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96)

 #57

“네?”

 너무 놀라 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갑자기 결혼이라니 이 무슨. 하지만 언제 폭탄 같은 발언을 속삭였냐는 듯, 강주는 재희를 향해 부드럽게 웃을 뿐이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앉아요.”

 얼떨결에 소파에 앉은 재희의 맞은편에, 재희보다 더 얼어 있는 유선이 있었다.

 유선의 시선이 두 사람을 좇았다. 바짝 굳은 재희의 손을 움켜잡는 강주와 뚝뚝 부러지는 것같이 소파에 앉은 재희의 창백한 얼굴을.

 홀로 여유로운 강주가 둘을 향해 차근차근 손짓했다.

“소개가 늦었네요. 재희 씨, 이쪽은 제 어머니의 친구인 정유선 씨. 정유선 씨, 이쪽은 윤재희 씨입니다.”

 유선은 목덜미를 매만지던 손을 이어 턱을 쓸었다. 씨근거리는 호흡을 따라 가슴팍이 오르내렸다. 어지간해서는 늘 당당하게 미소 짓던 유선이건만 이 순간만은 그러기가 힘들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재희의 손을 꽉 움켜쥔 강주가 보였다.

“인사하세요. 마케팅 2팀의 유능한 주임이자, 제 애인입니다.”

“…….”

“이런 식으로 소개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제일 먼저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고 어머니께서 서운해하실 텐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미리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목이 타는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유선이 가느다랗게 말했다. 강주가 딱 자르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머니께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제 어머님께 듣지 못해 헛된 걸음을 하셨네요.”

 유선의 입술이 가만히 맞물렸다. 습관처럼 잔을 들어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감미로운 커피 향기가 물씬 풍겼다.

 공기에 섞여 들어 들어오는 커피 향을 한참이나 맡던 유선이 이내 잔을 내렸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방을 든 유선은 재희를 향해 상냥한 미소를 던지기까지 했다.

“임자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오늘은 실례했어요.”

 오늘은, 그 단어를 힘주어 발음하며 유선은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딱 부러지는 인사에 강주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제 어머니야말로 실례했지요.”

 유선을 밖으로 안내하는 손길이 선선했다.

“아뇨, 유 관장님은 실례하지 않으셨어요. …전혀.”

 유선은 알 수 없는 답을 건네고는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유선이 사라진 자리. 강주는 문을 닫고 돌아섰다. 가만히 숨을 삼키는 재희가 보였다. 강주는 아까처럼 재희의 옆자리에 앉는 대신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 덕에, 재희는 ‘잠시나마 애인’이었다가 다시 상무님을 앞에 둔 사원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재희가 고개 들어 강주를 살폈다. 강주는 마치 거래를 앞둔 사람처럼 두 손을 깍지 껴 맞잡고는 미소를 올렸다. 재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이건 무슨 상황인가요, 상무님? 아까 그 말씀은, 그건, 그……. 도대체 무언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 문장에 한 번 제동이 생겼다. 재희는 그의 입술이 움직이기를 바라며 초조한 숨을 삼켰다.

 강주가 무심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 결혼, 그거.”

“네, 그거.”

 차마 ‘결혼’이라는 단어를 올리지조차 못해 그냥 그거로 대충 뭉뚱그린 재희였다. 팔짱을 낀 강주가 소파에 등을 나른히 기댔다.

“별거 아니에요, 적당한 거래로 결혼하자는 뜻이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별거 아니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는가. 결혼이라는데. 그것도 차강주 상무와 자신의 결혼이라는데. 그의 의사소통 능력에 커다란 하자가 있지 않은 이상, 그의 결혼은 바로 둘의 결혼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차강주, 윤재희, 둘의 결혼.

 당사자 중 하나는 몹시 여유로웠고 다른 하나는 몹시 당황했다. 물론 후자는 자신이다.

