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96)

 #59

 소리를 꽥 내지른 임 대리는 곧장 제 입을 막았다. 민망함으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주물럭거리며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난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자기 세뇌적인 문장만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방금의 외침은 불가항력이었다. 상무님이 왜 윤 주임에게 밥을 먹자고 하지? 손은 왜 잡는 거야? 미치겠네. 뭐야. 뭔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마우스를 붙든 손가락이 달달 떨렸다. 뭔가 뇌리를 슥슥 스치기는 하는데 차마 그걸 비집어 꺼낼 수가 없었다.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수가 없는 일인데.

 마우스만 바삐 움직이며 일하는 척을 하고 있노라니 강주가 재희를 이끌고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임 대리가 둘의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임 대리뿐만 아니었다. 밖으로 나서는 둘을 모두가 시선으로 좇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을 하다가, 재희와 강주가 제 책상을 지나쳐 가면 움직임을 멈추고 부자연스럽게 고개 돌렸다.

 그들과 달리 몹시 자연스레 걸어 나가며, 강주가 재희를 향해 말을 건넸다.

“뭐 먹고 싶어요?”

“한식요.”

 사실 마음 같아서는 한식은커녕 물만 먹어도 목구멍에서 걸릴 것 같다. 정신이 없었다. 그에게서 결혼 계약을 제의받기는 했으나, 이런 상황은 예측한 적이 없었다.

“아까 밥 같이 먹자고 메시지 보내 놨었는데 혹시 못 봤어요?”

“차 회장님이 부르셔서 다녀오느라 제대로 못 봤어요.”

“그래요? 질투 나네. 나보다 내 아버지에게 더 신경 쓰고.”

 강주의 마지막 목소리를 끝으로 사무실 입구 문이 닫혔다. 두 사람이 밖으로 사라지자 사무실에 숨죽인 속닥거림이 뒤늦게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저거 뭐야? 대화 들었어? 진짜, 저거 뭐야? 뭔데? 완전 대놓고 뭐야?

 임 대리의 자리 옆으로 몇몇 친한 이들이 벌 떼처럼 모여들었다. 방금 본인들이 지켜본 사태가 무언지 묻기 위해 찾아온 벌 떼들이었다.

“임 대리님, 뭐예요? 저거 뭐예요? 네?”

“임 대리! 뭔데? 상무님이 왜 재희 씨 손을 잡고 나가? 어?”

“뭐 아는 거 있어, 임 대리?”

 파티션 너머에 있던 기획 팀 강 부장도 괜히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하는 척 곁눈질했다. 근무 시간에 모여 번잡스럽게 뭐 하는 짓이냐 소리칠 법도 한데 하지 않는 걸 보니 그 역시 임 대리의 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임 대리는 마우스를 손에서 놓았다. 그러고는 제 대답을 기다리는 이들을 차근차근 번갈아 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몰라……. 몰라요. 저도 진짜 몰라요. 그래서 무서워 죽겠어…….”

 내가 그동안 윤 주임한테 어떻게 했더라? 나 뭐 밉보인 거 없겠지? 임 대리는 달달 떨리는 손끝을 괜히 한 번 쥐어뜯었다.

 ***

“두 분이 함께 손을 잡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래? 강주 그놈이 작정한 모양인데.”

 차 회장은 권 실장에게 강주와 재희가 손을 잡고 나간 일에 대해 이제 막 보고받은 참이었다.

 며칠 전. 강주는 집에 폭탄을 하나 터뜨렸다.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말에 차 회장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결혼에도 늘 심드렁, 이성 관계도 없다시피 한 강주에게서 그런 종류의 말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강주의 모친인 영현은 생각보다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미 강주에게서 언질을 받은 적이 있었거니와, 젊을 때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야 흔하지 않은가.

 지금은 누군가와 사귀더라도 결혼은 격이 맞고 집안이 맞는 상대와 하겠지, 하는 믿음이 솔직히 있었다. 하지만 뒤이어 건넨 강주의 말에는 놀라 눈썹을 들어 올렸다.

