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부드럽게 풀린 공기가 초록으로 움튼 나뭇잎을 타고 넘는다. 노곤한 계절이 한 뼘 눈앞으로 와 있었다.
효정은 제 앞에 서 있는 새까만 리무진 차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평소보다 쾌활하게 외치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파릇파릇한 신입생답게 품에 전공 책과 파일철을 가득 끌어안은 채.
탕. 차 문이 닫히자 환했던 내부가 일순 침침한 그늘에 덮였다. 직접 운전대를 쥐고 있는 차 회장이 시꺼멓게 덮인 눈동자로 효정을 좇았다.
효정이 차 회장에게 연락한 후 이틀 뒤. 차 회장은 무어가 급한지 직접 그녀를 데리러 왔다. 그것도 대학교 기숙사 앞까지 직접 차를 몰고.
“오래간만이구나, 효정아.”
“네, 회장님. 잘 지내셨어요?”
효정은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억누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긴장에 찬 날숨을 남몰래 뱉은 후 다시 씩 웃는다. 이내 차는 출발했다. 마냥 해맑기만 한 아이처럼 웃는 효정을 태우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차 회장이 사람 좋은 아저씨처럼 근황을 물으면, 효정은 수업 얘기 등을 꺼내며 가볍게 웃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공기 속에서 일상적인 대화가 끝날 즈음 차가 멈추어 섰다.
도착한 곳은 고즈넉한 호숫가였다. 반쯤 가라앉은 태양이 수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둘은 이내 차 밖으로 나왔다. 바람은 시원하고 공기는 청정했다. 여지없이 기분 좋은 오후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면 위로 푸른 잎이 드리운 호숫가를 응시하며 차 회장이 먼저 물꼬를 텄다.
“바람이 좋구나. 호수도 좋고.”
“네, 시원하네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효정을 차 회장이 힐끔거렸다.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뺨 위로 붉은 석양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차 회장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이 모습은 정말이지 미령이와 닮지 않았나.
그는 익히 보아 왔다. 돈을 좇아 납작 엎드리는 자와 권력 앞에 무너지던 이들을. 하지만, 강미령. 미령은 그렇지 않았다. 닿을 수 없이 고고하게 고개를 쳐들고 늘 제 손아귀를 빠져나가기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핏줄이 제 눈앞에 있다. 미령의 피를 이은 아이가 미령과 같은 얼굴로 제 옆에 서 있는 것이다. 손을 뻗으면 당장이라도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은 실체를 가지고.
벅찬 희열이 발끝부터 타고 흘렀다. 차 회장은 치솟는 감정을 억지로 내리밟았다.
“효정아. 무서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다.”
효정이 어렴풋이 고개를 돌렸다. 새빨간 석양빛 아래, 더 붉은 흥분을 띤 음험한 이가 시선에 잡혔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효정은 담담히 답했다.
“무서울 게 뭐 있나요. 고민하고 결정한 일이에요. 제 선택에 책임을 지고 행동할 수 있는 성인이고요.”
“그렇지, 너도 이제 성인이지.”
효정이 호수를 응시하며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고등학교 때와는 다르네요. 여긴 별세계예요. 친구 하나는 외제 차를 끌고 다른 친구는 명품 백 들고. 저는 땅개미처럼 기숙사에 와글와글 모여 사는데 다른 앤 커다란 빌라에서 혼자 살고.”
차 회장의 입꼬리가 주욱 올라갔다.
“세상이란 그렇지. 앞으로 더 달라질 게다.”
“솔직히, 부럽더라고요. 질투도 나고.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저도 가질 수 있잖아요, 그거.”
“…….”
“그래서 회장님께 연락드린 거예요. 제가 못 가진 거, 지금은 갖고 싶어져서.”
그 말을 끝으로 효정은 바짝 마른 흙을 발로 뭉갰다. 차 회장은 목덜미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터져 나오려는 벅찬 웃음을 간신히 삼키고는 다시 고개를 든다.
“춥구나. 차로 돌아가자.”
“네.”
둘만의 은밀한 대화를 나눌 공간이 필요했다.
운전석에 앉은 효정이 의자에 올려놓았던 전공 책을 들어 가슴팍에 감싸 안았다. 차 회장은 차를 출발시키는 대신 의자를 뒤로 조금 뺐다. 효정을 향해 상체를 돌리자 둘 사이에 남은 벽은 효정이 꽉 쥔 책뿐이었다.
“사실 이렇게 빨리 연락할 줄은 몰랐다.”
“…….”
“어려운 결심이지. 안다. 하지만 후회 없을 게다.”
효정은 대답을 쉬었다. 효정의 머뭇거림을 읽었다는 듯 차 회장이 훈수를 두듯 말을 이었다.
“아직 모르겠지만, 사회라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는 점점 벌어지지.”
“격차요……?”
“출발선이 다르면 주어지는 기회조차 다르다. 그 기회가 네겐 오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서 네게 내가 필요한 거다.”
효정이 가까워지는 차 회장을 피해 슬그머니 상체를 물렸다. 차 회장은 기왕 말을 시작한 것 끝을 볼 요량인지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 냈다.
“네가 원하는 건 내가 무어든 해 줄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거라면, 다.”
“…….”
몸을 뒤로 빼는 효정을, 차 회장은 먹이를 쫓는 맹수처럼 압박했다. 탐욕으로 시뻘겋게 눈을 붉히고는 시꺼먼 속내를 모조리 드러냈다. 눈앞에 있는 예쁜 먹잇감을 한입에 꿀꺽 삼킬 것처럼.
