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상대의 얼굴에 미끄러지듯 시선이 멎는다. 은진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타인을 타박하지도 못하고 호오… 하며 그를 훑었다. 깔끔한 옷매무새나 깨끗한 목덜미, 뼈대 예쁜 손과 태생적으로 배어 있는 것 같은 당당하고도 우아한 분위기.
유난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생긴 남자가, 은진의 시선 역시 한가득 끌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차강주라고 합니다.”
부드러운 저음을 향해, 은진은 “네?” 하고 영문 모를 대답을 뱉었다.
***
“들어와요.”
강주가 재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재희는 강주의 한 걸음 뒤에 서서, 곱게 다듬어진 돌바닥을 발끝으로 톡톡 치며 주저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섰다.
선강 그룹 회장님 댁. 그 누가 이곳을 옆집 놀러 오듯 자연스레 들어올 수 있을까. 제 손을 잡고 이끌어 주고 있는 눈앞의 차강주가 아니라면.
바깥 길과 저택 안을 가르는 높다란 돌벽만 기웃거리며 안을 상상했을 거다. 저기 어디서 우리 엄마가 다쳤는데. 차마 그 안에 들어설 수 없어 발만 동동거리며.
“아무도 없어요. 안심하고 들어와요.”
재희의 망설임을 알아차렸을까. 강주가 재희의 손을 꽉 잡고는 안쪽으로 자연스레 이끌었다.
슬리퍼 아래 닿는 대리석 바닥은 딱딱하고 조금 서늘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저택 그대로였다.
‘재벌가 집에는 영화관도 있다던데?’
임 대리 말처럼 영화관은 없지만 대신 아주 커다란 벽난로가 있는. 선대 회장님 때부터 살던 집이라, 지어진 지는 오래되었지만 관리가 잘되어 도리어 고아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저택.
한때는 엄마를 따라 이따금 들어왔었던 적이 있었다. 2층에 있는 강주를 상상하며 물끄러미 천장 위 샹들리에만 응시하고는 했었지. 이렇게 손님처럼 들어올 수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앉아요. 차라도 내올게요.”
강주가 재희를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 재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엉덩이를 댔다가 다시 일어섰다.
“제가 가져올까요?”
아무래도 재벌 집 도련님보다는 가정부 딸이었던 자신이 주방 구조에 대해 더 잘 알 것이다. 강주가 재희의 어깨를 내리눌러 부드럽게 다시 앉혔다.
“손님은 쉬어요.”
“…네.”
손님. 정말 손님이구나. 이제 가정부의 딸이 아니로구나.
당연한 사실인데도, 이상하게 낯설어 재희는 옅게 웃었다. 습관이 이래서 무섭다. 그의 말대로 손님으로 왔음에도 어린 시절 몸에 밴 습관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려 했다.
‘이건 뭐 현대판 노예도 아니고.’
상무님 앞에서 저자세가 되는 것도 내 유년 시절에 기인한 건 아닐까.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집중하며 재희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은밀하고도 성급히 안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나오기 전에 집 안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뭔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사생활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실에는 당연히 CCTV가 없었다. 하지만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 위에는 동그란 카메라 모양이 하나 천장 위에 붙어 있는 게 보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주방에도 있었던 것 같다.
‘…저 계단 위에서 찍힌 영상만 남아 있었어도 엄마 동선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왜 바보같이 CCTV를 보자는 소리조차 못 했을까. 차 회장이 엄마를 범인으로 몰아 그게 진실인 줄만 알았다. 딸인 저조차 거짓인지 진실인지 모를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울기만 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때의 자신은 너무나 무지하고 어렸으며, 그때의 차 회장은 교활하고 능수능란했으니. 재벌가 회장이 그렇다는데 감히 누가 토를 달겠는가.
재희는 계단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러고 보니 저 CCTV를 누가 관리하는 거지? 사생활이 관련되어 있다 보니 업체에서 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때 주방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재희는 재빨리 소파로 돌아왔다.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는 강주가 보였다.
“꽃차네요? 잘 마시겠습니다.”
강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잔을 들고 뜨거운 김을 호호 불며 재희가 물었다.
