, 남편인 형부가 미리 알고 지켜 줘야 해요. 그런 의도가 다분했다. 차 회장이 언니 건들면 저 가만히 안 있어요. 이거 풀어서라도 다 물어뜯을 거예요, 하는 경고가 담겨 있기도 했다.
강주는 말이 없었다. 효정은 애가 타 식은 커피를 들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효정이 컵을 내려놓자 그제야 강주가 입을 열었다.
“효정아.”
무섭도록 다정한 음색이 닿았다. 효정은 “네……?” 하고 작게 대답했다. 그냥 불렀을 뿐인데 괜히 흠칫 어깨가 떨렸다.
누그러진 표정으로 절 바라보는 효정을 향해 강주가 이어 말했다.
“왜 그 사람이랑 둘이 만났어.”
“그래야 이걸 녹음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음에는 절대 그러지 마. 위험하니까.”
효정의 눈이 살짝 커졌다. 걱정을 한가득 담은 강주의 두 눈동자가 보였다.
18장. 밀물
효정은 신이 나서 달렸다. 언니가 기숙사 옆 카페로 왔다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곳인데도 그냥 걷기가 힘들어 자꾸만 뛰게 된다. 헉헉 목까지 숨이 차는데도 계속 달렸다.
안 그래도 언니가 보고 싶어 서울로 갈까 했는데 언니가 왔다니. 뭐가 통해도 통한 모양이다.
어제, 룸메이트가 캔 맥주를 마시며 중얼거렸었다.
‘기숙사에 있으니 엄마 보고 싶다.’
효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물론 보고 싶었고, 언니도 보고 싶었다. 자신은 보고 싶은 이가 두 명이라 더 징징거리고 싶었는데 룸메이트가 사 온 오징어 다리만 씹으며 꾹 눌러 참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딱 내려와 주다니. 언니는 역시 언니야.
카페에 들어서자 창가에 앉은 재희가 보였다. 흘러내리는 가방을 추켜올린 후 효정이 다다다 뛰어들었다.
“언니!”
“우리 효정이 왔어?”
“응! 언니!”
달리느라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 효정은 헤헤 웃었다.
“천천히 오지. 안 힘들어?”
“응! 괜찮아!”
효정은 고개를 휙휙 내저으며 재희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로 책을 와르르 쏟아 내자 픽 웃은 재희가 주섬주섬 그것을 정리해 주었다.
효정은 턱을 괸 채 언니를 바라봤다. 책을 담아 올리는 손길이 그리 활기차지 않다. 내리깐 눈이나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효정은 턱을 괴었던 팔을 내리고 재희를 향해 물었다.
“언니, 무슨 일 있어?”
왜인지 불안하다. 본인이 했던 일이 있어 더욱 그랬다. 바로 며칠 전에 강주 오빠를 만나 차 회장의 동영상을 보여 주지 않았나. 혹시 그게 문제가 된 걸까?
하지만 그 일은 아주 훈훈하게 마무리됐었다.
‘다음에는 그런 위험한 짓 절대 하지 마, 효정아.’
강주 오빠는 마치 큰오빠라도 된 것처럼 절 혼냈고, 효정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덧붙여 강주는, 차 회장 일로 언니를 힘들게 하는 일이 없을 거라며 효정을 안심시키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 일은 마음에서 지웠었는데.
효정의 초조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희가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담담히 말을 건넸다.
“효정아, 언니가 보여 줄 게 있어.”
“뭔데?”
“놀라지 말고 봐. 알았지?”
“응.”
효정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언니가 저러는 건지. 의아하게 눈만 끔뻑이고 있노라니, 입술을 한 번 깨문 재희가 테이블 위 랩톱을 열었다. 달칵달칵, 제 손을 바라보는 효정의 시선을 달고 마우스를 움직인다.
“우리 효정이 걱정할까 봐 언니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사건이 커지면 너도 알게 될 테니까.”
“뭔데 그래. 불안하게.”
“우선… 봐. 엄마 사고 났을 때 찍힌 영상이야.”