‘결혼도 하고 싶습니다.’

 그 이후는 아수라장이었다. 영현은 도대체 상대가 누구냐며 충격에 젖은 얼굴로 물었고, 차 회장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혹여 영현이 들이밀었던 부용 그룹 회장 손녀는 아니겠지. 그 집안과 강주가 이어지면 강주의 등에 훨훨 날개가 달리는 일이다. 최악의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부인인 유 관장이 저리 놀라는 것을 보아 아마 부용 그룹 아이는 아닌 모양인데.

 상대가 누구냐 연거푸 묻는 영현의 질문에 강주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답을 했다.

‘윤재희입니다.’

‘윤재희?’

 윤재희가 누군지 둘 다 머릿속을 더듬었다. 쉽사리 튀어나오는 얼굴은 없었다. 강주가 빙긋 웃었다.

‘두 분도 아실 거예요. 이곳에서 잠시 살았던 윤재희.’

 …뭐!

 차 회장과 영현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공간을 울렸다.

 강주의 답으로 둘의 표정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특히 영현은 충격에 젖은 얼굴로 입만 달싹거리며 목구멍 밖으로 목소리를 끄집어내지 못했다.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인 상대 아닌가. 윤재희라니.

 그날 일을 되새기던 차 회장이 기분 좋은 얼굴로 웃었다.

“강주 그놈아가 윤재희에게 흥미 잃기 전에 결혼시켜야 해. 권 실장, 너도 계속 그 둘 일, 내게 알려 주고.”

“예, 회장님.”

 차 회장은 고개 숙인 권 실장의 머리꼭지를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윤재희라……. 고작 윤재희라니.”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늘 조용히 제 몫을 차리던 차강주가, 그 능구렁이 같은 차강주의 선택이 결국 윤재희였다니. 이렇게 실속이 없을 수 없다며 차 회장은 강주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윤재희 그것이 여간 영악하지 않은가 보지? 얌전하게 생겨서는 주제도 모르고. 지가 어떻게 감히 회장 아들을 탐내. 접시나 닦던 가정부 딸년이 어디서, 감히……. 그렇지 않나, 권 실장?”

“…네, 그렇습니다. 회장님.”

“제까짓 게 감히 우리 세계 사람들과 어울릴 수나 있을 것 같아서?”

 차 회장의 목소리가 사무실 안에 울렸다. 권 실장은 그의 웃음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주제도 모르는. 천한 게 감히. 부리는 사람과 자신 사이의 계급의 벽을 딱 가른 차 회장의 발언이 발걸음마다 눅눅하게 따라붙었다.

 차 회장의 경호나 하는 권 실장은,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깜빡거리는 휴대 전화를 들었다. 부재중 두 통. 상대의 이름을 확인 후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때였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기석은 차 회장이 있을 사무실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드디어 받네요, 기석 씨?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돼요? 나 8시 이후부터 시간 비는데.

“오늘은 차 회장님 선약이 있으셔서 안 되고, 내일은 됩니다.”

 기석은 목소리를 죽이며 성큼성큼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아빠는 뭐 그리 매일 바빠서 우리 기석 씨 고생시키지? 돈도 쥐꼬리만큼 주면서. 기석 씨 나 안 보고 싶어요?

 전화 너머로 투정 부리는 목소리를 향해 기석은 옅게 웃었다.

“보고 싶습니다, 시은 씨.”

 그 시각, 강주의 모친 영현은 부용 그룹 유선과 만나 속을 풀어놓는 중이었다.

“나도 강주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결혼 얘기를 꺼낼 줄 몰랐어. 그냥 상황 무마하려고 대충 꺼낸 말인 줄 알았는데. 상대가 윤재희 그 애인 줄도 몰랐고.”

“많이 놀라셨겠어요.”

“아주 놀랐지. 세상에 어떻게…….”

