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하지만 모두 심증일 뿐이다.
진지한 시은을 향해 재희가 천천히 답했다.
“남자, 여자가 따로 있나요. 어떻게 되었든 전 받아들였을 거예요. 서로 사랑하니까.”
마음속에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이 시리게 흘렀다. 사랑하니까, 라니. 이 결혼에 강주의 사랑은 단 1할도 없을 텐데.
***
도로를 달리는 세단 옆으로 가로수 이파리가 스쳤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예쁜 일요일. 효정은 강주의 차 뒷좌석에 앉아, 앞 좌석에 앉은 두 명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오빠, 진짜 나 가도 괜찮아요? 언니, 나 진짜 가도 되는 거야?”
강주는 백미러를 통해 초조한 효정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 그냥 밥 먹는 거니까. 레스토랑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오는 거라고 가볍게 생각해.”
다정한 강주의 목소리 뒤로, 재희 역시 말을 곁들였다.
“너무 무서우면 다음에 가도 되고. 오늘은 그냥 돌아갈래?”
“아냐, 언니! 어차피 만나야 하는 거면! 오늘 만나지, 뭐!”
효정은 혼잣말하듯 외치더니 좌석 시트에 등을 푹 댔다. 훅, 훅 심호흡을 하며 쥔 주먹이 하얗게 굳었다. 제아무리 호기로운 스무 살이라 하더라도 언니의 새 가족이 될 재벌가 식구들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는 태연할 수 없는 모양이다.
강주가 재희를 보며 농담처럼 말했다.
“피는 못 속이네요. 재희 씨 처음 저녁 먹으러 갈 때 딱 저 표정이었는데.”
“네? 제가요?”
저 담담했는데요? 아닌데? 제가 정말 그랬어요?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묻는 재희의 말에 강주는 애써 답하지는 않았다. 다만 유쾌한 듯 어렴풋이 미소 지었을 뿐이다.
잠시 후, 고급 주택가에 강주의 차가 다다랐다. 먼저 내린 강주가 재희의 문을 먼저 열어 준 후, 효정이 있을 뒷좌석 문도 열었다. 뒤에서 톡 튀어나온 효정이 커다란 저택을 향해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쫄지 말자. 쫄지 말자. 언니 창피해지면 안 되니까, 당당하게. 쫄지 말자.
어린 시절, 늘 보아 오던 저택인데. 오늘따라 을씨년스러운 고성같이 보였다.
“어서 와요.”
그들을 제일 먼저 맞이한 건 시은이었다. 현관 옆 까만 돌 조각상 옆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시은이, 효정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어머! 효정이야? 이렇게나 컸어요? 세상에, 나 기억해요?”
오래간만에 만난 아이가 훌쩍 성인이 되어 있으니 어지간히 신기한 모양이었다. 효정 역시 놀란 얼굴로 반기는 시은을 향해 히죽 웃었다.
“안녕하세요! 네, 기억나요. 언니는 여전히 예쁘시네요.”
입에 발린 효정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시은은 “네 말이 더 예뻐!”라며 크게 웃었다. 자기소개도 전에 친해진 둘을 따라 재희 역시 안에 들어섰다. 잠시 2층에 다녀오겠다는 강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영현은 없었다. 효정의 방문을 굳이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탐탁지 않다는 이유로 자리를 피한 것이다.
소파에 앉아 있던 차 회장이 뒤늦게 신문을 내렸다. 세 사람이 들어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가 왁자지껄한 소음에 그제야 움직이는 척을 한다.
황제처럼 당당하게 앉아 소파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그를 향해 효정이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차 회장님!”
활짝 웃는 얼굴로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차 회장은 그제야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천한 것. 눈 속에 미약한 고까움이 깔려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자한 아저씨 흉내를 내며 효정의 인사를 지켜봤다.
하지만 차 회장의 여유도 거기까지였다. 숙인 효정이 몸을 일으켜 방긋 웃자, 효정의 얼굴을 확인한 그의 표정에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무방비하게 드러난다.
미령이…….
그의 입 속에 굳은 이름이 속삭여졌다.
차 회장은 효정의 인사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잠긴 문장이 까끌하게 나오려다가 도로 비집어 들어갔다.
음험한 눈동자가 효정을 차근차근 훑는다.
재희도 미령을 닮기는 했으나 효정만큼은 아니었다. 별장에 처박아 놓고 미령의 이름을 준 여자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차 회장의 목울대가 꿀꺽 힘겹게 넘어갔다. 혼란이 범람하는 얼굴이었다.
“아빠?”
옆에서 시은이 의아하게 절 불러서야, 차 회장은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더니 갑자기 황급히 일어나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물을 원한다면 가사도우미에게 말하면 될 것을 급한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재희와 효정, 시은만이 덩그러니 거실에 남겨졌다.
눈을 끔뻑이며 차 회장의 뒷모습을 좇던 효정은 재희의 팔을 쭉 끌어당겨 아주 작게 속삭였다. 시은은 들을 수 없게끔.
“언니, 기분 탓인가? 저 아저씨 눈빛 되게 뭔가 막……. 엄청 징그러운데?”
