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권 실장이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답했다.
“제안이라니, 전 그저 경호원일 뿐입니다. 사모님이 되실 재희 씨가 원하실 만한 건 제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권 실장님께서 들으면 오히려 의아해하실 사소한 거니까.”
“도대체 그게 뭡니까.”
재희는 말하기 전 긴장을 풀기 위해 잠시 시선을 내렸다. 딱딱하게 굳은 콘크리트가 보였다. 제 몸도 저것처럼 딱딱히 굳어 있을 것이다. 만지면 파삭파삭 부러질 것같이 단단하게. 담대한 척했으나 사실 속에서부터 치미는 떨림이 아까부터 멈추지 않았다.
재희는 홀로 속을 갈무리한 후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차 회장님 댁 CCTV 백업본, 실장님께서 관리하시죠?”
드디어 말을 꺼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권 실장이 의아하게 물었다.
“예, 그렇긴 합니다만. 그건 왜?”
“저택 실내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주방에 CCTV가 있던데. 20XX년 자료도 아직 갖고 계시는가요?”
“…물론 갖고는 있습니다.”
그가 미심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CCTV 백업본을 갖고 있다고 하여 그것을 돌려 본다거나 한 적은 없었다. 관리할 것도 없이 그저 데이터만 저장할 뿐이다.
정말 별거 아닌 자료였다. 기껏해야 계단을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꼭지. 차 회장 일가는 결코 다가서지 않을 싱크대 전경만 담겨 있을 뿐이다. 다만, 그 안에 담긴 대상이 차 회장 일가였기에 조심스러울 뿐.
“쓸 만한 정보는 없는 영상 화면일 뿐일 텐데요.”
“제게는 그 쓸데없는 영상이 꼭 필요해요.”
“도대체 뭘 찾으려 하시는 거죠?”
재희는 담담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침착하게 답했다.
“저도 봐야 알아요, 확인할 게 있을 뿐이니까.”
침묵으로 재희를 바라보던 권 실장이 강경하게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라 하시니 더욱 드릴 이유가 없겠군요. 제가 거절하였다고 하여 시은 씨와 제 사이를 알린다고 하셔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정보 유출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한들 배신을 뜻하는 거니까요.”
그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정말 ‘별거 아닌’ 백업본일 게 뻔했지만, 권 실장 자신은 차 회장을 수행하는 신실한 종놈이다. 회장님 몰래 자료를 넘긴다는 그 사실 자체가 배신이었다.
재희는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이 들고 있던 건 고작해야 ‘시은 씨와의 관계를 폭로하겠어요!’라는 작은 패일 뿐이다. 권 실장을 쥐고 흔들 수 있으리라고는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다.
“권 실장님. 저희 아빠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아파요. 속된 말로 다들 재수가 없는 집이라고 하더군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재수가 없다기보다는…….”
이어지는 말을 고르기 위해 권 실장이 짐짓 고심했다. 일순 그녀를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그의 배려를 들여다보며 재희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아빠 죽고, 엄마 아픈 재수 없는 여자보다는 권 실장님이 낫지 않겠어요?”
“예? 그게 무슨…….”
“한 손을 쓰지 못하면 다른 손으로 젓가락질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두 손 다 다치면 밥그릇에 얼굴을 처박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알 수 없는 재희의 말에 권 실장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의미를 파악하려 애써 경청할 뿐이다.
“지금 제 입장이, 선강의 손 하나를 잘라 버리는 꼴이 되고 있거든요. 저와 강주 씨가 결혼하면 정략결혼으로 딸려 올 이득이 모두 사라지는 거예요. 저 같은 애 하나로.”
“…….”
“그런데, 권 실장님과 시은 씨가 결혼하면……. 그거야말로 선강의 양팔이 잘리는 거죠. 아, 쉽게 얻을 수 있는 걸 스스로 내치는 꼴.”
“그건…….”
재희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기석을 향해 담담히 말을 풀어냈다.
“시은 씨는 권 실장님과의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 불행히도 제가 있는 한 불가능한 일이에요. 아들 하나는 어찌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딸까지 그럴 수는 없을 테니까요. 당연하잖아요.”
권 실장은 씁쓸한 납득을 달고 힘없이 미소 지었다.
저 역시 사무치도록 알고 있었다. 그간 시은이 말했던 결혼 얘기를 칼같이 잘라 냈고 들리지 않는 척 뭉갰다. 그럴 때마다 언뜻 상처받는 시은의 눈빛을 발견했지만 눈감고 외면하기만 했었다.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눈앞의 윤재희를 보니 문득 허탈함마저 치밀었다. 가능한 일일 수도 있었다, 적어도 자신이 용기만 냈더라면.
