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96)

 #60

“며칠 전에 집에 말씀드렸어요. 재희 씨와 결혼하겠다고.”

 역시. 재희는 새삼 놀라며 입술을 느리게 물었다가 뗐다. 입이 말랐다.

“…많이 놀라셨겠어요. 차 회장님이나 유 관장님이나.”

“뭐, 그렇죠.”

 강주는 마치 남 일 말하듯 답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질문을 건넸다.

“밥은 맛있었어요?”

“네, 맛있었어요.”

“다행이네요.”

 가볍게 웃는 그는, 자신이 선강가에 떨어뜨린 핵폭탄 급 발언 같은 건 전혀 유념치 않는 얼굴이었다.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무심하다고 해야 할지. 그의 마이 웨이가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강주가 재희의 빈 잔에 수정과를 따라 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할게요. 내 어머니는 쉽게 허락하시지 않을 거예요. 오늘 아침에만 해도 정유선 씨를 한 번만 더 만나 보라는 얘기를 하셨으니까.”

“아.”

 살짝 굳은 재희의 반응에도 강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 재희 씨와 결혼할 생각이에요. 그래서 보란 듯 재희 씨 손잡고 나온 거니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평소처럼 지내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어려운 주제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재희는 농담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상황이 몸을 가득 불린 물살처럼 급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흐름에 휩쓸려 가는 것조차 벅찰 정도로 정신없이.

 강주의 급습 같던 결혼 제의. 그 뒤로 당황스러운 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재희는 침착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미 벌어진 일 아닌가. 멈추려 해도 이미 늦었다. 서로가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진행하는 일이니 제 몫은 다할 생각이었다.

 가정부의 딸이 재벌가 후계자를 탐내는 일. 감히 그 일을 해 보려 한다.

 재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분위기가 사뭇 어색했다. 은근하게 쏟아지는 시선이 버겁다. 평생 없는 듯 있는 듯 조용하게만 살아온 사람이라 시선이 더욱 뾰족하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시끌벅적했던 사무실이 일순 고요해졌다. 마치 짠 것처럼,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고, 움직이던 입술을 다물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재희를 눈으로 좇았다.

 재희는 쏟아지는 관심의 바다를 갈라 마케팅 팀 자리로 들어섰다. 모두 신경 쓰지 않는 척 할 일을 하고 있었으나 실상 하는 건 종이 위에 동그라미 그리기, 컴퓨터 화면 위에 마우스로 푸른색 네모 만들기.

 재희는 자리에 들어서자마자 작게 외쳤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2시. 자그마치 두 시였다. 강주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꽤 흐른 탓이다. 상무인 그야 점심 식사를 두 시에 끝내든, 세 시에 끝내든, 끝내 사무실에 들어오지 않든 상관없었지만 주임인 자신은 아니었다.

“이거 드세요, 대리님은 카페라떼.”

 재희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팀원들에게 커피를 돌렸다. 미안함의 표시로 주는 자그마한 성의였다. 말하자면 뇌물 같은 것.

“괜찮아, 늦을 수도 있지.”

“늦긴, 뭐……. 두 시밖에 안 됐는데.”

 다들 삐걱삐걱 어색하게 손을 내밀어 잔을 받았다.

 팀원 모두에게 커피를 건넨 재희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마지막 남은 컵을 들고 박 차장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좌천당한 정 팀장을 대신하여 온 임시 팀장이었다.

“늦어져 죄송합니다, 차장님.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아니야, 뭐, 사람이 대화하다 보면 좀 말이 길어질 수도 있고……. 그런 거지.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허허, 어색하게 웃은 박 차장이 재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다 이내 손가락에 불이라도 붙은 듯 화들짝 다시 뗐다. 일순 눈앞의 윤 주임이 상무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였다. 내가 막 윤 주임의 어깨를 두드려도 되는 건가?

 툭. 순간 재희가 손에 쥔 커피 트레이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신용카드. 계산 후 급한 마음에 트레이 사이로 대충 끼워 넣었던 것이었다.

 박 차장은 새카만 신용카드를 아무 생각 없이 집었다.

“재희 씨, 이거 떨어뜨렸어. 차강…ㅈ……. 어휴… 이거… 상무님 카드네……. 그러네…….”

 아무 생각 없이 영문 이름을 읽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느새 그는 마치 상전을 대하듯 카드를 두 손으로 예의 다해 쥐고 있었다.

 차강주 상무님의 카드. 어깨 너머로 대화를 듣던 마케팅 팀원들의 어깨가 후르륵 떨렸다.

 상무님 카드를 재희 씨가 갖고 있대! 당연하지, 아까 같이 손잡고 나가는 거 못 봤냐! 서로 눈으로만 아우성 같은 대화를 나눴다. 그제야 현실감이 확 들이닥치는 표정이었다.

