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재희는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피임약을 입 안에 넣었다. 물을 마시자 목 뒤로 자그마한 알약이 밀려 내려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재희는 유리잔을 내려놓고 거실을 응시했다. 주방에서 멀리 떨어진 거실 끄트머리. 너르게 펼쳐진 유리창 아래 한 여자가 잠들어 있었다.
“…우리 효정이 잘 자네.”
치받히는 쾌감을 숨죽여 눌렀던 어젯밤. 참으려 했는데도 자꾸만 신음이 터져 나와 결국 그의 목덜미에 매달린 채 흐느껴 울고 말았다. 효정이가 들으면 안 되는데, 효정이가 알면 안 되는데. 그런 걱정이 치밀었지만, 그가 주는 쾌락에 빠져 정처 없이 흔들렸을 뿐이다.
늘 그랬다. 그에게 깔려 있으면 거센 물살에 휩쓸리는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어젯밤에 설마 들리지는 않았겠지.”
멍한 머리를 가로저으며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강주는 주말 선약이 있다며 이미 집을 빠져나간 뒤였다. 분명 그가 더 격하고 격렬하게 움직였던 밤인데. 그러니까 힘들어도 그가 더 힘들어야 맞는 일이지.
하지만 늘 근육통에 시달리는 건 애꿎은 제 몸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밤새 한 일이라고는 그의 위에서 힘겹게 움직인 게 다인데 온종일 자전거라도 탄 듯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더 자요. 다녀올게요.’
햇살이 비치는 아침. 이마에 입을 맞추며 나서는 그를 흐릿한 시선으로 올려 보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재생된다. 제대로 대답조차 못 하는 자신과 달리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깔끔하고 단정하기만 했었다.
정말 대단한 체력이었다. 회사 일에, 재벌가 집안일에, 밤일까지. 완벽한 사내가 있다면 차강주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을까. 그런 사람을 상대하니 몸만 이렇게 축나지.
아무래도 한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며 재희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대로 그를 계속 받아 내다 보면 언젠간 호되게 앓아누울 게 뻔한 일이다.
재희는 피임약 케이스를 주머니에 넣고는 주방을 나섰다. 효정이를 깨워 아침을 먹일 생각이었다.
***
결혼 이야기가 오갔으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시간이 계속됐다.
강주는 조급하게 굴지 않았다. 성급한 고집을 보이면 제 어머니 영현은 더욱 철갑을 둘러 반대할 게 뻔했다. 어떤 것들은 거센 눈보라가 몰아칠 때면 그저 땅 아래로 숨어 버린다. 끄집어낼 수도 없이 깊숙이.
아마 영현도 그러할 터.
여느 때와 같은 저녁.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던 강주가 불현듯 말했다.
“다음 주부터 본가에 자주 들르도록 하죠.”
“슬슬 상견례라도 있는 건가요?”
“상견례는 아직 일러요.”
재희는 안도했다. 상견례. 결혼을 위해 거쳐야 할 당연한 관문이었으나 상상만으로도 사뭇 초조해진다. 재벌가 회장님, 사모님을 앞에 둔 상견례라니. 심지어 본인은 부모님도 대동할 수 없지 않은가.
“자주 들러서 무얼 하나요?”
“그저 눈도장부터 찍죠. 함께 저녁도 먹고, 주말에도 찾아뵙고. 최대한 자주.”
“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쫓아내시진 않겠죠?”
차 회장이야 절 끌어들이려 하지만, 그의 모친인 영현은 상황이 좀 달랐다.
강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경우 없는 분은 아니에요.”
“음, 그러면 혹시 아예 들어가 살 수는 없나요?”
본가에서 살면 더욱 빈틈을 잘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곳을 감질나게 드나들며 방문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하지만 강주는 그녀의 제안을 부드럽게 만류했다.
“차 회장 근처에 재희 씨 오래 두고 싶지 않아요. 제가 늘 재희 씨 곁에 있어 줄 수는 없을 테니까.”
“네, 알겠어요.”
재희는 쉽게 수긍했다.
본인 역시 차 회장과 개인적으로 얽히는 건 싫었다. 그를 파헤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 외에는 함께하고 싶지 않다. 본능적인 회피가 들었다.
강주가 다시 서류를 향해 시선을 내리며 아무렇지 않게 쐐기를 박았다.
“마음의 준비 해요. 이르면 다음 주부터 쳐들어갈 거니까.”
