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재희는 조금의 지체 없이 알겠다고 답하고는 수화기를 내렸다. 좋지 않은 긴장감이 손끝을 타고 오른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미 강주에게서 흘리듯 언질을 받았던 적이 있다.
“조만간 권 실장에게서 연락이 올지 몰라요.”
“차 회장이 절 만나려 할 거니까요?”
“맞아요.”
분명 권 실장에게서 다이렉트로 연락이 오리라는 말이었다. 강주가 집안에 결혼 이야기를 꺼낸다면, 우선 차 회장이 제일 먼저 움직일 것이다. 강주는 쉽게 차 회장을 간파한 후 재희에게 경고 아닌 경고를 보냈다.
“움츠릴 필요 없으니 당당하게 행동해요. 재희 씨는 차 회장에게 쉬운 먹이라, 쥐고 흔들려 할 게 분명하니까.”
그와의 결혼. 마음이 아닌 머리로 하는 거래.
만약 이 결혼이 사랑에 의한 결실이었다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차 회장이 흔드는 대로 휘청거리며 강주의 품에서 속삭였을지도. 제겐 너무 버거워요. 무서워요, 강주 씨, 하고.
하지만 이건 거래였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거래. 둘 사이의 결혼이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니 감정에 흔들릴 필요도, 시련에 굴복할 필요도 없었다.
재희는 눈을 빛내며 단호히 답했다.
“흔들리지 않아요. 그저 계약으로 하는 결혼인걸요.”
“…….”
자신을 흔들 수 있는 사람은 제 가족과 강주뿐이었다. 쌍방이든 일방이든 제가 마음을 주는 상대들. 차 회장은 그 범위 안에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 사고와 관련하여 진실이 밝혀진다면 제 손으로 고꾸라뜨려야 할 상대.
강주는, 그저 계약 결혼일 뿐이라 말하는 재희를 굳은 얼굴로 응시하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풀었다.
“혼자 상대하기 힘들면 나 불러요. 재희 씨가 부르면 언제든 갈게요.”
나직이, 그러나 힘주어 말하는 강주의 말에 재희는 새삼스럽게 강주를 응시했다.
그를 향한 마음만 표현하지 않으면 차강주는 늘 다정한 남자였다. 어린 시절, 만약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애틋한 사이로 남아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번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바라는 대로, 귀를 닫고 눈을 감으며 착하게 따라가기만 한다면 저 상냥함은 계약이 끝날 때까지 온건히 쏟아질 것이다.
“상냥하시네요, 상무님은.”
옅게 웃으며 뱉는 재희의 말에, 강주 역시 그녀와 눈을 맞추며 가만히 웃었었다.
“이제 재희 씨는 내 사람이니까요.”
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회장이 부른다면 가야지.
재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절 기다리고 있는 권 실장을 향해 담대히 웃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함께 올라가시죠.”
권 실장을 따라 최상층으로 올라가자 새삼 긴장이 됐다. 몸이 하늘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콩콩거리기 시작한다. 재희는 보이지 않게 손바닥을 옷 위에 문질러 닦고는 회장실 앞에 섰다.
“들어가세요, 재희 씨.”
“고맙습니다.”
열린 문틈으로 들어섰다. 돈과 권력을 발아래 둔 자의 공간 속으로.
안으로 몇 발자국 더 발을 움직이니 사무실 벽을 한가득 채우는 유리창이 보였다. 유리창 너머 한강이 유유자적 흐르고 있었다. 검푸른 강물이 차가워만 보였다.
재희는 회장실 중간쯤에 멈춰 서서는 차 회장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또 만나는구나, 재희야. 이리 가까이 와라.”
“네.”
재희는 너른 사무실을 직선으로 걸어가 그의 소파 앞에 섰다. 마치 결재를 기다리는 사원이라도 된 것처럼. ‘회장님’의 직함으로는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서 있지 말고 앉아라.”
“네.”
그의 손짓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왜 부른지는 알고 있지?”
재희는 잠깐 침묵하다가 이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상무님과의 일 때문에 부르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일이라 표현할 수 있다면, 그래. 일 때문에 부른 게 맞다.”
자식 결혼시키는 것도 숙원 사업이기는 하지. 차 회장은 허허 웃고는 재희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그의 눈빛을 모조리 받아 내며 재희는 긴장을 간신히 눌렀다.
두 시선이 한참이나 닿았다. 재희는 살짝 고민했다. 이제 눈을 슬슬 내릴까. 너무 건방져 보이는 것 같은데. 우선은 납작 엎드려야 결혼이 이루어지든 말든 하지. 재희가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려 할 때였다. 뒤늦게 차 회장이 입을 열었다.
“나는 구태의연한 사람이 아니다. 집안 차이니 뭐니 이런 거 따질 생각도 없어. 내 아들이 좋다고 하면 밀어줄 생각이고, 서로 사랑한다면 마땅히 축복해 줄 수 있다.”
“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예상했던 말이 나왔다. 강주 역시 미리 말하지 않았나. 차 회장은 이 결혼을 절대 반대하지 않으리라고. 등 뒤에서 부는 바람처럼 절 밀어주겠다는 차 회장의 태도가 그리 놀랍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유 관장은 아니야. 유 관장은 아마 반대할 게다.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거든.”
재희의 표정은 여전히 침착했다. 유 관장. 강주 모친의 반응 역시 예상하는 바였다.
만약 강주와의 결혼이 사랑의 결실에 의한 것이라면 반대에 분명 상처받을 테지. 하지만 이 결혼은 계약이자 교환이었다. 강주 모친의 반대를 그저 업무상 거쳐야 할 난관이라 생각하니 도리어 마음이 편했다.
“제 배경이 상무님에 비해 부족하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차 회장이 두 손을 깍지 꼈다.