인간도 짐승인지라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걸까. 효정은 절 향한 차 회장의 눈빛에서 묘한 탐욕을 대번 알아차렸다.
재희가 일그러진 얼굴로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차 회장. 엄마 미령의 손도 묘하게 훑고, 제 손도 묘하게 만지더니, 효정이까지 저런 눈으로 보다니. 부아까지 치밀었다.
효정에게, 차 회장을 향해 품은 제 의구심을 설명해 줄까, 하다가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머리 아프고 속 앓는 건 본인 하나로 족한 일이다. 효정이까지 힘들게 할 수야 없지.
‘그러고 보니 강주 씨는 정말 차 회장님을 하나도 안 닮았네.’
외모에서부터 성격까지, 차 회장을 닮은 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혹시 그래서 차 회장이 강주 씨를 더 학대했던 걸까.
재희는 엇비슷한 건 조금도 없는 차 회장과 강주를 떠올리며 소파에 앉았다. 문득 새까맣게 잊고 있던 현실이 떠올랐다.
‘엄마가 정말로 차 회장의 작당으로 그렇게 된 거라면.’
그렇다면 본인은 강주를 어떤 얼굴로 보아야 할까. 엄마를 해친 사내와 피가 이어진 강주 씨를 난 어떻게.
“…….”
재희는 초조하게 눈을 감았다. 머리가 아팠다. 모든 걱정과 근심을 지워 내고 싶었다. 이전에 강주도 그리 말하지 않았나.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지금은 현실에 충실하면 되는 거라고.
정말이지 그러고 싶었다. 모든 것에 눈을 감고 우선은 차 회장의 뒤를 캐며 강주와 함께 지내는 것. 그것에만 열중할 생각이었다.
식사 시간은 의외로 화기애애했다. 진득한 시선을 지워 낸 차 회장은 사람 좋은 아저씨처럼 보였고, 재희와 효정 역시 움츠러드는 타입은 아닌지라 활기차게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사과를 아삭아삭 베어 물던 효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나 화장실 좀.”
도란도란 울리는 대화를 뒤로하고 거실 뒤로 들어섰다.
“…미론가?”
하지만 이내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 집이 너무 커서 그런지 화장실이 어디 붙어 있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예의 없이 여기저기 문을 다 열어 볼 수도 없고.
구석진 곳마다 놓여 있는 우아한 장식장을 구경하며 찬찬히 발걸음을 옮기니 다행히 화장실이 나오기는 했다.
화장실을 나온 효정이 기다란 복도를 걸었다. 모퉁이에서 다시 발이 멈췄다.
“예쁘다.”
새하얀 벽 위에 고풍스러운 액자가 걸려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풍경화였는데 노랗고 푸른 이파리가 가득한 들판이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효정은 아예 뒷짐을 진 채 가만히 섰다. 미술관에 온 것처럼 그림을 구경한다.
한동안 홀린 듯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누군가 뒤로 슬쩍 다가왔다. 인기척도 느끼지 못할 만큼 슬며시 다가온 이는 효정이 절 알아채지 못하자 슬그머니 목소리를 흘렸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앗!”
효정이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 바람에 우뚝 서 있던 차 회장 어깨에 뒤통수를 콩, 박고야 만다.
차 회장이 효정의 상체를 세워 주며 팔뚝을 움켜잡았다.
“조심해야지, 넘어질라.”
“아, 네!”
효정은 치를 떨듯 어깨를 떨어 차 회장의 손길을 떨구었다. 역시 이 사람은 싫다. 언니가 결혼하면 언니의 시아버지가 될 사람인데 왜 이렇게 불쾌할까.
차 회장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 미령이… 네 엄마를 많이 닮았다는 소리 듣지 않니?”
“…들어요, 딸이니까요.”
“꼭 쌍둥이처럼 닮았구나. 미령이 다시 돌아온 것처럼.”
효정은 슬금슬금 발을 움직여 그를 피했다. 왜인지 목덜미가 싸한 것이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곧 벽의 앞에 있는 장식대에 가로막혀 몸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저 아저씨는 왜 이렇게 가까이 오고 난리야.
꿍얼거리며 효정은 아예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다가오게 내버려 두느니 차라리 정면으로 마주할 생각이었다.
머리 위에서 노란빛 조명이 내리쬔다. 음영으로 굴곡진 차 회장의 얼굴을, 효정은 대놓고 올려 보았다. 효정의 방법이 효과가 있었는지 차 회장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멈추어 섰다.
눈동자에 맴도는 범심을 감추며 차 회장이 나직이 물었다.
“힘든 일은 없고?”
“힘들 게 뭐 있겠어요, 언니가 힘들죠.”
막말로 자신은 그냥 살기만 하면 됐다. 밥 먹고, 자고, 학교 가고.
돈 벌어 챙기고, 신경 쓰는 건 오롯이 언니 몫이었다. 날개 아래 부는 훈풍처럼 커다란 세상으로 절 밀어 올려 주는 소중한 재희 언니.
“요새 젊은 애들은 필요한 게 많다고 하던데… 효정이는 괜찮니?”
