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재희는 우선 뜨거운 물에 몸을 씻었다. 델 듯 김이 나는 온수를 맞으며 고개를 숙였다. 눈물인지 물인지 모를 것이 뺨을 타고 흘러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제 마음도 심연 속으로 시꺼멓게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모든 것이 거짓이란 게.
차 회장의 증언도, 엄마의 죄도 모두. 모두 거짓말에 불과했다.
차 회장이 이 영상을 지우지 않은 이유는 무얼까.
‘…오히려 지우라 했다면, 권 실장의 의심을 샀겠지. 홀로 알고 있어야 했을 테니까.’
경찰은 차 회장의 증언을 믿어 사건을 깊게 파지 않을 테고, 권 실장 역시 CCTV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터다. 그저 모른 척 덮는 게 최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CCTV 따위, 흘러가게 내버려 두면 될 일 아닌가.
2층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차 회장을 피해 엄마가 달아났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엄마와 차 회장의 차림새로, 어떤 일이 있었을지 대충 유추 또한 가능했다.
그렇게 도망치듯 내려오다가 발목을 삐끗한 엄마가, 결국 현관 계단을 지나다 넘어졌겠지. 그리고 그 뒤에.
“…….”
아프게 굴러가던 생각을 멈추고 눈을 꽉 감았다. 하아, 하아, 꽉 막힌 속을 비집고 거친 숨결이 샜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고 짜내는 듯 아프다.
겁에 질렸던 엄마의 표정. 엄마를 급히 따라나서던 차 회장의 얼굴. 분노와 당황이 뒤섞였던 그의 비열한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
허탈하게 내뱉은 한숨이 어이없이 웃음이 됐다. 힘겹게 토해 내던 웃음소리가 어느새 오열로 변했다.
“엄마, 미안해… 엄마…….”
권력을 가진 자의 거짓 증언은 파괴적이었다. 강미령이라는 한 사람의 삶과 그녀를 사랑하던 한 가정의 삶을 성공적으로 무너뜨렸다.
재희는 엉엉 울며 몸을 웅크렸다. 비처럼 내려오는 물줄기가 등을 아프게 때렸다. 뿌옇게 차오르는 열기에 숨이 막히고, 속에서 치미는 분노로 몸이 불타는 것 같았다.
자신이 무지해서. 제가 어리석어 진실을 미처 몰랐다. 엄마가 오명을 뒤집어쓴 채 누워 있는데도 슬퍼만 하며 엄마가 깨어나기만을 바라던 철부지가 바로 자신이었다.
엄마가 그랬을 리가 없는데.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는데. 난 왜 엄마를 믿어 주지 못하고.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그런 잘못된 선택을 한 줄만 알았다. 자신조차 엄마를 믿지 못했는데 세상에서 쏟아지던 손가락질이 엄마에겐 그 얼마나 커다란 형벌이었을까. 어쩌면, 엄마가 이성을 잃은 이유는, 거친 가시로부터 그녀를 지켜 주는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죄책감과 자책감이 쏟아져 내렸다. 재희는 몸을 지탱하기 힘들어 휘청휘청 바닥에 무릎을 댔다. 몸을 웅크리고 앉아 바닥을 짚었다.
“엄마, 미안해…….”
어미를 잃은 아이처럼 애처롭게 속삭이며 한참이나 엉엉 울었다. 미어지는 심장을 꾹 누르며 슬픔을 토해 내고 아픔을 쏟았다. 가슴을 쿵쿵 두드려도 꽉 막힌 속이 풀리지 않아 호흡이 힘들었다.
한참이나 홀로 울던 재희는 눈물조차 말랐을 즈음 물을 잠갔다. 뚝, 뚝, 물방울이 그녀의 몸을 타고 내렸다. 온기를 잃은 몸이 바르르 떨린다. 그게 추위 때문인지, 제 몸을 발치부터 타고 오르는 분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욕실을 나오자 권 실장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재희 씨,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무어든 돕겠습니다.]
그리고 그 문자 뒤로 십여 분이 지나 도착한 다른 문자 하나.
[힘내세요.]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난 늦은 문자였다. 위로의 말을 썼다가 지우고, 많은 문장을 적었다가 삭제한 고심의 흔적. 아주 짧지만 오롯한 진심이 담긴 문장.