***
“네가 웬일이니? 이렇게 엄마를 먼저 찾아오고?”
영현이 짐짓 장난스럽게 강주를 타박했다. 강주는 영현이 운영하는 미술관 사무실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 보고 있었다. 평화로운 햇살 아래 비둘기 두 마리가 조각상 사이를 날아올랐다.
강주는 이내 등 돌려 영현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본론부터 내밀었다.
“어머니께서 예전에 그러셨죠. 이제 슬슬 본가로 들어오라고.”
“그랬었지.”
강주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영현은 눈가를 가느다랗게 좁혔다. 물론 강주가 들어온다면야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다만 시기가 적절치 않다. 결혼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 않은가. 영현은 눈치로 알아차렸다. 이건 필시 강주가 말해 온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결론적으로, 영현의 촉은 반쯤 들어맞았다.
“재희 씨와 본가로 들어가면 어떨까 생각해요.”
“뭐!”
영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주가 돌아오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이런 방식은 결코 아니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상대를 무슨 목적으로 집까지 데리고 온다는 말인가. 억지로 들어앉혀서 동거 소문이라도 돌게 한 후 결혼에 쐐기를 박을 작정인 게지. 뻔했다.
영현이 열 오른 뺨을 슥슥 문지르며 소파에 앉았다.
“절대 안 돼! 강주 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어머니도 늘 제가 들어가기를 원하셨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너 하나 오는 거랑은 다르지!”
붉으락푸르락한 영현의 반응에도 강주는 동요 하나 없었다.
“재희 씨 좋은 사람이에요. 같이 살면 정도 들고 마음에도 드실 겁니다.”
“말이 되는 소릴 해! 결혼도 전인데 남사스럽게 무슨 동거부터 하겠다고!”
그녀의 반응은 강경했다. 강주가 말하는 합가 비슷한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완연한 눈이었다.
강주는 짐짓 고민스러운 척 고개를 내저었다.
“재희 씨 얘기만 꺼내도 차단하시니까 별수 없잖아요.”
“…….”
가라앉은 목소리에 영현 역시 표정을 달리했다. 집으로 스스로 들어오겠다는 아들에게 반기를 드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늘 두 팔 벌려 환영하고픈 내 새끼에게.
강주가 이어 나직하게 그녀를 설득했다.
“함께 살기 싫으시다면 저녁 시간이라도 내 주세요. 식사라도 같이 하고 싶습니다.”
그쯤 되자 영현의 낯 위에 깊은 고민이 스쳤다. 재희라는 아이를 이끌고 쳐들어오겠다는 건 그렇지만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강주가 저렇게 원하는데.
강주는 영현의 고심을 기다려 주지 않고 힘주어 쐐기를 박았다.
“제가 선택한 사람이니 그 정도는 허락해 주세요. 노력할 기회 정도는 주셔야죠.”
“…….”
영현에게서 가느다란 한숨이 샜다.
기실 아까부터 마음이 불편했다. 늘 동떨어져 있어 신경이 쓰였던 아들인데. 함께 살겠다는 제의를 받아들이지는 못할망정 싹둑 자르기만 하는 스스로가 탐탁지 않았다.
게다가 무언가를 부탁하는 일이 흔치 않은 강주 아닌가. 한국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며 미국에서 부탁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마음이 쓰였다. 강주가 저렇게 바란다는데. 남에게 머리를 숙이거나 부탁하는 걸 그렇게 싫어하는 강주가.
‘저녁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냥 밥만 먹는 건데.’
그래, 눈 한번 딱 감자. 영현은 사파이어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대신 매일은 나도, 걔도 불편할 테니까……. 나흘에 한 번쯤은 괜찮겠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대신 오늘처럼 엄마 미술관도 좀 찾아오고.”
“네, 자주 올게요.”
“말만 그러지, 말만.”
영현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강주를 타박했다. 강주는 그저 미소를 되돌렸다.
***
두꺼운 차고 문틈으로 강주의 차가 부드럽게 진입했다.
재희는 크게 심호흡했다. 어릴 땐 잠시 살기도 했던 저택이 오늘따라 태산처럼 거대하게 느껴진다.
지금 그녀는 차 회장의 저택에 ‘차강주의 연인’이라는 신분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일전에 강주와 빈 저택을 방문했을 땐 이토록 긴장되지 않았는데. 계약 결혼이라 한들 며느리가 되고 싶다며 처음 발을 내딛는 건 사뭇 긴장되는 일이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운 강주가 재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긴장했어요?”