 우리 마케팅 팀 윤 주임이! 눈앞의 윤 주임이!

 재희는 난감한 얼굴로 카드를 받았다. 주머니에 대충 욱여넣는 게 카드인지 제 당황인지 알 수가 없다.

“주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이런 거로 고마워해. 별거 아니야. 진짜야. 신경 쓰지 마. 진짜 쓰지 마.”

 박 차장은 두 손을 휘휘 저으며 바쁠 테니 어서 자리로 돌아가라 손짓했다. 재희는 자리를 향해 걸으며 지금의 상황을 참담히 받아들였다. 등 뒤로 팀원들이 시선이 말없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푹푹 등이 파이는 것 같았다.

 이것 역시 차강주 때문이었다. 늦게 들어가는 건 제 책임이니 제 돈을 쓰라던 강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받아들였던 게 화근이었다. 오히려 상황이 더 유난이 되지 않았나.

 호랑이를 등에 업고 기세등등한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초식 동물의 세계에서 평화롭게 풀이나 뜯고 놀다가, 강주라는 맹수에게 목덜미를 물려 짐승의 세계로 질질 끌려 들어온 느낌.

 책상 앞에 앉자 임 대리가 고개를 어색하게 빼꼼 내밀었다.

“잘 먹을게…요? 윤 주임, 님?”

 어조는 딱딱했고 내용은 이상했다. 말꼬리가 딱 떨어지지 않고 요, 하나가 더 붙었다. 재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스스로 갈피가 잡히지 않는 것 같았다.

 재희의 목소리가 자그맣게 터졌다.

“아, 임 대리니임-!”

 차강주 상무와 윤재희 주임. 둘의 소문이 메신저를 들쑤신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재희의 사무실이 있는 8층뿐만이 아니라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사무실은 평소보다 조용했지만 타닥타닥 울리는 키보드 소리는 여느 때보다 극성이었다.

“들었어? 상무님 얘기. 마케팅 팀 사원이랑 만난대. 아예 선전포고하듯이 손까지 잡고 나갔다던데?”

“진짜야? 상무님이 그랬다고? 그 상무님이? 말도 안 되잖아. 그분 성격에 손을 잡고 대놓고 같이 갔다고?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완전 푹 빠졌나 보지. 들어 보니까 여자가 엄청 예쁘다던데. 딱 보기엔 잘 어울린대.”

 재희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리고 있는 사무실 사람 중 절반은, 아니, 거의 8할은 제 얘기를 하고 있으리라고.

 이건 자의식 과잉 따위가 아니었다. 본인만 해도, 상무님께서 사내 직원과 손을 잡고 밥을 먹으러 갔다는 소문이 들리면, 어머 어머 하며 메신저로 엄청 호들갑 떨었을 테니까.

 다만 문제는, 그 소문의 대상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고 평소처럼 지내요.’

 강주의 말을 입 속으로 되새겼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범으로 태어난 강주와 달리 자신은 토끼 새끼로 태어난 사람이다. 승냥이가 물어뜯는다면 범은 그저 툭 떨어내고 말 테지만, 토끼는 끽 숨통이 끊어질 터다.

 애초에 강주의 결혼 제의를 승낙했을 때부터,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비집어 넣는 일이었다.

“하아…….”

 재희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재희가 홀로 내쉰 한숨에, 괜히 놀란 마케팅 팀원들이 어깨를 들썩 움직였다. 박 차장은 모니터 옆으로 고개까지 내밀어 재희의 옆모습을 살펴보기까지 했다.

“…….”

 이건 뭐 한숨조차 마음대로 쉬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재희는 모니터에 시선을 처박고는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무님께 이제 사내에서는 티 좀 내지 말아 달라고 해야겠어.

 16장. 갈망

 태양이 빌딩 아래로 떨어지는 시간. 재희는 효정과 수다를 떨다가 기지개를 쭉 켰다.

 오늘 아침, 효정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주말 낀 공휴일이었기에 언니가 보고 싶다며 올라온 것이다.

‘언니! 나 어디로 가면 돼? 이사 간 집 주소 뭐야?’

 해맑게 묻는 효정의 질문에 재희는 그길로 효정을 불렀다. 어차피 말해야 할 것, 오늘 사정을 풀어놓을 생각이었다. 섹스 파트너가 됐다거나 정략결혼을 하게 됐다는 어른의 사정은 적당히 감추고 상황을 되도록 예쁘게 포장하여.

 따뜻한 차를 마시며 효정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차강주 상무님과 만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같이 살게도 됐다. 그러다 이제는 결혼 이야기도 오가고 있다. 물론 상대 집안이 집안인지라 결혼까지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그런 말.

