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96)

 #66

 재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저 지금 로비 카페에 있어요. 천천히 와요.]

 방금 시은이 보낸 문자가 깜빡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카드 키를 찍자마자 카페를 향해 다가갔다. 창가에 앉은 시은의 뒷모습이 보였다.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바른 자세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중이었다.

 재희는 통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용히 다가섰다.

“…응, 그래서 이따가 잠깐이라도 보고 싶어서. 4층 옥외 정원? 앞 말고 뒤에 있는? 응, 알겠어요.”

 누군가와 웃으며 얘기하는 시은의 목소리가 사뭇 밝았다. 시은은 발을 까딱거리며 웃다가 마지막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기석 씨도. 응응, 알겠어요.”

 순간 재희의 고개가 갸웃 넘어갔다. 훔쳐 들으려 한 게 아닌데 얼결에 듣게 되어 괜히 속이 찔린다. 게다가…….

‘기석 씨라니?’

 권기석. 차 회장님의 수행 비서이자 경호원의 이름이 기석 아닌가.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닌데. 게다가 이곳 4층 정원에서 만난다고.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으나 이내 재희는 지웠다.

 일부러 큰 몸짓으로 옆에 앉으며 재희는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시은 씨. 강주 씨는 바빠서 못 내려온다고 하네요.”

 시은은 이 근처에 볼일을 보러 온 김에 재희를 만난 참이었다. 강주 오빠도 혹시 같이 올 수 있으면 함께 보자 했으나, 역시 불발됐다. 늘 그랬듯 바쁘다는 핑계였다.

 재희는, 강주와 함께 보자는 시은의 메시지를 보고는 새삼스럽게 놀랐었다. 모두가 드나드는 빌딩 1층에서 대놓고 보자니. 남의 이목을 신경도 쓰지 않는 성격이 새삼 강주와 닮아 있어 작게 웃고 말았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나, 하고.

“강주 오빠는 못 온대요? 늘 그렇지 뭐. 내가 만나자고 하면 매일 싫은 거지.”

 짐짓 토라진 목소리로 시은이 꿍얼거렸다. 이제 강주를 향한 서운함 같은 건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깊이 마음에 담아 둘 거리조차 아니었다.

“강주 씨가 좀 냉정한 면이 있기는 해요.”

“재희 씨한테도 그래요? 막 웃으면서 ‘안 돼.’ ‘시간 없어.’ 매일 이렇게 똑같은 소리만 하면서 벽 쳐요?”

 시은의 불만에 재희는 미소로 화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한테는 안 그래요. 시은 씨에겐 오히려 가족이라 그러는 것일지도 몰라요. 저만 해도 효정이는 편히 대하거든요. 거절도 쉽게 하고. 가깝다는 이유로 소홀한 거야 흔한 일이죠.”

 재희의 목소리가 나긋하고 다정하게 울렸다. 시은의 마음이 덩달아 후르르 녹았다.

 시은은 재희가 마음에 쏙 들었다.

 어릴 적, 그러니까 학창 시절에는 재희를 질투했던 게 사실이다. 자신은 차지할 수 없던 강주 오빠의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갔던 애였으니까. 어쩌다 마주하면 일부러 무시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흘겨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재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인사했었다. ‘안녕, 시은아.’ 하고, 한결같이. 그때부터 어렴풋이 느꼈었다. 저 아이는 나보다 큰 아이구나.

 오빠가 결혼할 상대라며 재희를 데리고 왔을 때. 몇 년 만에 재희와 재회했을 때는 이미 철없는 질투에 휩싸일 나이는 지나 있었다. 선입견을 버리자 재희의 제대로 된 모습이 보였다. 늘 부드럽고 유연하면서도 꼿꼿한 사람. 그게 퍽 마음에 들었다.

“재희 씨, 그거 알아요? 제가 오래 산 건 아닌데……. 이쯤 되면 좀 보이거든요.”

“뭐가요?”

 시은은, 빨대로 음료를 마시는 재희를 바라봤다. 올곧고 선량한 재희의 눈동자가 보였다. 이제는 눈만 보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대가 무슨 의도로 접근하는지. 제 배경과 부를 보아 날아드는 날파리는 아닌지.

“재희 씨는 아닌 것 같아요.”

“…도대체 뭐가요?”