“한데 강주가 아직 상무님인가 보구나.”
“아……. 네.”
입에 붙은 명칭이라 잘 떨어지지 않았다. 강주에게서도 늘 지적받았던 일이다. 언제까지 상무라 부를 거냐며 웃는 얼굴로 타박했지만, 그럼에도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건 아마 스스로 느끼는 그와의 벽 때문일 거다. 절대 넘지 못할 것 같은 견고하고도 높다란 벽.
언제 만났냐, 얼마나 만난 것이냐, 뒤늦게 기초적인 질문을 던진 차 회장은 바쁠 테니 이내 돌아가라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유 관장은 내가 설득해 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이만 가 봐. 나중에 할 말 있으면 또 부르마.”
“네, 회장님. 감사합니다.”
재희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녀의 숙인 목덜미 위에 차 회장의 시선이 닿았다. 진득하게 얽혀 올라가는 눈길이 그녀를 훑는다. 이마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콧대와 강단 있게 다문 입. 살짝 내려간 우아한 눈매. 미령을 한없이 닮은 얼굴.
차 회장은 갈증이 나는지 목을 큼큼 울리고는 재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악수를 하자는 것이었다. 재희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크고 메마른 손이 재희의 가녀린 손을 바짝 움켜쥐었다.
“앞으로 마주할 일이 종종 생길 거야.”
“네, 회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재희야. 넌, 미령이… 네 엄마를 많이 닮았구나.”
“그런 말 많이 들었습니다. 딸이니까요.”
대답하는 중간에 오싹함이 불쑥 치밀었다. 이유 모를 한기였다. 자신이 차 회장과 한 거라고는 몇 마디 대화와 악수뿐인데.
차 회장의 악력을 피해 손을 뺐으나 그의 손은 재희를 놓아주지 않았다. 차 회장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힘으로 그녀의 손을 꽉 잡고 흘리듯 중얼거렸다.
“네 엄마를 정말 아주 많이 닮았어. 엄마 닮아… 아주 예뻐.”
재희는 몇 번에 걸쳐 손을 씻었다. 물비누를 몇 번이나 짜서 문지르고, 또 짜서 박박 닦았다. 사람과의 악수가 그렇게 불쾌할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차 회장은 위험해. 절 보는 시선이 위험했고, 음습한 접촉이 위험했다. 엄마와의 일로 차 회장을 의심하고 있어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감각이 전해 주는 경고였다.
차근차근 진실을 파헤치자. 재희는 물이 뚝뚝 흐르는 손을 닦으며 거울을 올려 보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창백한 여자가 절 노려보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 임 대리가 고개를 쭉 내밀었다.
“위에는 왜 다녀왔어?”
“그냥 호출이요.”
재희는 대충 뭉뚱그려 답했다.
“요새 호출이 잦네?”
“그러게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없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싱겁게 웃은 재희가 고개를 내저었다.
일전에 김 과장의 성희롱과 직장 내 괴롭힘 일로 인사 위원회가 열린 적이 있다. 그 이후부터 상부로부터 호출이 잦아지자 임 대리는 진심으로 걱정 어린 눈길을 보냈다. 혹시 찍힌 건 아니냐며.
흔한 일이었다. 상부는 튀어나온 돌을 싫어한다. 무언가 삐죽 가시를 드러내면 그냥 잘라 버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역시 나 걱정해 주는 건 대리님밖에 없다니까?”
임 대리를 안심시키며 재희는 마우스를 잡았다. 오전부터 차 회장을 만나고 오느라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점심 이후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있건만 벌써 점심때가 다가온다.
일을 시작하려 폼을 잡는데 입구 쪽이 시끄러워졌다. 고개를 힐끔 들어 파티션 너머를 응시했다. 누군가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이는 직원들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상무님.”
“상무님! 안녕하세요!”
차강주. 그가 모두의 주목을 이끌고 들어서고 있었다. 이따금 8층을 방문했던 그인지라 딱히 놀랄 일은 아니었다.
강주는 인사에 손짓으로 대충 답하며 재희 쪽으로 곧장 걸어왔다.
‘…어?’
재희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향한 방향이 아무래도 자신 쪽인 것 같다. 왜일까. 가끔 내려오고는 했어도 회계 팀이나 상품 기획 팀으로 갔지 이곳으로 온 적은 없었는데. TF 팀이 구성됐을 때를 제외하고는 업무적으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무슨 일이지?
“안녕하세요, 상무님.”
“근무 중이었어요?”
당연한 사실을 물으며 강주가 재희 앞에 섰다. 재희는 “네.” 하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임 대리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강주에게 인사하고는 다시 앉았다. 눈동자에 의아함이 가득 찼다. 상무님께서 윤 주임을 왜 찾아오셨지……?
강주는 무덤덤한 표정의, 그러나 필시 속으로는 무척 당황하고 있을 재희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점심 같이 먹으러 왔어요.”
순간 사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탁탁탁 두드리던 키보드 소리도, 달칵거리던 마우스 소리도. 음료를 마시던 소리도.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소리를 죽였다. 다들 은근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중 강주에게서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발언이 나오자 우뚝 행동을 멈춰 세운 것이다.
점심을 같이 먹자고? 그게 무슨 소리지. 상무님이 왜 재희 씨에게?
사무실 사람들은 강주의 의아한 제안을 곱씹으며 눈빛만 교환했다.
이번에는 재희의 무덤덤한 표정 역시 깨졌다. 재희는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 점심시간이 아닌데요, 상무님.”
“30분 있으면 열두 시잖아요.”
“…….”
“뭐 해요. 가요.”
픽 웃은 강주가 손을 내밀어 재희의 손을 다정하게 맞잡았다. 그러자 둘을 훔쳐보던 임 대리에게서 도리어 놀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엄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