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96)

 #55

 쿵. 재희의 심장이 크게 떨어져 내렸다. 아까와 달리 다른 이유로 쿵쿵 뛰기 시작한다. 목 뒤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언제부터 알고 있던 걸까.

‘내게 접근한 이유가 그것 때문 아니었어요?’

 그는 확신에 차 말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비록 지금은 그의 말이 맞았으나 처음은 아니었다. 처음은 그를 향한 마음, 갈망, 동경이 다였다. 분명히 그랬었다.

 그에게 무슨 답을 내밀어야 할까. 백 점짜리는 될 수 없더라도 오십 점이라도 될 만한 답을 고르고 있노라니 강주가 눈꼬리를 나른하게 휘었다.

“늘 궁금했거든. 도대체 재희 씨가 내 집에 왜 들어왔을까…….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강주는 자조하듯 짧게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이제야 알겠더라고.”

“그건.”

 재희는 입술을 뗐다가 다물었다. 혹시 자신을 이용하려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의 손을 잡은 게 오롯이 그 때문이었다는 오해는 받기 싫었다. 구차하나마 변명이라도 해 보려던 순간, 강주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니 마음껏 이용해 봐요.”

“아뇨, 아니, 전 상무님을 이용하려던 게…….”

 느릿하게 젓던 재희의 고개가 점차 빠르게 움직였다. 힘겹게 부정하다가 상체를 무너뜨렸다. 차마 그의 서늘한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니란 문장조차 뱉을 수 없었다.

 이용하려던 게 아니에요, 그 말 자체가 거짓이었기 때문이다.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그를 향한 기만이 될 뿐이다.

 강주가 멀어지는 재희를 꽉 당겨 붙였다.

“왜. 적당히 이용해 먹다가 버리려고 했는데, 겁나?”

 그의 눈동자에 언뜻 미약한 분노가 스쳤다. 배신감과 원망을 닮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평소처럼 재희를 향해 느긋하게 미소를 보이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재희는 한 번 어깨를 떨었다. 살갗에 닿는 입술은 부드럽고 따뜻한데 묘한 서늘함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고개 들어 새파랗게 튀는 그의 눈을 마주하며 가까스로 물었다.

“어째서 그런 제안을 하시는 건가요?”

“진창에 처박힐 차 회장 보고 싶어서.”

 그는 냉담한 얼굴로 부드럽게 답했다.

 재희는 입을 열어 무어라 답하고 싶었으나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재희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준 강주가 손끝으로 그녀의 턱선을 천천히 훑었다.

“사실 차 회장은 주식 승계 후 내 손으로 무너뜨리고 싶었는데……. 뭐, 이런 식도 나쁘지 않겠어요.”

 느릿한 온기가 턱을 훑고 지날 때마다 재희의 몸에 차가운 전율이 번졌다.

“재희 씨가 날 이용하기로 작정한 이상 나도 재희 씨 이용해서 차 회장 끌어내릴 생각이에요. 오히려 잘됐지. 아버지 쫓아낸 후레자식이란 오명은 면할 테니까.”

 픽 웃은 강주가 이어 속삭였다. 지분 다툼으로 물러서는 것보다 도덕적 문제로 쫓겨나는 게 더 그럴싸하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재희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차 회장을 향한 강주의 원망을 알고 있다. 어린 시절 강주를 정신적으로 학대하며 진창에 처박은 것이 차 회장 아닌가.

 고통스러워하던 강주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게 바로 재희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천륜을 배반하면 안 된다는 판에 박힌 소리 같은 건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제는 강주의 원망이 차 회장을 지나 저에게까지 닿은 것 같아, 그게 재희는 더없이 무서워졌다. 그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으면서, 막상 이런 순간에 직면하자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하고 싶어지다니.

 우스웠다. 우스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강주의 따뜻한 손이 재희의 뺨을 감쌌다. 살갗에 닿는 온기를 타고 그의 무신경한 목소리가 미끄러졌다.

“단순히 어머니 사고에 대한 비밀이나 파고 덮을 생각이었어요? 차 회장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다가 ‘진실이 그렇구나’, 하며 발길 돌리고 싶었던 거예요?”

 강주가 선연히 웃었다.

“까불지 마, 윤재희. 진흙탕 구르기 싫었으면 애초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지.”

 ***

 은은한 톤의 미색 벽지. 그와 비슷한 색상의 대리석 타일이 깔린 바닥. 우아하면서도 절제된 공간. 차 회장의 은밀한 별장.

 고풍스러운 샹들리에 아래에서 차 회장은 몸은 일으켰다. 곁에 있던 젊은 여자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씻으시게요? 좀 더 누워 계시지 않고?”

 차 회장은 침대 밖으로 나서려다가 뒤를 돌았다. 그리고 절 올려 보는 그녀를 향해 날카롭게 말을 쏘았다.

“말투.”

“…이럴 땐 좀 봐주세요, 회장님. 피곤해서 그랬어요.”

 여자는 금세 말투를 느릿하게 바꾸며 옅게 웃었다. 애교를 부리듯 혀를 살짝 내밀며 어깨를 으쓱인다. 하지만 차 회장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 표정도 아니야.”

“…….”

 활기찼던 여자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차분해졌다.

 차 회장은 그제야 흡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새까만 머리카락. 살짝 내려온 눈꼬리와 어쩐지 보호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청초한 눈동자.

 여자는 재희를 닮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재희의 모친인 강미령과 더욱 닮았다. 미령의 젊을 때 모습과 판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생김새였다.

 여자는 이불을 끌어 올려 몸을 가린 후, 차 회장의 어깨를 은밀히 매만졌다.

“그런데, 회장님. 언젠가 제게 재단 만들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기다려.”