과하게 친절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부드러운 음성인데도 괜히 팔뚝에 소름이 돋아 효정은 살갗을 쓱쓱 문질렀다.
“글쎄요, 저는 그다지 필요한 게 없어요. 언니가 다 사 주거든요.”
자기 건 안 사도 제 건 꼭 사 줘요, 혼잣말처럼 효정은 이어 중얼거렸다.
“이제 대학생이 됐다고 했나? 지금은 아니어도 주위 친구들과 비교할 일이 많아지면 생각이 달라질 게다. 욕심이 생기고 갖고 싶은 게 생기고.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지.”
“음,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알바 하죠, 뭐.”
천진난만한 대답과 함께 효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차 회장의 눈동자가 더욱 음험하게 반들거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아이는 성격마저 미령을 닮았다. 욕심 없고, 욕망도 없으며, 그 무엇도 탐낼 줄 모르던, 제 벼랑 위의 꽃.
한참이나 효정을 홀린 듯 바라보던 차 회장이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 새하얗게 빛나는 명함 위에는 딱 두 줄만이 적혀 있었다.
선강 그룹명. 그리고 전화번호.
쉽사리 명함을 받지 않는 효정을 향해 차 회장이 손을 더 깊이 들이밀었다. 그제야 효정이 어벙한 표정으로 명함을 받아 쥐었다.
차 회장이 낮게 속삭였다.
“분명 욕심나는 게 생길 테다. 내일이 되었든, 내년이 되었든, 갖고 싶은 게 생긴다면 연락해라.”
차 회장은 본인이 인간의 본성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추한 민낯 역시 질리도록 보았다. 순진한 영혼이 어떻게 고꾸라지는지. 순백의 소녀가 어떤 방식으로 새까맣게 물드는지.
그는 부와 권력으로 사람을 쉽게 휘두르는 자였으며, 상대의 탐욕과 욕망을 주물러 군림하는 자였다. 차 회장은, 자신이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눈앞의 소녀 역시 별반 다를 게 없으리라 확신했다.
흔들리지 않았던 미령을 알면서도, 그런 미령을 빼닮은 효정임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그리 믿고 싶었다.
효정이 손에 쥔 건 명함이 아닌 더러운 유혹이었다.
“그럼, 난 먼저 가마.”
차 회장은 언제 더러운 그림자를 드리웠냐는 듯 몸을 물려 자리를 벗어났다. 차 회장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효정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미지의 명함이 보였다.
“…하.”
탄식 같은 숨이 나왔다.
아무리 어리다 한들 알 건 다 안다. 차 회장의 음습한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 뱀처럼 절 휘감던 문장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
“…또라이 아냐? 진짜 미쳤나 봐…….”
효정에게서 헛웃음마저 샜다.
기숙사에서 노닥거리다가 들은 적 있었다. 스폰 제의. 어딘가엔 그런 게 있다더라, 하고 말이 나왔던 더러운 제의. 아무래도 지금 자신이 받은 명함이 바로 그 상징인 것 같다.
“진짜 미친놈인가?”
어이가 없어 자꾸만 혼잣말이 나왔다.
지금 자신은 언니의 동생, 즉 차 회장의 사돈아가씨로 이 자리에 와 있는 거였다. 한데 이곳에서, 이런 자리에서, 이런 짓을? 미쳤거나, 돌았거나, 눈에 뵈는 게 없거나.
그가 찬 회장이라는 완장이 그를 지켜 주는 걸까.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조금의 타격도 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평생을 그리 살아왔다면 없을 일도 아니다.
과연 누가 그를 질타했겠는가. 그의 행동이 곧 법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더럽고 혐오스러운 악법.
“나야 그냥 안 보면 되는 사이이기는 한데.”
본인이야 차 회장과 얽힐 일이 없었다. 사돈어른이기는 하나 사는 세계가 다른걸. 아마 언니와 강주 오빠가 결혼하더라도 마주할 일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언니는.
언니는 아니었다. 바로 시아버지가 될 사람 아닌가. 저런 사람이 시아버지라니. 언니에게 자칫 큰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진득하게 달라붙던 차 회장의 눈빛을 떠올리며 효정은 어깨를 떨었다.
“혹시 언니한테도 이러는 거 아니야?”
눈동자에 분노가 확 올라왔다가 꺼졌다. 명함을 구깃 쥐어 들고 거실로 다가갔다. 모퉁이를 돌자 여지없이 단란해 보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차 회장 역시 사람 좋게 웃고 있었는데, 그는 미소 짓다가도 간간이 눈동자를 돌려 재희를 곁눈질했다.
멀찍이 떨어져 제3자의 시선으로 보니 더러운 눈초리가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언니 건들면 가만 안 둬.’
차 회장이 강주 오빠의 아빠이든, 언니의 시아버지이든, 선강 그룹의 회장이든 상관없었다. 무서운 것 없는 스무 살. 효정에게는 그저 언니가 최고였다.
효정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가 이내 웃었다. 만약 재희 언니한테까지 이딴 수작 부리면 내가 용서 안 하지.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