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17장. 진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거실 소파에 앉아 차 회장 가족과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누던 재희가 몸을 일으켰다.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하는 강주를 따라 일어난 것이었다.
영현은 무심한 얼굴로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고 차 회장은 인자한 미소를 올렸다.
“둘 다 조심히 들어가고.”
“네, 회장님.”
강주의 집, 그러니까 이곳을 방문한 지도 벌써 한 달이나 흘렀다. 일주일에 많으면 세 번, 적으면 한 번씩 드나들며 열심히 눈도장을 찍었다. 겉으로는 친밀함을 쌓기 위한, 속으로는 차 회장의 약점을 발견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당연하게도, 일은 쉽지 않았다. 차 회장이라는 성이 워낙에 견고하거니와 어디부터 어떻게 파내 가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까이 지내다 보면 실마리라도 보이겠지.
먹던 귤을 한입에 털어 넣은 시은이 그들을 따라 일어났다.
“그럼 오빠랑 재희 씨 나가는 김에 나도 나가야겠다. 엄마, 아빠, 저 나가요.”
“여덟 신데 어디 가려고. 다 큰 여자애가, 위험하게.”
차 회장의 타박에 시은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살 게 있어서요, 금방 다녀올게요. 그런데 아빠, 오늘 제가 권 실장님 빌려 가도 돼요?”
“권 실장은 왜.”
“차도 태워 달라고 하고, 나도 지켜 달라고 하려고요. 겸사겸사.”
때마침 권 실장이 저택을 방문한 참이었다. 차 회장에게 건넬 서류를 들고, 그들의 화목한 시간을 방해할 수 없어 다가올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차 회장이 뒤로 힐끗 시선을 뒀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권 실장을 대수롭지 않게 힐끗거렸다가 흘리듯 말한다.
“다른 거로 가져가. 저건 내일 일찍 와야 하니까.”
“…….”
순간 시은과 재희의 얼굴에 싸한 침묵이 번졌다. 다른 거. 제 고용인을 물건 다루듯 말하는 발언에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시은은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다가 곁눈질로 권 실장의 표정을 살폈다.
재희의 가슴속에 찬물이 흘렀다. 머리꼭지까지 쭈뼛하다. 차 회장에게는 자신이나 권 실장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으리라. 아마 다른 곳에서는 재희 자신을 향해 ‘그거’라고 말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럴 때마다 상기됐다. 강주의 집안과 자신은 결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노라고.
어색한 침묵을 뚫고 영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들었다.
“시은아, 나갈 거면 지금 빨리 나가. 늦지 않게 오고.”
그리고 권 실장을 향해 웃으며 이어 말했다.
“권 실장은 얼른 와서 서류 줘요. 우리 시은이 잘 부탁해요. 운전 조심하고.”
그제야 다시 공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은은 살짝 굳어진 얼굴로 권 실장을 향해 걸어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마무리였다.
“차 세워 봐요.”
뒷자리에 앉은 시은이 권 실장을 향해 말했다. 권 실장은 별다른 말 없이 차를 세웠다. 탁. 뒷자리에서 내린 시은이 권 실장 옆 조수석에 앉아 핸들에 올라온 그의 손에 제 손을 겹쳐 올렸다.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한다.
“자, 다시, 출발.”
차는 다시 도로를 미끄러져 달렸다. 가로등 불빛이 스몄다 사라지는 권 실장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시은이 조심스레 아까 일을 입에 담았다.
“저기… 기석 씨, 아까는 기분 나빴죠? 미안해요. 아빠가 좀 그렇잖아.”
“아니요, 괜찮아요. 혹시 신경 쓰고 있었어요?”
“응, 당연히 신경 쓰죠. 혹시 마음 상했을까 봐.”
“전 지금 시은 씨랑 같이 있어 좋기만 한데요. 다 잊었어요. 그러니 시은 씨도 담아 두지 마세요.”
그가 쉽게 미소를 올렸다. 실상 차 회장과 함께 있는 시간은 딸인 시은보다 자신이 더 길었다. 차 회장의 무례한 언사쯤이야 일상이 된 지 오래다. 물론 이따금 모멸감이 치밀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시은은 시선을 앞으로 두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데이트라도 하고 싶어 그를 불러냈는데 그 과정에서 괜히 상처를 준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
시간은 차근차근 잘도 흘렀다. 영현과의 관계는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그녀는 탐탁지 않은 재희에게 무례한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다정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늘 한결같이 쌀쌀맞았다.
물론 재희는 방긋방긋 웃으며 괘념치 않았다. 거래처 사모님을 대한다고 생각하니 도리어 마음이 편했다.
도리어 달라진 건 시은과의 관계였다.
학창 시절 이곳에 함께 살 때보다 오히려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됐다. 동갑인 덕에 대화가 잘 통해 지금은 단둘이 사사로운 대화 시간을 가지는 경우도 빈번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재희는 시은과 함께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휴대 전화를 들었다. 휴대 전화가 아까부터 지잉지잉 진동하고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언니, 언니, 하고 효정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응, 효정아. 왜?”
-언니, 어디야?
“강주 씨네 집.”
-나 내일 서울에서 미정이 만나기로 했거든. 그래서 오늘 저녁에 올라갈 건데, 강주 오빠네 집에서 자도 돼?
재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쉽게 답했다.
“응, 되지. 몇 시에 도착하는데?”
-고속터미널 8시 도착.
“알겠어, 이따가 데리러 갈게.”