 재희는 당장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다음 말이 나오기까지, 그의 침묵이 억겁같이 길게만 느껴졌다. 이윽고 강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거미를 잡으려면 거미줄에 뛰어들어야지 않겠어요?”

“거미요?”

 강주의 입꼬리에 냉소적인 미소가 걸렸다.

“차 회장.”

“…….”

“진실도 알아내고 싶고, 차 회장에게 엿도 먹이고 싶잖아요, 재희 씨.”

 재희의 얼굴이 위아래로 천천히 끄덕여졌다.

“나와 결혼하면 차 회장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거예요. 원한다면 본가로 들어가 신혼 방을 차릴 수도 있어요. 어디 한번 마음껏 헤집고 돌아다니며 파헤쳐 봐요.”

 심장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애당초 엄마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강주 곁에 계속 붙어 있고자 함이 아니었나. 엄마의 결백을 위해서. 억울한 엄마의 사고를 수면 위로 다시 끄집어내기 위해서.

 하지만 그럼에도 알아낼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그의 본가를 종종 돌아다니며 CCTV의 위치만 더듬었을 뿐이다. 차 회장과 강력한 연결 고리가 없는 이상 자신이 어떤 시도를 한들 허무하게 허공만 짚는 꼴에 불과했다.

 차강주의 부인. 그 신분만큼 차 회장을 가까이 마주할 일은 없을 텐데.

 솔직히 끌렸다. 그와의 결혼도, 차강주와의 결혼이라는 그 제안 자체도. 하지만 의문인 건.

‘상무님이 왜?’

 차강주, 그의 의도였다.

 섹스도 상호 교환, 결혼도 상호 교환이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결혼으로 그의 손에 떨어질 대가는 무언가. 자신은 진실을 향해 다가갈 수 있다지만 상무님은?

‘차 회장의 나락?’

 하지만 그건 자신과 결혼하지 않아도 그 혼자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일이다. 그의 의중을 더듬으며 서늘히 미소 짓는 얼굴을 마주했다.

“뭐 그리 어렵게 생각해요.”

 강주는 재희의 속마음이 빤히 보인다는 듯 가볍게 혀를 찼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재희를 향해 곧장 다가왔다. 허리 숙여 제 눈을 빤히 바라보는 강주를 재희는 불안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가 재희의 뺨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솔직히 전 결혼 자체가 싫어요. 굳이 왜 그 불구덩이를 향해 뛰어들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더라고.”

 은근히 뺨을 쓸고 손끝으로 귓가를 더듬으며 슬며시 아래를 향해 내려온다.

“한 사람에게 얽매이는 것도 싫고. 자유를 잃는 것도 싫어요. 정유선 같은 상대와 결혼하면 아무래도 행동에 제약이 생길 테니까.”

 슬슬 내려온 손이 재희의 단추를 매만졌다. 하지만 풀지는 않고 애를 태우듯 건드리기만 한 뒤 그대로 떨어졌다. 재희는 그의 손이 닿았던 단추를 매만지며 상체를 물렸다. 조명을 등진 강주의 얼굴 위로 우아하게 그림자가 져 있다.

 재희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목적이 무어든, 그의 의도가 무어든 그 자체가 몹시 현실성 없는 제안이라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그와. 어떻게 내가 감히.

“정략결혼. 난 그런 거 관심 없거든. 내겐 재희 씨가 딱이에요. 내 사생활 적당히 눈감아 주고, 숨죽여 곁에 있어 줄. 서로의 목적이 부합하는 관계.”

“…….”

“재희 씨는 차 회장 엿 먹이고, 나는 자유 지키고.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 않아요?”

 그가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쉽게 말해, 몰래 자란 잡초처럼 곁에 있으라는 뜻이었다.

“물론 물질적인 보상도 있을 거예요. 재희 씨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큰. 내가 말했잖아요. 힘이 닿는 한 재희 씨가 원하는 건 모두 들어줄 수 있다고.”

 섹스로 대가를 받는 거로 모자라 이제는 결혼으로까지 그에게 대가를 받게 생겼다.

