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찰칵, 새까만 몸체에서 부자연스러운 소리가 났다. 이어, 차 회장이 자갈을 밟으며 조명 옆을 지나는 순간에도 찰칵, 소리가 났다. 정원 밖으로 미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나오자 셔터는 더욱 빠르게 터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차 회장과 그의 내연녀의 밀회를 찍은 카메라는 새까만 가방 속으로 돌아갔다.
곧 누군가 은밀히 몸을 움직여 숲을 빠져나갔다. 마치 그곳엔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지이잉- 강주는 몸을 떠는 휴대 전화를 쥐었다.
[20XX년. 05월 13일. 경기도 XX시. 3차 자료 입수.]
메시지를 확인한 그가 휴대 전화를 다시 탁자 위로 툭 올려놓았다.
품에 안겨 자던 재희가 몸을 뒤척이며 빠져나갔다. 강주는 그녀를 당겨 다시 품었다. 휴대 전화를 응시하던 서늘한 눈빛이 어느새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답답한지 강주의 품에서 벗어나려는 재희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으며 눈가에 입을 맞춘다.
“더 자요. 재희 씨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재희는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날 이후로도 강주는 달라진 게 없었다.
재희는 사무실 자리에 앉아 핸드크림을 바르다가 가만히 그의 말을 떠올렸다.
‘까불지 마, 윤재희. 진흙탕 구르기 싫었으면 애초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지.’
제 마음을 냉혹하게 파고들던 날카로운 목소리.
진흙탕인 걸까.
그는, 내게 진흙탕인 걸까.
곱씹고 되새겨 보아도 그는 진흙탕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엄마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그를 이용하고자 마음먹었던 자신이 진흙탕투성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니 마음껏 이용해 봐요.’
그날,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진 이후로도 강주는 여전히 표면적으로는 다정했다. 이따금 무얼 생각하는지 모를 가라앉은 표정으로 지켜보다가도, 서로의 눈길이 닿으면 이내 미소 지었다. 끌어안아 주고 등을 쓸어내리며 뺨에 입을 맞추고는 했다.
그의 행동이 뜻하는 건 무얼까. 강주의 머릿속에 무어가 있는지 어림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물살에 쓸려 가는 나뭇잎처럼 천천히 떠밀려 내려갈 뿐이었다.
우선 상무님의 도움을 받아 엄마 사고를 파헤쳐 보자. 다음은 그때 생각하기로.
재희는 멈췄던 손을 움직여 핸드크림을 싹싹 문지르고는 목을 쭉 빼고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전략 마케팅 2팀, 윤재희 주임. 지금은 제 본분에 충실할 시간이었다.
키보드 위에서 얼마나 정신없이 손가락을 놀렸을까. 뚜르르- 벨 소리와 함께 사내 전화기 숫자 창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내선 번호가 낯선 걸 보니 기획 팀이나 영업 팀은 아닌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마케팅 팀 윤재희입니다.”
-안녕하세요, 윤재희 주임님. 이번에 차강주 상무님의 새로운 비서가 된 강보람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신가요?”
-상무님께서 윤 주임님을 호출하셨어요. 지금 바로 올라오기를 원하십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도, 재희는 머뭇거림 없이 재깍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강주의 집에서 그와 어떤 관계이든 이곳은 회사. 상하 수직 관계가 분명한 장소였다. 자신은 상무님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사원에 불과했다.
“혹시 따로 요구하신 건 없으셨나요? 자료라든가.”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
“네, 알겠습니다.”
재희는 상대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는 전화를 끊었다.
묘한 의문이 치솟았다. 상무실에서 절 곧장 부를 일은 잘 없는데 무슨 일일까.
작성하던 엑셀 파일을 바로 저장한 후,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강주의 사무실을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래를 고고하게 내려다보는 22층을 향하여.
***
정유선은 콧노래를 부르며 강주의 사무실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일전에 강주에게 쫓겨나듯 퇴장당하기는 했으나 아직 포기하기는 일렀다. 기왕 칼을 뽑았으니 휘둘러라도 볼 생각이었다. 자존심이 있지.
뻔뻔한 낯짝이라기보다는 빵빵한 자신감이 주는 철면피라 함이 옳았다. 덧붙여, 쉬이 포기하기에는 도전 뒤에 쟁취할 보상이 몹시 크기에 자꾸 욕심이 났다.
차강주. 그 빛나는 사람을 가질 수 있다는데.
“안녕하세요, 부용 그룹 정유선이에요. 새로 오셨나 봐요?”
유선은 가볍게 웃으며 비서를 향해 인사했다. 이번에 새로 온 신임 비서가 딱딱하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선약이 있으신가요?”
달력까지 눈으로 훑으며 확인하는 폼이 어찌 호락호락하지 않아 보였다.
“아뇨, 약속은 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차 상무님께 언질 좀 주시겠어요? 정유선이 왔다고.”
비서는 문을 힐끔 곁눈질했다. 부재중이라 둘러댈까 하다가 이내 마음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눈앞의 이는 부용 그룹 사람이다. 전 비서에게 인수인계받을 때 유선의 정보에 대해 이미 입수했었다. 방문자의 뒤에 있을 거대한 배경을 알기에 차마 거짓으로 상대할 수는 없었다.
“죄송하지만, 상무님께서 바쁘셔서요. 메시지를 남겨 주시면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머, 깐깐해라. 인사만 하고 바로 나올게요.”