 재희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물었다. 시은은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

 시은과 헤어진 후. 재희는 4층 모퉁이 모서리 벤치에 숨듯 앉았다. 비밀스러운 옥외 정원 문은 잘 보이면서도, 제 모습은 보이지 않을 완벽한 자리.

 많은 생각이 뒤섞이는 듯 복잡한 얼굴로 철문을 응시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문이 열렸고 누군가 밖으로 나왔다. 시은이었다. 시은은 당당하게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대로 내려갔다.

 그리고 오 분 뒤. 다른 한 사람이 나왔다. 차 회장의 신실한 수족, 권 실장이었다.

“…하아.”

 재희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시은과 권 실장. 둘의 만남은 초기에 분명 비밀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비밀이 일상이 되다 보면 어느 순간 경계가 느슨해지는 순간이 생긴다. 오늘이 바로 그들에게 그런 날이었다. 둘만의 밀회를 이방인, 윤재희에게 들키게 된 날.

 머릿속 저울이 이리저리 기울었다. 이대로 모른 척 자리를 떠나느냐, 당장 일어나 권 실장을 향해 다가서느냐. 휘청휘청 줏대 없이 흔들리던 추가 이윽고 한쪽으로 쿵 떨어졌다.

 엄마.

 엄마 비밀 찾아야지.

 재희는 씁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겨진 치마를 툭툭 털어 펴며 심호흡을 한 번 한다. 감았던 눈을 뜨자 갈피 없이 흔들리던 눈동자가 어느새 고요히 멎어 있었다.

 권기석. 시은과 밀회를 가진 사람. 엄마의 사고 장면이 찍힌 CCTV 백업본을 가지고 있을, 차 회장의 신실한 수족.

 재희의 발바닥이 바닥에 느릿하게 닿았다 떨어졌다. 곧 스무 걸음도 걷지 않아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권 실장 옆에 서서는 그를 대수롭지 않게 불렀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권 실장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상대가 재희임을 확인하고는 담담한 인사를 마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재희 씨. 이런 곳에서 뵙는군요. 쉬러 오셨나 봐요.”

“네, 뭐, 겸사겸사.”

 재희는 시선을 똑바로 들어 그를 쳐다봤다.

 평온한 척하나 내심 긴장한 것처럼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설마 무얼 본 걸까. 아니겠지. 봤다고 해도 뭘 눈치챘겠어? 그런 생각들이 기석의 눈동자 위로 빤히 지나갔다.

 재희는 우물쭈물하는 대신 본론부터 던졌다.

“권 실장님께 할 말이 있어요. 조용한 데서 얘기 좀 하죠, 우리.”

“네? 할 말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시은 씨 얘기도 있고. 뭐, 그 외 많은 말이요.”

 시은. 그 단어가 들리자마자 권 실장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완연한 초여름이다. 빌딩으로 가득한 서울 위에 녹녹한 초록빛이 흥건했다. 거리마다, 도로마다 줄지은 가로수가 푸르다. 재희는 푸른 도로를 내려다보며 담담히 물었다.

“실장님, 혹시 저희 엄마 사고 났을 때, 기억하세요?”

 감정의 동요 하나 없이 평온한 목소리였다.

 빌딩 아래에 두던 시선을 올리자, 영문을 알 수 없이 찡그려진 그의 눈매가 보였다.

“기억은 합니다만…….”

 그게 시은 씨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권 실장은 영 갈피가 잡히지 않는 얼굴로 재희를 응시했다. 재희 역시 그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기석의 눈동자 위엔 의아함만이 있을 뿐 별다른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덮고 은폐했더라면 표정은 숨길 수 있을지라도 찰나의 동요는 비쳤을 것이다.

‘권 실장님은 모르는 모양이지.’

 사고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 보였다. 혹시 차 회장의 사주로 자료를 폐기하고 덮지 않았을까 우려했으나 불필요한 기우인 듯했다.

 재희는 폭탄을 대놓고 던져 보기로 했다.

“시은 씨와의 관계를 알고 있어요.”

“…….”

 권 실장은 입을 무겁게 열었다가 뗐다. 크게 흔들린 동공이 찰나의 동요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혀끝에서만 단어만 뭉개는 얼굴이었다.

 이윽고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감정을 숨기며 무표정을 가장했다. 그러나 그의 목울대를 타고 넘는 긴장과 가늘게 움찔거리는 눈꼬리를 재희는 놓치지 않았다.

 권 실장은 우선 부정하기로 결론을 낸 모양이다.