재희는 휴대 전화를 꽉 쥐었다.
‘힘내야지. 힘내서 차 회장에게 모두 돌려줘야지.’
그녀는 격해지려는 숨을 애써 내리눌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넓고 휑한 집 안에 우두커니 앉아 반짝이는 서울 야경만 보고 있노라니 저 멀리 인기척이 들려왔다. 재희는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가 거실 복도 끝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를 향해 몽유병 환자처럼 다가섰다.
유령처럼 제 앞에 선 재희를 보며, 강주는 언뜻 낯 위에 의아함을 담았지만 이내 다정히 인사했다.
“저 왔어요.”
재희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강주가 그녀를 끌어당겨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살갗 위에 따뜻한 입술이 닿는다. 재희는 그제야 움직였다.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팍을 짚고 천천히 밀어내며 강주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티 없이 매끈한 얼굴이 보였다.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오만하지만 절 바라볼 때면 이따금 한없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그를.
눈 아래 약간의 피곤이 배어 있었으나 강주의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 따뜻한 눈동자를 향해 재희는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알고 있었어요?”
그에게서 일순 미소가 지워졌다. 난데없이 던져지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강주는 재희의 의중을 짚는 듯 고개 기울여 그녀의 표정을 훑었다.
재희가 되물었다.
“우리 엄마 일, 알고 있었냐고 물었어요.”
그제야 언뜻 강주의 표정에 금이 갔다.
“저는 오늘 알았어요. CCTV 보고, 이제야. 그날 차 회장이… 난 그것도 모르고……!”
오갈 곳 없는 감정이 목소리 안에 뚝뚝 묻어났다.
누구라도 원망하고 싶었다. 누구에게라도 갈 곳 없는 이 억울함을 쏟아 내고 싶었다. 엄마의 결백을 외면한 건 본인이었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알고 있으나 제 죗값을 타인에게 돌리고픈 이기심마저 치밀었다. 어리석은 감정이었다.
강주에게서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재희의 울분을 가만히 받아 주며 그녀의 물기 어린 눈동자를 내려다본다.
그의 양복을 비틀듯 쥔 재희가 목소리를 겨우 짜냈다.
“만약 강주 씨가 절 속인 거라면. 엄마와 관련 있는 거라면…….”
힘주어 꾹꾹 누르는 단어가 울음에 뭉그러졌다.
차 회장의 아들인 그는 무얼 알고 있었을까. 도와준다며 접근한 건 혹시 계획이었을까. 머리는 그를 믿으라 하는데 척척히 젖은 심장은 의심을 싹틔웠다. 그가 입을 열어 기어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확신을 받아야 숨이 트일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엄마를 위험에 빠뜨린 사내를 사랑해 버린 몹쓸 딸이 되는 거니까.
제발 아니라고 해 줘요.
재희는 소리 없이 울며 올려 보았다. 만약 당신이 날 속인 거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요. 억센 말이 혀끝에 달라붙었으나 목이 메어 나오지 않았다.
그의 옷을 붙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억지로 치켜뜬 눈 아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강주가 휘청이는 재희를 붙들어 가만히 당겨 안았다. 오한이라도 든 듯 잘게 떨리던 그녀의 몸이 그에게 꽉 맞물려 안겼다.
머리 위로 우는 아이를 달래듯 침착한 목소리가 울렸다.
“일전에 오은진 씨를 만난 적이 있어요.”
“이모를요?”
반문하며 눈을 깜빡이자 속눈썹 끝에 걸려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길 잃은 표정으로 절 응시하는 재희를 보며, 강주는 그녀의 젖은 뺨을 천천히 쓸었다.
“그때 차 회장과 아주머니의 과거 얘기를 들었어요. 재희 씨가 이 일을 파고 있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고.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어렴풋하게 파악했던 건 사실이에요.”
“아…….”
재희는 멍한 얼굴로 의미 없는 소리만 뱉었다.
일전에 재희와 오은진이 만났다가 헤어진 날, 강주는 은진 앞에 나타났었다. 자신을 재희의 남자 친구라 소개하며 자연스럽게 대화 물꼬를 틀어 원하는 말을 모조리 들었었다. 은진이 오지랖 넓게 뱉는 단편적인 발언들을 짜 맞추어 결국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재희가 무얼 궁금해하는지, 재희가 무엇을 의심하는지.