“…효정아, 그래서 언니는, 상무, 아니 강주 씨랑 진지하게 결혼을…….”

 결혼하려 한다고 말을 마무리 지으려는데, 순간 휴대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받아도 돼, 언니.”

 재희는 고개를 끄덕이곤 전화를 들었다.

“네, 상무님.”

 -틀렸어요.

 다짜고짜 난데없는 부정이 들려왔다.

“네?”

 -호칭이 계속 그런 식이면 곤란해요.

 전화 너머로 부드러운 타박이 넘어왔다.

 아아, 하고 말의 의미를 뒤늦게 파악한 재희가 고개 돌려 작게 답했다.

“아, 네, 강주 씨. 죄송해요. 익숙하지 않아서.”

 강주는 맞은편에서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심장을 제법 간질간질하게 만드는지라 재희는 저도 모르게 광대를 들썩였다가 애써 내렸다.

“무슨 일이세요?”

 -아까 효정이 데리고 온다는 문자 보냈던데. 지금 확인했어요.

“아… 그건 예전에 강주 씨가 언제든 데리고 와도 상관없다고 하셔서…….”

 효정이를 언제든 데리고 와도 상관없다고 했던 건, 역시 그냥 했던 말인 걸까. 지금이라도 효정이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하나. 또 주제넘은 짓을 한 건 아닌가 싶어 재희가 난감한 목소리로 변명처럼 속삭였다.

 웃음기 어린 강주의 목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넘어왔다.

 -저녁으로 뭐 사 갈지 물어보려 전화한 거예요. 효정이에게 뭐 먹고 싶은지 물어봐요. 지금 사 갈게요.

“…….”

 순간 재희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물결쳤다. 그게 무언지 모르겠다. 바짝 긴장해 있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것. 단지 계약 관계로 이루어진 사이일 뿐인데, 진짜처럼 배려해 주는 강주의 태도에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그래선 안 되는데. 이렇게 허물어지면 안 되는데.

 재희는 풀어졌던 얼굴에 다시 힘을 주며 효정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효정아, 먹고 싶은 거 있어? 저녁으로.”

“나 치킨. 양념 반 프라이드 반.”

“…….”

 치킨이라. 강주와는 근처 한정식집이나 차이니즈 레스토랑에서 정갈한 음식을 배달시켜 먹기만 했지 그런 유는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치킨을 사 와 달라 부탁해도 되는 걸까.

 재희는 머뭇거리며 다시 휴대 전화를 귀에 댔다. 하지만 조심스레 치킨이라고 말을 꺼내기 전, 강주가 먼저 치고 들어왔다. 효정의 목소리라도 넘어간 모양이다.

 -치킨하고 재희 씨 먹을 저녁밥 사 갈게요. 재희 씨는 한식 좋아하니까.

“아, 네…….”

 꼭 진짜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멍하니 대꾸하는 사이, 누군가 도착했는지 강주는 이만 끊어야겠다고 인사를 전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강주 오빠야?”

“…어.”

 강주와의 만남. 결혼. 반쯤의 진실을 갑작스레 전해 들은 효정은, 그럼에도 의외로 그다지 놀라지 않은 기색이었다. 재희는 끊긴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다가 효정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반짝반짝 해맑은 동생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데, 효정아. 언니 말에 안 놀랐어?”

“놀랐지, 언니가 결혼한다는데. 그래도 강주 오빠라면 안심이니까 뭐……. 서운하기는 해. 내 언니 빼앗기는 기분이라.”

 생각보다 과하게 담담한 반응이었다. 적어도 뭐! 하는 탄성이 터진다거나, 말도 안 된다는 부정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모든 것에 해탈한 사람같이 무신경하기까지 한 효정의 반응에 도리어 재희가 더 놀랐다.

“상대가 상무… 아니, 강주 씨인데. 그래도 안 놀라?”

“왜? 난 언니랑 강주 오빠랑 사귄다고 진작부터 생각했었는데?”

“어떻게? 어떻게 알고!”

 소파 위에 있던 재희의 몸이 흠칫 튀었다.

 몸을 뒹굴 굴려 옆으로 누운 효정이 얼굴을 괴며 히죽 웃었다.

“집에서 소곤소곤 누구랑 작게 통화하고 가끔 외박도 하고. 생각해 보니 저번 크리스마스 땐 호텔 소파에서 강주 오빠 넥타이도 나왔었잖아.”

“…넥타이…….”

“뻔하지, 뭐. 강주 오빠가 미치지 않고서야 갑자기 넥타이 풀어 헤치고 갔을 리가 있나.”

 게다가 넥타이만 푼 건 아닐 거 아니야. 단추도 풀고 다른 것도 풀고 다 풀었겠지. 효정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혼잣말처럼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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