그러나 머뭇거리는 사이 윤재희라는 이가 비집어 들어왔고 강주가 선수를 쳤기에 기회를 영영 잃고 말았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감히 바라지도 않고요.”
그가 어렴풋이 답했다. 재희의 말이 맞았다. 하나는 ‘재희 같은’ 사람과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하나는 아니었다. 영현은 당연하고, 재희를 반기는 차 회장마저 ‘강주까지는 몰라도 시은은 절대 안 된다.’라며 길길이 날뛸 게 뻔했다.
재희는 가만히 권 실장의 표정을 더듬었다. 스치듯 짧은 시간에, 많은 혼란이 그의 표정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혼란을 향해 재희가 말을 툭 던졌다.
“제가 떨어져 나갈게요.”
그 말을 하는 순간, 제 마음이 떨어져 나가는 심적 통증이 일었다.
제가 떨어져 나갈게요. 그리 호언장담하듯 말하지 않아도, 강주와의 끝은 시작부터 정해진 당연한 결말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권 실장을 설득하는 것에라도 써먹어야지.
강주는 자유를 위해 결혼한다고 했으나, 상황으로 보건대 그의 자유는 결혼 전에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이 파기된다고 하더라도 영현은 강주에게 더 결혼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또 ‘윤재희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선전포고라도 하면 어찌할 것인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니 자유롭게 내버려 두는 쪽을 택하겠지.
강주와의 연극 같은 사랑 놀이도 차 회장의 비리를 캐고 나면 끝나게 되는 것이다. 차 회장이 나락으로 떨어진 후, 강주의 자유 역시 보장된다면 그에게 결혼은 불필요한 계약에 불과할 테니. 그저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니까.
‘서로 원하는 걸 가지면 깨끗하게 정리하는 거예요.’
서늘하게 감겼던 그의 목소리를 되새기며 재희는 울컥 치미는 감정을 눌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마음이고, 그가 원하는 몸이기에 서로의 목적이 상충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때가 되면 난 필요 없는 존재가 되겠지. 그 사실에 아파하는 건 불필요한 감정 낭비인데.
붉어지는 눈시울은 무시하며 재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길면 2년. 짧으면 저와 강주 씨의 결혼 전. 제가 강주 씨 곁에서 반드시 떨어져 나가 줄게요. 그래도 힘든 결혼이 되시겠지만, 제가 있는 것보다는 수월할 거예요.”
“재희 씨가 왜…….”
재희는 어금니를 짓깨물고 필시 거짓일 말을 진심처럼 뱉었다.
“저는 강주 씨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권 실장의 눈동자 안에 동요가 일었다. 그 찰나의 감정을 재희는 깊이 물고 늘어졌다.
“게다가 차 회장님은 권 실장님 허락 안 하실 거예요, 절대.”
“…….”
“시은 씨 사랑해서 결혼하고 싶으시면 차 회장을 이빨 빠진 호랑이로 만드세요. 그게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도대체.”
재희가 꾸며진 미소를 담대히 낯에 올렸다.
“제가 차 회장의 이빨을 뽑을 생각이거든요. 그 사람, 아주 나쁜 사람인 것 같아서 한번 어떤 나쁜 짓을 했는지 파헤쳐 보려고요. 그러니 저 도와주셔야 해요.”
“…….”
놀란 듯 홉뜬 눈이 그녀를 훑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만 폭탄처럼 던져지니 당황하여 입술만 달싹일 뿐이다.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빤히 드러내는 권 실장을 향해, 재희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시작은 그 CCTV가 되겠네요. 지금은 그거면 족해요.”
얼어붙은 권 실장이 재희를 훑었다. 굳은 얼굴로 응시하며 호흡을 고른다. 재희는 담담하고도 담대해 보였다. 출렁거리는 속내는 단단한 껍질에 숨긴 채 거래를 하듯 뻔뻔한 얼굴로 권 실장을 마주하고 있었다.
여유롭게만 보이는 재희를 향해, 권 실장이 단어 하나하나를 끊어 내듯 말했다.
“제가 이대로 차 회장님께 가서 알리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까.”
“그럼 어쩔 수 없는 거죠. 제 운이 딱 거기까지겠네요.”
“…….”
“그런데, 안 그러실 거잖아요.”
“…….”
“시은 씨랑 결혼하고 싶으시잖아요.”
장담하듯 내뱉은 말이었다.
권 실장의 입매가 움찔거렸다. 절 무시하는 차 회장을 향한 숨죽인 분노. 시은을 향한 마음. 재희가 내민 유혹. 결혼. 기회. 모든 상황이 어그러져 그의 마음을 마구잡이로 뒤흔들었다.