“시은 씨와의 관계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발뺌하고 싶으셨다면 좀 더 조심하시지 그러셨어요.”

 재희가 웃으며 농을 쳤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는 건 재희도,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둘 사이에 가라앉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이나 재희를 노려보듯 응시하던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시은 씨와 전 아무 사이가 아닙니다. 덧붙여, 혹여 어떤 사이라고 한들 그게 재희 씨와 무슨 상관입니까. 죄를 짓는 것도 아닌데.”

“제겐 당연히 죄가 아니죠. 하지만 차 회장님께서도 죄가 아닐까요?”

“…….”

 그가 희미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언가 반박을 하려다가 차마 할 수 없는지 말을 멈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가 어금니를 꽉 맞물었다.

“차 회장님께 들키면 곤란해지실 텐데요. 권 실장님도, 시은 씨도.”

“…….”

“차 회장님께서 시은 씨 얼마나 아끼시는지, 권 실장님이 가장 잘 아시잖아요. 우리 같은 사람을 차 회장님이 어떤 취급 하시는지도 잘 아실 테고.”

 차시은. 차 회장이 아끼고 또 아끼는 외동딸. 그녀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차 회장의 경호 비서 권기석. 그게 자신이었다.

 천한 것들.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감히. 제까짓 게. 차 회장이 입에 달고 사는 ‘그렇고 그런 이들’을 향한 멸시는 바로 저 같은 사람을 향한 표현이었다. 그런 ‘천한 것’이 제 딸을 탐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차 회장의 분노가 얼마나 클까.

“지금 뭐 하자는 짓이야, 나 협박해서 뭐라도 얻어 내겠다는 수작이야?”

 성난 분노가 치솟았다. 밟히고 차여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없다. 차 회장에게서 받았던 상처가 숨죽이고 있다가 이런 상황에 당면하자 재희를 향해 비죽 칼날을 세웠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뭘! 난 그저, 난……! …시은 씨에게는 피해 가게 하지 마. 일 잘못되면 내가 윤재희 당신 가만히 안 둬.”

 이를 가는 목소리가 음험하게 흘러나왔다. 박박 갈리는 협박의 말도 흉흉히 뱉었다.

 재희는 가볍게 화단에 걸터앉았다. 불끈 각이 진 그의 턱을 올려다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갑자기 반말하시면 불쾌해요. 예의를 지켜 주세요. 전 권 실장님께 아직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어요.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기실 그녀는 아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제 소중한 것을 상처 입힐 수도 있는 상대를 향해, 권 실장 홀로 날카롭게 가시를 세웠을 뿐이다.

 순간 확 정신이 들었다. 차 회장을 생각하자 분노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가 뒤늦게 현실을 파악한 것이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이는 그냥 윤재희가 아니었다. 차강주. 선강 그룹 후계자의 애인.

 잠시 침묵하던 그가 이윽고 난감하다는 얼굴로 읊조렸다.

“…미안합니다, 잠시 흥분했습니다.”

“괜찮아요, 이해해요. 저 같아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재희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 선 반응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사랑하는 이를 상처 입힐 수 있는 상대에게 보이는 반응이라 생각하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할퀴는 것 같던 권 실장의 목소리도, 악의로 반질거렸던 날 선 눈빛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대신 무척이나 평온한 어조로 물어 왔다.

“도대체 제게 무얼 원해서 이런 말을 꺼내시는 겁니까.”

 재희는 그제야 애기를 나눌 마음이 생겼다는 듯 다시 일어섰다. 당당히 허리를 펴고 그의 시선을 마주한다.

 분노란 놈은 몹시 일방적이라, 퍼부을 곳이 없으면 홀로 타오르다가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권 실장이 들끓는 흥분을 보이기에 잠시 기다려 주었던 재희는, 그의 불길이 잠잠해지자 다시 제대로 된 말을 꺼내기로 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권 실장님을 협박하거나 수작을 부릴 생각은 전혀 없어요. 절 향한 시은 씨의 믿음 역시 무너트리고 싶지 않고요. 그저 권 실장님께 자그마한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을 뿐이에요.”

 재희 역시 시은을 배신하거나,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절 믿어 주는 선량한 이를 어찌 배신하겠는가.

 다만, 강주와 거래를 했듯 거래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차 회장만 나락으로 무너뜨릴 수 있을지 모를, 그런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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