 영현은 이제 막 유선에게 여러 상황을 토로한 참이었다. 강주가 다짜고짜 들이민 결혼 이야기라든가, 본의 아니게 유선을 곤란한 상황에 밀어 넣었던 일에 대한 사과 등등.

 어휴, 영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탐탁지 않은 여러 일이 머리를 들쑤셨다. 재희를 정식으로 데리고 오겠다는 강주에게, 우선 다음에 대화하자며 약속을 뭉개 놓기는 했지만, 언제까지 뒤로 미룰 수는 없는 일.

 말썽 하나 없던 아들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때리다니. 어떻게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 딸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하는 건지.

 다른 이도 아니고 강주가 꺼낸 이야기였기에 더욱 속이 달았다. 여간해서는 허튼소리를 하거나 실없는 말을 꺼내는 아이가 아니지 않은가. 어미인 자신인 누구보다 강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심사숙고하여 꺼낸 말일 테고, 어지간해서는 꺾이지 않을 터였다.

“미안하게 됐어, 유선아. 네게 폐가 됐네.”

“아뇨, 괜찮아요, 관장님. 저도 좋아서 강주 씨 만나러 갔던 건데요, 뭐.”

 침착한 유선의 말에 영현은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운 상대였다. 당당하고 활기찬 성격. 딱 떨어지면서도 우아한 몸가짐. 싹싹한 붙임성. 부용 그룹 회장의 손녀. 외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배경적으로 완벽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유선을 응시하는데 이내 유선이 옅게 웃었다.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응? 뭘?”

“강주 씨와의 결혼이요.”

 영현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결혼이라니.

“결혼 쉽게 허락하실 거 아니지 않아요, 관장님?”

“응, 그렇지.”

“반대하지 마시고 내버려 두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둘을 갈라놓을 생각은 없지만, 결혼은 조금 뒤로 미루자는 이유로.”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기는 한데. …유선이 너, 우리 강주 포기할 생각은 없구나?”

 영현이 대번 유선의 심중을 찔렀다. 유선 역시 찌르는 대로 넘어가며 당당히 미소 지었다.

“네, 요샌 이혼도 별거 아닌데, 사귀었다가 헤어지는 거야 뭐 대수인가요?”

 강주와 재희의 결별을 아예 기정사실로 한 발언이었다. 재벌가 후계자와 가정부 딸의 결혼이라. 어불성설이다. 아무리 차강주의 뜻이 강경하더라도 절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유선은 확신하고 있었다.

 영현이 이제야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은 반대할 거지만, 둘의 연애까지 반대할 생각 없어. 반대하면 오히려 더 타오르는 법이니까.”

“관장님 말씀이 맞아요. 불난 집에 부채질하면 불만 번지죠.”

“불길도 한철이지. 콩깍지만 벗겨지면 강주도 곧 정신 차릴 거야. 말이나 되는 일이니?”

 영현은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듯 힘주어 중얼거렸다. 유선 역시 그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 내 남자의 과거 같은 거 신경 안 써요. 강주 씨 기다릴 수 있어요.”

 전 갖고 싶은 건 꼭 가져야 하거든요. 유선의 혼잣말이 입 속에 맴돌다 사라졌다.

 재희는 젓가락을 가볍게 내려놓았다. 이제 막 식사를 끝낸 참이었다.

 어디서인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높게 울리는 맑은 새소리 역시. 서울 한복판에서 이토록 청량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재희는 그 사실에 새삼 놀라며 수정과를 마셨다.

“그런데, 상무님. 오늘 갑자기 무슨 일인 거예요?”

 함께 식사하자며, 사이좋게 손을 붙들고 이곳으로 온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무실이 소리 없이 출렁였던 아까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그때를 회상하니 방금 먹은 음식이 묵직하게 얹히는 기분이었다.

 이제 당장 사무실에 어떻게 들어가지. 그러고 보니 지금 1시 넘었는데, 괜찮나.

 아까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자신이 늦는다 한들 누구 하나 타박하지 않을 게 뻔했다. 재희는 도리어 그 사실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주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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