 대답을 종용하는 눈빛이 쏘아진다. 재희는 이 상황에 자조하며 조용히 되물었다.

“하지만, 허락받지 못하실 텐데요.”

 판에 박힌 질문을 들은 것처럼 강주의 얼굴에 무료함이 올라왔다.

“차 회장은 허락할 거예요. 내 기반이 미진하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이니까, 재희 씨를 두 팔 벌려 환영하겠지.”

“유 관장님은요?”

“내 어머니는 내가 알아서 해요.”

 그가 날카롭게 선을 그었다. 네가 거기까지는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듯 냉랭히.

 무겁고 어려운 문제를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니 정말 결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이 물살에 휩쓸려 가다 보면 결국 결혼에 다다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결국, 거친 물살에 휩쓸려 넝마가 된 잔해만 안은 채 홀로 남겨지겠지.

 재희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실패라고는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았던 사람처럼 담대하고 여유롭기까지 한 남자. 늘 보아 왔던 사람인데 오늘따라 새삼 낯설었다.

 익숙함을 뚫고 다가온 한기가 발치에 스몄다. 스멀스멀 몸까지 타고 올랐다.

 이건 독이다.

 날 모조리 삼켜 버릴 달콤한 독.

 눈을 감고 모른 척 삼키면, 마음을 뭉개고 으깨고 짓밟아 결국 갈기갈기 찢어진 심장만 남길.

 쉽사리 대답을 꺼내지 못하는 재희에게 강주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찬찬히 생각해 봐요, 따위의 배려는 없었다. 지금 답하지 않으면 영영 이 제안을 잃을 것처럼 재희의 시선을 파고들며 대답을 강요할 뿐이었다.

“그래서, 싫어요?”

 만약 이 자리에서 고래를 내젓는다면 두 번 다시 묻지 않을 것처럼 차갑고도 냉혹한 목소리였다.

 재희는 두 손을 꽉 맞잡았다.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 손가락을 강하게 겹쳐 잘게 떨리는 동요를 숨겼다.

 지금 그의 손을 잡지 않으면 영영 그를 잃을 것이다. 엄마의 진실을 파헤칠 단서도, 차강주라는 존재도 훨훨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무언가 대답을 하려다가 입술만 달싹이고 다시 닫았다.

 재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 자신은 결코 그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하리라. 탐낼 수 없는 이를 탐낸 죄로 상처뿐인 맨몸으로 던져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그를 향해 뛰어들고 말리라.

 초조하게 손가락만 내려다보던 재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희미하게 움직여 생애 처음 목소리를 내는 사람처럼 가까스로 목을 울렸다.

“…좋아요.”

 강주의 입꼬리에서부터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치 갓 꽃잎을 틔우기 시작한 우아한 꽃처럼.

 15장. 거짓이라 할지라도

 재희는 바쁘게 마우스를 움직였다. 일은 밀려 있는데 영 집중이 되지 않아 억지로 모니터를 노려볼 때였다. 사내 전화기가 울렸다. 001번. 전혀 모르는 내선 번호였다.

 재희는 수화기를 어깨와 귀 사이에 갖다 댔다.

“감사합니다, 전략 마케팅 2팀 윤재희입니다.”

 -안녕하세요, 재희 씨. 권기석입니다.

“…….”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가 불쑥 던져졌다. 재희는 어깨를 올려 대충 귀에 댔던 전화기를 손으로 잡았다.

 수그렸던 허리를 똑바로 펴며 통화에 집중한다. 권기석. 차 회장의 수행 비서이자 경호원이며, 차 회장의 충실한 수족.

 일전에는 맞선 상대 사진이 담긴 파일을 들고 강주의 집에 찾아오기도 했었다. 그가 사내 전화를 이용하여 연락해 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기석 씨. 아니, 권 실장님. 무슨 일이신가요?”

 -차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바로 올라오라고 하시네요.

 맞은편에서 기석의 깔끔한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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