“남자 친구가 있니?”
“아뇨, 아직. 신입생이라.”
“있었던 적은 있고?”
“아뇨, 공부하느라 없었어요…….”
효정의 대답에 만족한 차 회장이 숨길 수 없이 웃음을 올렸다. 눈 내린 땅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내는 사람처럼 벅참을 끌어안고 눈가에 주름을 만든다.
“키다리 아저씨라는 소설을 알지?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가끔 만나 이렇게 진솔하게 이야기 나누고……. 네가 무서워할 것 아무것도 없어.”
“…….”
“물론 그러다 더 친밀한 사이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직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목소리에 어리는 흥분을 애써 지우고, 차 회장은 아이를 설득하듯 나긋나긋 말을 건넸다. 제 탐욕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차 회장을 보며, 효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 회장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저도 모르게 효정을 향해 손을 뻗는다. 머지않아 손아귀에 잡힐 아이. 미령의 핏줄. 움켜쥐고 휘두르고 싶었던 제 오랜 염원.
하지만 효정은 그에게 잡히는 대신 몸을 팍 물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회장님, 저 이제 기숙사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곧 저녁인데 함께 식사하지 않고.”
“조별 과제 모임이 있어서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우리에게 시간은 많으니까.”
차 회장이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효정을 힐끔거리다가 이내 흡족한 얼굴로 액셀을 밟는다.
지금은 날아가지만 다시 붙들어 새장에 넣을 아이. 차 회장은 크게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
녹색 이파리가 조명 아래 반질반질 빛난다. 효정은 카페에 있는 나뭇잎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맞은편에 소리 없이 앉아 있었다. 놀란 표정 하나 없이 효정이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강주 오빠.”
“잘 지냈어?”
강주 역시 미소와 함께 인사를 보냈다.
약 30분 전. 효정은 선강 그룹 빌딩 앞으로 찾아와 무작정 강주를 호출했었다.
‘오빠, 제가 꼭 할 말이 있어요.’
재희 언니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하며 한적한 카페로 부른 것이다. 이따금 연락하기는 했으나 효정이 오늘처럼 막무가내로 찾아온 건 처음이라 강주는 하던 업무를 멈추고 곧장 내려온 참이었다.
둘 사이에 신변잡기식 간단한 대화가 오갔다. 이 시간에 여기는 어떻게 왔냐. 수업 째고 왔다. 학생이 그러면 안 된다며 강주가 짐짓 엄한 오빠처럼 잔소리하자, 효정은 모른 척 딴청 부리기까지 했다.
한참이나 가볍게 수다를 나누던 효정이 얼핏 강주의 표정을 살피더니, 대화 내내 꼼지락거리던 손을 조심스레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달칵. 휴대 전화가 테이블 바닥에 등을 깔고 누웠다. 새파란 창 위로 동영상 하나가 재생 직전에 멈추어져 있었다.
강주는 가만히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효정이 보여 주려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려 했으나 읽히는 건 없었다.
“제가 오빠 좋아하는 거 아시죠?”
효정이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강주가 덤덤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난 재희 좋아하는데.”
듣기 좋은 저음으로 건네는 농담이 딱딱해진 분위기를 삽시간에 깨 버렸다. 효정이 어깨를 흔들려 한숨을 쉬었다.
“그거 말고요! 아, 진짜, 진지할 수가 없게!”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아까부터 주저하더니.”
강주가 철없는 막냇동생을 대하듯 다정하게 그녀를 얼렀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효정이 빙빙 말을 돌리며 타이밍만 재고 있는 걸 진작 간파한 것이다. 무언가 할 말을 쌓아 둔 채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효정을.
그래서 적당히 받아 주며 농담으로 판을 깔아 주었다. 효정이 가볍게 한 발을 내디딜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며.
효정이 시선을 내려 제 휴대 전화를 노려보았다.
“아까 말했지만요, 저 오빠 좋아해요. 오빠한테 악감정 하나도 없어요.”
“그래, 알아.”
당연한 말에 당연하게 답했다.
“그리고 저는 거짓말 같은 거 안 해요. 특히 내 언니의 남편 될 사람에게는 더욱. 지금 보여 드리는 거 다 진짜라는 소리예요.”
“알겠어.”
마치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효정을 향해 강주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저한테 되바라진 애라고 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전 언니가 가장 소중하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까지 선전포고를 하는지 궁금해지는데.”
그제야 효정이 휴대 전화를 노려보던 눈동자를 들었다. 여유로운 미소로 절 응시하는 강주가 보였다. 몇 초간 강주를 바라보다가 효정은 화면 위에 올라온 재생 버튼을 눌렀다.
『아직 모르겠지만, 사회라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는 점점 벌어지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강주가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격차요……?』
이어진 목소리 역시 강주가 익히 알고 있었다. 바로 맞은편에 앉은, 윤효정.
동영상은 딱딱히 굳은 침묵을 파헤치며 이어 울렸다.
『출발선이 다르면 주어지는 기회조차 다르다. 그 기회가 네겐 오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서 네게 내가 필요한 거다.』
『…….』
『네가 원하는 건 내가 무어든 해 줄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거라면, 다.』
강주의 얼굴이 조용히 굳어졌다. 하얗게 얼어붙은 한겨울의 강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