재희는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동영상이 재생됐다. 효정이 가만히 화면을 주시했다. 주방이 보였다. 엄마도 보였다.
“엄마…….”
효정은 새삼스러운 반가움과 슬픔으로 뒤섞인 채 동영상을 보다가 어느 순간 흠칫 놀랐고 이어 눈을 크게 떴다. 그 뒤로 짧은 재생이 끝났다.
“다 봤지? 이제 다음 동영상 봐.”
재희가 짤막한 문장과 함께 두 번째 영상을 재생했다.
효정은 멍하니 화면을 주시했다. 입술 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손끝부터 오한이 타고 올랐다. 2층을 황급히 달려 벗어나는 엄마를 봤을 땐 온몸이 떨리기까지 했다.
이윽고 화면이 새까매졌다.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게 무슨 영상인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고 있었다.
효정은 머릿속으로 차 회장을 떠올렸다. 차병준 회장. 그는 자신을 향해 뱀 같은 탐욕을 보였었다. 그의 혐오스러운 성정을 미루어 볼 때, 이 동영상이 보여 주는 건 단 하나였다.
차 회장 그 새끼가 엄마에게도 그런 짓거리를 하려 했던 거다.
“그러니까 엄마가. 우리 엄마가. 엄마는.”
문장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효정은 엄마라는 말만 반복하여 중얼거리다가 머리가 정리되지 않는지 손톱을 까득까득 씹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엄마 사고……. 그러니까……. 그게, 엄만…….”
“그래, 엄마 사고, 단순한 사고 아니야. 우리 엄마 결백해.”
재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미 백 번도 넘게 돌려 보았던 동영상이다. 혹여 무슨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겁에 질린 엄마 얼굴을 보며 눈물 콧물 쏟으며 재생하고 또 재생했던 동영상.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만큼은 의연할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자신이라도 담담한 척 효정이를 보듬어 줄 수 있어서.
“그래서 이 사건, 차 회장의 과실치상이라고 다시 수면 위로 올릴 거야. 만약 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면 어떻게든 명예라도 끌어내릴 생각이야.”
효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내렸다. 기어코 손등 위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젖은 효정의 손등을 재희가 부드럽게 맞잡았다. 눈물 가득한 효정의 뺨이 애처로워 저 역시 마음이 미어졌지만 둘 다 약해지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애써 감정을 참는다.
“우리 효정이 놀랄까 봐 말 못 했는데, 어쨌든 언젠가는 알게 될 테니까.”
“…….”
“언니가 약속할게. 차 회장 어떻게든 무너뜨릴게, 언니 믿어.”
본인의 슬픔은 꽉 누른 채 재희는 효정을 부드럽게 보듬었다. 재희의 목소리에 붙들린 것처럼 효정이 고개를 들었다.
“언니…….”
“우리 효정인 걱정할 거 아무것도 없어. 알겠지?”
효정은 입술을 달싹였다. 당장이라도 와앙 하고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 코만 훌쩍거리며 간신히 참았다. 애써 다문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제 뺨을 티슈로 닦아 주는 언니의 손길이 애처로웠다.
내가 울면 저 의연한 척하는 언니마저 엉엉 울겠지. 울면 안 돼.
자매는 서로의 슬픔을 눌러 참으며 소리 없이 울었다.
한 시간 후. 효정은 몽유병 환차처럼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면 억지로 눌렀던 울음이 마구 터져 나올 것 같았는데 의외로 평온했다.
문득 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절 기숙사 앞까지 바래다주고는 “정말 기숙사에 계속 있어도 괜찮아?”라며 걱정스레 자신을 들여다보던 상냥한 얼굴이.
멈춘 화면처럼 서 있던 효정이 찬찬히 움직였다. 발꿈치를 들어 손을 쭉 뻗은 후 서랍장을 더듬어 자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딱딱한 네모 뚜껑을 열자 자그마한 USB가 오도카니 담겨 있었다.
“…….”
효정은 그것을 가만히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