“하지만, 기사 같은 거 보면 이제는 재벌들도 본인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이거 저거 다 주던데……. 회장님은 자꾸 아직 아니라고만 하시고……. 전 회장님 아이도 낳고 싶은데…….”

 여자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20대 중반 특유의 말투에 차 회장은 눈썹을 찌푸렸지만 되풀이하여 말투를 고치라고는 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 여자는 그리 돌려 말했으나 실상은 차 회장의 내연녀에 불과했다.

 일전에 차 회장은 약속했었다. 그녀 앞으로 재단을 설립해 주어 그럴듯한 명함을 주겠다고. 하지만 딱 언제가 되리라고는 약속하지 않았다. 그게 1년 뒤가 될지, 10년 뒤가 될지.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다.

 그 점이 여자는 야속했고 흘러가는 시간에 애가 탔다.

 사내의 마음이 얼마나 무정한가.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다. 어여쁠 때 삼키고 질렸을 때 뱉는 돈 많은 이들의 변덕이 얼마나 흔해 빠졌는지. 지금이야 이렇게 귀염받고 있지만 차 회장이 언제 절 내칠지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 무어라도 어서 손에 쥐고 싶은데.

“언제요? 언제 해 주실 수 있어요? 매일 기다리기만 하잖아요.”

 차 회장이 그녀의 손을 잡아, 달래듯 어루만졌다.

“미령이 네가 섭섭한 거 내가 다 알지. 정말로 다 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회장님이 제게 싫증이라도 나면요?”

“그럴 리가 있나. 내겐 미령이 너뿐인데.”

 토라진 여자의 뺨을 매만지며 차 회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미령이. 차 회장은 여자에게 재희 모친의 이름인 ‘강미령’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었다.

 차 회장이 처음 눈앞의 여자를 발견했을 때부터. 그리하여 결국 그녀를 경기도 인근 별장에 숨겨 두어 비밀스러운 연인으로 두었을 때부터 그는 요구했다.

 말투는 나긋하고 상냥하게. 성급하지 않으나 행동은 굼뜨지 않게. 미소는 늘 은은하게. 당황했을 때엔 입술을 살짝 매만지고 슬플 땐 눈 아래를 일그러뜨리며 억지로 참을 것.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미령과 닮게 꾸민 후, 미령을 투영시킨 완벽한 인형으로 만들었다. 제 손을 빠져나가 버린, 끝끝내 가질 수 없던 강미령이란 환상을 결국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미령으로 불리는 여자가 입술을 삐죽였다. 차 회장은 그녀를 끌어안고 머리를 다독여 주며 힘주어 속삭였다.

“내 다 해 줄게, 미령아.”

 아무리 미령의 탈을 썼다 해도 미령은 아니다. 그 사실이 차 회장의 심중을 찔렀다.

 강미령. 늘 우아하고 초연하지. 빚을 다 갚아 준대도 가정부로 들어와 어떻게든 차근차근 갚는다며 고집을 부리고 결국 내 손아귀를 영영 벗어나 버린 것처럼. 돈으로 휘두를 수만 있었다면, 지금쯤 이 가짜를 데리고 그리움만 움켜쥐지는 않았을 텐데.

 여자의 등을 쓸어내리며 차 회장은 떠올렸다.

 눈앞의 미령이에게 재단 하나 만들어 주지 못하는 제 처지는 모두 데릴사위라는 제약 때문이다. 부인의 눈치만 보며 허울뿐인 권력을 휘두를 수밖에 없는.

 차시은. 딸, 시은이가 답이었다.

 최근 차강주가 실적을 눈에 띄게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계열사 기획 조정실을 맡으며 웅크리고 있지만, 제 부인이자 사외 이사인 유 관장이 강주의 등을 밀어준다면 그룹의 실질적인 후계자가 되리라.

‘결국엔 날 짓눌러 이 자리를 빼앗고 말 테지.’

 지금도 주위에서는 떠들어 대고 있었다. 유 관장. 제 부인이 쥐고 있는 ‘선강 홀딩스’와 ‘호텔 선강’의 지분이 차강주에게 넘어가면 그가 선강의 최정점에 서리라고. 현재 보유한 지분과 합쳐져 아마 최대 주주로 자리매김하게 되겠지.

‘내가 간신히 차지한 회장 자리도 그놈이 결국.’

 물론 차기 후계를 논하기엔 차 회장 본인이 너무도 정정했다. 일선 퇴진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시기상조였다. 하나 언젠가 차강주 그놈이 선강을 꿀꺽한다면, 제 둥지에 날아든 다른 놈의 새끼에게 선강을 고스란히 넘겨주게 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차강주, 그놈도 아니다. 시기와 대상이 모두 맞지 않았다.

‘내가 선강을 어떻게 먹었는데.’

 거울을 가만히 마주할 때마다 차 회장은 마주했다. 선강의 데릴사위. 선대 회장 딸인 부인의 꼭두각시. 굴러들어 온 천한 집 머슴.

 답은 시은이었다. 시은이 상속받을 지분과 자신의 것을 합치고. 그 전에 어떻게 해서든 부인인 유 관장을 설득해 강주에게 이미 상속한 지분만큼이라도 시은에게 더 주라고 설득을 한 후에, 일이 잘 풀리게 된다면…….

 그러고 나서…….

“…….”

 차 회장은 미래를 상상하며 눈을 번뜩였다.

 때가 되면, 과거, 개 사료나 팔던 데릴사위가, 선강을 꿀꺽 삼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선강을 주무를 이는 제 딸 시은이 되겠지. 차강주가 아닌, 진정한 제 핏줄인 차시은이.

 한 시간 후.

 차 회장은 별장 정원을 거닐었다.

 별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자그마한 동산 속 수풀. 그 안에서 무언가가 차 회장을 향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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