그리고.
재희가 어째서 자신에게 다시 다가와 주었던 건지.
“먼저 행동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재희 씨가 진실을 알겠다며 내게 몸까지 던졌는데 어떻게 그러겠어요.”
씁쓸한 목소리가 이어 울린다.
“끝내 재희 씨가 알아내지 못했다면 내가 손을 썼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정적이 감겼다. 강주는 말을 고르는 듯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전 차 회장이 저지른 짓거리와 관련 없어요.”
그리고 제 옷깃을 쥔 재희의 손을 잡아 내린 후 꽉 맞잡았다. 차갑게 식은 손을 단단한 온기로 붙들며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는다.
“그러니 부디 믿어 줘요.”
“…….”
나직했으나 심지가 단단히 들어 있는 음성이었다.
재희는 눈을 감았다. 마음을 울리는 그 낮고 차분한 목소리는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만약 이것이 거짓이라면 그는 세상에서 거짓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일 터다.
목소리만으로 이토록 안심이 되는데. 짧은 문장 하나로 이토록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데. 이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속고 싶어질 만큼 다정하기만 한데.
재희는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다.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무너지듯 그에게 기대 가슴팍에 뺨을 댔다. 조용히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의 옷을 천천히 적셨다.
꽉 밟혔던 감정이 차츰차츰 퍼져 나왔다. 길바닥에 앉아 울고 있다가, 누군가 뻗은 손을 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기분이었다. 아까 모조리 흘려 내 버렸다고 생각한 눈물이 그의 품에서 다시 터져 버렸다.
“왜. 왜…….”
그의 가슴팍을 약하게 두드리며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원망을 뱉어 냈다.
“도대체 왜…….”
도대체 차 회장은 왜 그런 짓을. 자신은 왜 진실을 알지 못했으며, 엄마는, 왜. 왜 그렇게 불쌍하게 누워 있어야 하는 건지. 도대체, 왜.
주먹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려 왔다. 재희는 고개를 내저으며 무너져 내렸다. 더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었다. 절 단단히 붙들어 주는 품이 안락해 자꾸만 허물어졌다.
울며 무너지는 재희를 강주가 단단히 붙들었다. 가뿐히 당겨 품고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재희 씨는 아무런 걱정 하지 말아요.”
그의 입술이 그녀의 눈꼬리에 닿았다가 이내 뺨으로 천천히 끌어 내려왔다. 위로만을 담은 온기가 살갗을 부드럽게 타고 내려온다. 이어 입술 위에도 그의 입술이 닿았다. 흐느껴 떨리는 그녀의 입술을 훑고 입을 맞췄다.
“오늘은 푹 쉬어요. 이제 시작이니까.”
부드럽고 침착한 목소리에 재희의 떨림 역시 차츰 멎었다.
재희는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젖은 숨이 그의 품 안에 흐트러졌다. 곧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강주가 그녀를 품에 안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재희는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작게 속삭였다.
“전 반드시 차 회장 죗값 치르게 할 거예요. 어떻게든.”
“…CCTV에 어떤 영상이 있었는지 대충 예상이 가요. 하지만 그거 하나로 차 회장은 무너지지 않아요.”
“알고 있어요.”
재희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답했다. 감은 눈꺼풀 위로 희미한 조명 빛이 너울거렸다. 이윽고 등이 천천히 푹신한 천 위에 닿았다. 깨지기 쉬운 연약한 것을 다루듯, 강주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를 눕혔다.
재희는 가만히 눈을 떴다. 젖은 눈가가 화끈거린다. 제 머리카락을 달래듯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부드러웠다. 차분한 강주의 얼굴을 보니 거친 풍랑에 휩쓸렸던 마음이 점차 고요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흥분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병준 회장. 선강 그룹의 오너. 한낱 사원인 자신과 달리 무지막지한 권력을 손에 쥔 인물. 그를 끌어내리는 건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재희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절 속이지 않았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차 회장, 어떻게든 같이 무너뜨려요.”
강주는 고개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맞닿은 입술 틈으로 뜨거운 숨결과 가라앉은 목소리가 흩어졌다.
“재희 씨가 원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