뒤죽박죽으로 섞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탁하게 흐린다. 흐린 안개를 걷어 내면 반짝거리며 빛나는 무언가가 있을 것처럼 유혹적으로.
권 실장이 가까스로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제 소중한 걸 위해서요.”
재희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힘주어 말했다.
내 소중한 걸 위해. 엄마를 위해.
모든 건. 단지, 그것을 위해.
…그리고.
잠시나마 강주의 곁에서 달고 행복한 꿈이라도 꾸기 위해. 그것만으로.
***
며칠 뒤. 재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재희는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다가 휴대 전화 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어깨를 까맣게 굳혔다.
-접니다, 재희 씨.
권 실장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 미약한 주저가 담겨 있었으나 그보다는 확고한 의지가 더욱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백업본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묵직한 말이 넘어왔다. 재희는 숨을 멈췄다.
그리고, 그 시각. 효정은 고심하는 표정으로 명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순한 종이인 것 같은데 특이하게 반짝거리는 명함. 작은 종이 쪼가리일 뿐인데, 기품마저 느껴지는 고아한 글자들.
010-41XX-XXXX.
효정은 차 회장의 번호를 눈으로 훑고, 또 훑었다. 고민하고 망설였다. 엄지손으로 휴대 전화 창만 만지작거리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 손길에 화면이 켜지자 흠칫 눈 아래를 일그러뜨리며 손을 움츠렸다.
초기 화면 위로 사진이 떴다. 언니와 찍은 사진. 저와 얼굴을 맞대고 활짝 웃는 재희 언니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 언니. 소중한 내 언니. 누구도 감히 상처 입힐 수 없는 내 언니.
효정은 검지로 재희의 사진을 찬찬히 더듬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적어도, 언니를 위해 지뢰 하나 만들어 놓을 필요는 있다. 차 회장, 그 뱀같이 음습한 아저씨를 상대로.
몇 번의 터치 끝에 신호음이 울렸고, 이윽고 가라앉은 차 회장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차병준입니다.
“…….”
-…누구십니까.
효정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차 회장은 상대의 정체를 물었다. 그의 휴대 전화는 웬만해서 공개되지 않았기에 더욱 의아한 듯했다.
효정은 불쑥 용기를 던졌다.
“저예요, 회장님. 윤효정.”
-…….
우뚝 선 침묵 너머로 일순 차 회장의 신음이 넘어왔다. 감탄, 혹은 탄식에 가까운 소리를 흘리다가 가까스로 답한다.
-그래, 효정이. …효정이구나.
희열과 흥분을 가까스로 누른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효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말했다.
“필요한 게 생기면 연락하라고 하셨죠? 저 필요한 거 생겼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의 반응을 기다리던 효정이 그를 다시 부르려 했을 때, 깊은 침묵을 뚫고 차 회장의 낮은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그래, 효정아. 잘 생각했다. 잘 생각했어.
효정은 음흉하게 파고드는 그의 목소리를 향해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고 작게 답했다.
***
긴장으로 손끝이 떨려 온다.
가쁜 숨을 꼴깍 삼키며 재희는 노트북에 USB를 꽂았다. 권 실장에게서 받아 온 것이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게 무언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요동쳐 씨근씨근 호흡이 힘들었다.
네모 모양의 금속. 자그마한 USB를 건네주며, 권 실장이 씁쓸히 말했었다.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은 자료입니다. 애초에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죠. CCTV 영상 같은 거야 흔한 거니까. 그런데, 이건…….’
‘안에 뭐가 있었나요?’
‘…직접 보십시오.’
그의 눈빛에는 이제 머뭇거림이 없었다. CCTV를 보고 나니 마음이 확고해진 모양이었다.
회상을 멈춘 재희가 영상을 띄웠다. 플레이되지 않은 새까만 화면이 눈앞에 화악 들이닥쳤다.
엄마의 사고는, 차 회장이 단순한 사고라 진술했기에 단순 종결된 사건이었다.
선강 그룹 회장이 그리 말하는데 그의 말을 거스르면서까지 사건을 파헤쳤을 리 만무. 사고를 당한 이는 재벌가의 귀중품을 훔치려 했던 ‘가정부 좀도둑 따위’였기에 일은 더욱 쉽게 덮였다.
심지어 경찰은 차 회장의 집에 CCTV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물론, 알고 있다고 한들 달라졌던 건 없었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진실이 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줄 열쇠일 수도. 그저 일상을 찍은 고루한 영상일 수도 있는 그 무엇이.
재희는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