“아뇨, 안 했어요. 괜찮아요, 정말.”
재희는 짐짓 부정하면서도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강주의 낯 위로 설핏 미소가 스쳤다. 차갑게 식은 그녀의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겉으로는 강단 있는 얼굴을 해도 속은 무르고 부드럽기 짝이 없다.
강주는 차에서 내리지도, 재희에게 내리라고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손을 잠시 잡고만 있을 뿐이었다.
두근- 두근- 빠르게 뛰던 재희의 심장 박동이 점차 느릿해졌다. 한기가 돌았던 손끝에도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단지 손을 잡아 주는 행동 하나로 불안함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든든한 아군이라도 생긴 기분이었다. 실상은, 자유를 갈망하여 계약 결혼을 제의한 예비 남편에 불과했지만.
미소가 이렇게 근사하고 온기가 이렇게 따뜻한데 가짜 관계면 어때. 지금은 내 사람이야.
“이제 따뜻해졌네요.”
강주가 꽉 잡았던 재희의 손을 놓아주며 그녀의 안전띠 해제 버튼을 눌러 주었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 재희를 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제 재희 씨 원하는 거 다 해요. 차 회장의 사생활이 되었든, 비리가 되었든, 뭐든 걸리면 끌어 올리고.”
“지금 제게 키 쥐여 주시는 거예요? 차 회장 배 무너뜨리라고?”
웃으며 묻자 그 역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답했다.
“맞아요. 난 차 회장 가라앉는 거 보며 파티나 하면 되니까.”
재희는 어쩐지 마음이 욱신거렸다. 차 회장의 몰락. 그 뒤엔 무엇이 있을까. 그 파티장에서, 상무님과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함께 있을까. 아니면.
“원하는 걸 다 이루고 나면……. 이 계약의 끝엔 뭐가 있을까요?”
자신이 원하는 걸 갖고, 강주가 원하는 걸 가지게 된 다음엔 무어가 있을지.
속에서 무언가 치미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아쉬움과 허탈함이라고만 하기엔 부족했다. 차 회장의 저택에 막상 발을 들이려고 하니 불안함마저 치밀어 괜한 소리를 지껄인다고, 재희는 스스로 자조했다.
강주의 잠잠한 시선이 재희의 혼란을 훑었다. 처연히 내려간 그녀의 속눈썹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기울여 가까이 다가간다.
두 입술이 가만히 맞닿았다. 땅 아래 눈이 녹듯 천천히.
“아…….”
깜짝 놀란 재희가 입을 벌리자 혀가 기다렸다는 듯 들어왔다. 부드럽게 섞여 나직하게 엉겼다. 그녀의 근심과 걱정이 부드러운 입맞춤에 살살 녹아내렸다.
그는 모든 걸 잊으라는 듯 느릿하게 안을 헤집고 진득하게 훑다가 빠르게 떨어졌다.
멍하니 풀린 재희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강주가 웃었다.
“재희 씨는 아무런 걱정 하지 말아요. 서로 원하는 걸 얻은 후에 깨끗하게 정리하면 되는 거니까.”
원하는 것. 그가 말한 문장을 재희는 입 속으로 조용히 뇌까렸다.
“…그건 차 회장의 몰락과 강주 씨의 자유를 말하는 건가요?”
강주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아랫배를 더듬었다. 느릿하게 쓸어내리고 느릿하게 문지른다. 스치는 곳마다 뭉근한 열기가 돌았다. 읏, 하고 배를 움츠리자 귓가에 그의 조용한 목소리가 감겼다.
“글쎄요, 그런데 내가 원하는 걸 재희 씨가 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진정 원하는 게 뭘지 재희 씨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텐데.”
자유 말고 그가 원하는 게 또 무어가 있는 걸까.
“강주 씨가 원한다면 제가 최선을 다해서 우리 마지막이 잘 마무리될 수 있게-”
“아니요, 재희 씨는 미리 걱정하지 말아요. 계약 같은 것도 머리에서 지워요. 지금은 현실에 충실하면 되는 거예요.”
그녀의 말을 싹둑 자르며, 마치 아이를 어르듯 그가 속삭였다.
다정한 눈동자 안에 피어오르는 위험한 열기를 재희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하고, 마치 그의 순종적인 신도라도 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