-응, 언니. 이따 도착하면 전화할게!
활기찬 효정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재희는 전화를 끊었다. 테이블에 올라온 재희의 휴대 전화를 빼꼼히 살피며 시은이 물었다.
“효정이예요?”
“네, 이따가 올라온대요.”
“여기 살 때 아주 작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초등학생이었나? 근데 이제는 많이 컸겠다, 그죠?”
“이번에 대학교 갔어요.”
“네?”
시은의 눈이 대번 커졌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아주 작기만 한 아이인데, 벌써 대학생이 됐다니 새삼스러운 모양이다.
대학을 갔어요? 벌써? 세상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시은이 짝, 손뼉을 치고는 재희에게 말했다.
“그럼 일요일에 점심 먹기로 한 거, 효정이도 데리고 올래요?”
“효정이를요?”
재희는 머뭇 망설였다. 물론 결혼하기로 한 이상 효정을 소개하는 건 맞는 일이나……. 여전히 강주의 모친인 영현은 절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데 동생마저 들이밀면 더 밉보이지는 않을지 걱정이 컸다.
효정이야 꿋꿋하니 기죽지 않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언니 일로 효정이가 상처받는 건 죽기보다 싫은데.
재희의 주저를 알아챘는지 시은이 가볍게 권유했다.
“나중에 정식으로 만나면 오히려 효정이가 분위기에 당황할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엄마한테 말해 놓을 테니까 잘 생각해 봐요.”
“네, 고마워요.”
어렵게 고개를 끄덕이는 재희의 말에 시은은 활짝 웃으며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테라스 위로 평온한 바람이 불었다. 둘은 말없이 커피를 마시다가 고개 돌려 말을 건네는 시은의 행동에 다시 시선을 맞췄다.
“재희 씨, 그거 알아요? 저 재희 씨 부러워요.”
“저요? 저를? 도대체 왜요?”
재희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반문했다. 앞을 보고 옆을 보고 뒤를 보아도 시은이 절 부러워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배경이든 재력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시은은 늘 자신을 앞서가는 사람이다.
“오빠랑 친하잖아요.”
하지만 이어 던져진 말에는 웃음을 멈추고 가만히 시은을 응시했다.
시은과 강주 사이에 드리운 벽을 본인 역시 어렴풋이 느끼는 바였다. 그건 강주와 저 사이에 있는 벽과는 사뭇 다른 종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재희는 오히려 시은이 부러웠다. 오빠랑 친하잖아요, 라니. 본인은 계약이 끝나면 그대로 남이 될 사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은은 어쨌든 강주와 피를 나누었으니 관계의 끝이 없을 터였다.
“둘의 결혼을 위해 내가 소매 걷어붙이고 엄마를 설득할 생각까지는 솔직히 없어요. 하지만 전 재희 씨가 마음에 드니까 응원할게요. 힘내요.”
시은이 솔직하게 말했다. 재희가 마주하는 시은은 늘 도도하고 자신만만했으며 시원시원했다. 그리고 그 점이 재희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구김 하나 없이 제 속을 뒤집어 보여 주는 면이 의뭉스러운 사람들보다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그런데 말이에요, 재희 씨.”
시은은 재희를 부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눈을 들어 재희를 똑바로 바라봤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오빠와 재희 씨는 자라 온 환경이 다르잖아요. 어떻게 결혼할 용기가 났어요?”
“음……. 용기라. 그렇게까지는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재희는 모호하게 답하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결혼할 용기. 기실 그건 용기라기보다는 만용이라 함이 옳았다.
“혹시 겁나지는 않았어요? 재희 씨가 오빠 돈 좇아서 날아들어 온 속물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어 묻는 말이에요. 아, 혹시 무례하게 들렸다면 미안해요.”
“아니, 괜찮아요.”
재희는 싱겁게 웃고는 아주 간단히 답했다.
“강주 씨니까요, 강주 씨라 용기가 났어요.”
거짓말. 재희는 속으로 스스로를 욕했다.
시은 그녀의 말은 틀렸다.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본인은 누구보다도 비열한 기회주의자였다. 강주를 이용하고자 했으며, 기어코 목적을 위해 가짜 결혼을 하겠다며 모두를 기만하고 있기도 했다.
문득 죄책감이 들었다.
“오빠가 결혼하자고 했을 때, 흔쾌히 그럴 생각이 들었어요?”
“…네.”
하지만 이 대답만은 진실이었다. 그의 제의에 오래 고민하지도 않았다. 강주가 손을 뻗자마자 급히 부여잡고 꽉 매달렸다. 차 회장을 파헤친다는 명분이 있었으나, 그와 함께하고픈 마음은 오롯한 진심이었다. 곁에 있고 싶어서. 그 손을 거부하면 영영 잡을 수 없을까 그게 두려워.
“재희 씨는 사랑만 있으면 모든 걸 이겨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음……. 글쎄요. 그렇지 않을까요?”
“남자는요? 남자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재희 씨가 남자라면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결혼하고 싶었을까요?”
재희의 고개가 슬그머니 기울었다. 내가 남자라면 어떤 생각이 들겠냐니?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 시은의 얼굴을 훑었지만 딱히 보이는 건 없었다. 어렴풋이 어떤 생각만이 들었을 뿐이다.
혹시 시은의 곁에 재희 본인과 같은 사람이 있기라도 한 걸까. 오를 수 없는 상대를 갈망하는, 그런 남자를 옆에 두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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