하지만 유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서가 말리기도 전에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유선이 무작정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깜짝 놀란 비서가 벌떡 일어났다.
“앗, 잠시만요!”
유선의 손을 차마 내치지는 못하고 비서는 발만 동동 굴렀다. 둘 사이에 큰소리로 실랑이가 오갔다.
“이렇게 무작정 들어가시면 제가 곤란해집니다.”
“잠깐만 인사하는 건데도 안 돼요?”
“죄송합니다, 정말 곤란해요.”
두 사람의 소란에도 안은 쥐 죽은 듯 잠잠했다. 하지만 우선이 웃는 얼굴로 비서를 밀어내며 문고리를 다시 잡아 쥐었을 때, 반대편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무슨 일입니까.”
신경질적인 얼굴로 강주가 나왔다.
비서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고 유선은 빙긋 웃었다. 강주의 냉랭한 표정도 와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강주 씨. 커피 마시러 왔어요.”
“…….”
“많이 바쁘신가요? 커피 마실 시간도 없이?”
강주는 생각에 잠긴 듯, 뻔뻔한 유선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만 봤다. 그러다가 이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저 역시 가만히 웃었다.
“커피……. 그래요, 들어오세요.”
유선은 그럼 그렇지, 라는 얼굴로 강주의 옆을 지나쳐 들어갔다. 먼저 유선을 안에 들여보낸 강주가 문을 닫고는 비서를 향해 다가섰다. 찔끔한 비서가 곧장 머리부터 숙였다.
“저, 죄송합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는데-”
“이해합니다. 변명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강주가 깔끔하게 말꼬리를 잘랐다. 굳이 전해 듣지 않아도 상황을 알 것 같다는 뜻이었다.
“전략 마케팅 2팀 윤재희 주임에게 연락해요.”
마케팅 윤 주임? 비서는 강주의 말을 이해하고자 눈을 깜빡이다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한데 어떤 언질을 넣을까요?”
“올라오라고 해요. 지금 당장.”
“손님이 오셨으니 삼십 분 정도 후에 오라 전할까요?”
강주가 옅게 웃었다.
“지금 당장이라고 했어요, 강 대리님.”
“알겠습니다, 상무님.”
강 대리는 찔끔하여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강주의 사무실 안에 들어선 유선은 소파에 앉은 후,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강주를 마치 주인처럼 맞이했다.
“오셨어요, 강주 씨?”
강주는 곧장 커피 테이블로 다가섰다. 커피 머신 버튼을 누르자 위이잉 원두 갈리는 소리가 울렸다. 테이블을 짚으며 강주가 뒤를 돌았다.
“아메리카노?”
“기억하시네요, 그때 그렇게 쫓아내 놓고.”
“그토록 강렬했던 만남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웃으며 답한 강주는, 손에 커피 잔을 들고는 유선을 향해 다가갔다. 테이블에 올라온 잔을 당겨 잡으며 유선이 강주와 눈을 맞췄다. 잘 마실게요, 하고.
빙긋 웃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알아요, 저 무례한 거. 그런데 그만큼 강주 씨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예요. 아무에게나 이렇게 달려들지 않으니 오해하시면 곤란해요.”
“이쯤 되니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제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셨습니까?”
“솔직히 말할까요? 이렇게 튕기니까 더 애가 타요.”
그 말에 강주는 약간 웃었다. 유선 역시 강주의 표정을 살피며 웃었다. 부드럽게 올라간 그의 입꼬리를 보니, 분위기가 나쁘지만은 않은 듯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누가 절 거부하겠는가. 담대하고 당당한 면이 좋다고, 강주의 모친 영현 역시 연거푸 칭찬했었다. 영현과 똑 닮은 강주라면 분명 제게 마음을 열어 줄 것이다. 유선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재희는 강주의 비서 앞에 오도카니 섰다.
“안녕하세요? 윤재희 주임입니다.”
비서는 딴생각에 젖어 있는지 멍하니 펜만 쥐고 있다가 머리 위에서 재희의 목소리가 울리자 그제야 번뜩 고개를 들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오셨네요!”
“상무님께 제가 왔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아뇨,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엉거주춤 선 비서가 문을 향해 손짓했다.
재희는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었다.
과연 어떤 일로 날 부르신 걸까. 의문이 컸다. 이제 업무적인 일로 엮인 일은 없고, 사적으로 할 얘기라면 집에서 해도 충분할 텐데.
“안녕하세요, 상무님. 부르셨다고…….”
재희는 가볍게 인사하며 안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곧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안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차강주.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놀란 것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정유선. 임 대리가 메신저를 통해 가십처럼 전해 주었던 사진 속 부용 그룹 회장 손녀.
일전에 차강주를 찾아왔다던 그녀.
“왔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강주가 재희에게 거침없이 다가섰다.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당기자 재희의 몸이 휘청이며 쏠린다. 깜짝 놀란 재희가 그의 가슴팍을 짚고 고개를 올렸다.
“상무님?”
목소리에 당혹감이 담겼다. 이게 무슨 일인지. 이건 아무리 보아도 상무와 사원의 인사법은 아니다. 심지어 저 소파 앞에 다른 이도 있는데. 바로, 강주와 만난다는 소문이 도는 대상이.
강주는 재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쪽. 재희의 눈가 위로 가벼운 입맞춤이 맞닿았다. 재희는 이제 아예 뻣뻣이 굳어 버렸다.
그녀의 흠칫거리는 어깨를 어루만지며 강주가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결혼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