“상무님 방은 아직 2층인가요?”
강주는 잠시 침묵하다가 잔을 내려놓더니 소파에 등을 묻으며 천천히 입을 뗐다.
“새삼 새롭네요, 그 상무님이라는 호칭.”
“네?”
“여기서는 재희 씨에게 그렇게 불렸던 적이 없으니까.”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그는 지난 과거를 불쑥 내밀었다. 케케묵은 서랍에 숨겨져 뽀얗게 먼지 내린 아득한 기억을.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절 서늘하게 응시하는 상무님이 아닌 다정했던 강주 오빠라도 된 기분이었다.
무릇 그때와 달라진 건 호칭뿐만이 아니다. 그와의 관계, 절 바라보는 눈빛까지 모든 게 달랐다. 만약 눈앞의 사람이 차강주 상무님이 아닌 강주 오빠였다면 선연히 웃으며 말을 건넸겠지.
재희야, 하고 다정하게.
…먼저 밀어낸 게 누군데.
왠지 마음이 울컥해 가만히 그를 바라보는데, 강주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다시 말을 건네 왔다.
“2층에 가 볼래요?”
“2층 어디요?”
“내 방.”
“…네.”
재희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은 은밀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재희는 정적을 가르며 그를 따라 걸었다. 대리석 바닥에 슬리퍼 쓸리는 소리조차 소음처럼 크게 들렸다.
“먼저 들어가 있어요.”
강주는 재희를 문 앞에 세우고는 옆에 있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불편한 옷이라도 갈아입으려는 걸까. 재희는 조심스레 강주의 방문을 열었다. 끼익. 주인이 오래 비워 두어 그런지 경첩에서 살짝 소리가 났다.
“아…….”
그의 방은 모든 게 그대로였다. 새삼 마음이 출렁거렸다.
약간 메마르고 건조한 공기. 자연스레 안을 채운 고아한 향기. 커다란 창문 위로 길게 드리운 커튼. 커튼 위로 하얗게 번지는 햇살.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하늘하늘한 커튼이 공중에 살랑살랑 나부끼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의 방에 자주 왔던 건 아니었으나, 기억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환상 동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홀린 것처럼 창문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슬쩍 걷어 본다. 곱게 단장된 정원 위로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고 있었다. 봄바람에 미약하게 흔들리는 나뭇잎이 푸르렀다.
“CCTV 데이터는 분기마다 한 번씩 백업해요.”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갑작스레 감겼다. 깜짝 놀란 재희가 몸을 돌리려 했지만, 뒤에서 감싸듯 안아 오는 강주의 행동에 몸이 막혔다.
귓가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귓불을 문지르고 핥으며 이어 속삭인다.
“백업본은 권 실장이 갖고 있을 테고.”
“그게 갑자기 무슨, 아…….”
강주 팔이 재희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재희는 강주의 가슴팍에 넘어지듯 기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커튼에 반쯤 막힌 햇살이 그의 얼굴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다. 절 내려 보는 눈동자가 시리도록 투명하게 빛난다.
방금 씻고 나왔는지 젖은 앞머리가 자연스레 흘러내려 와 있었다. 맞닿은 그의 몸에서 은은한 향이 피어올랐다. 이곳에서 늘 입고 있던 흰 반팔 셔츠에 눈길이 닿는다.
과거와 맞닿은 방. 예전을 회상하게 하는 그의 모습. 이곳에서 늘 보았던 자연스러운 옷차림. 낯익은 향기.
재희는 새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내려 그런지 성숙하게만 느껴졌던 차강주가 약간은 어려 보였다. 그래서 마치 그때의 차강주를 마주한 것만 같았다.
자신이 잘 알던.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 무엇도 몰랐던 그때의 강주 오빠를.
하지만 그의 서늘한 손이 제 옷 안으로 느릿하게 들어오자 금세 그때의 그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강주 오빠’는 제게 절대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늘 정숙하고 침착한, 부잣집 도련님 같은 사람이었는걸.
그녀의 허리를 느릿하게 더듬던 강주가 창가에 앉았다. 휘청거리는 재희의 손을 움켜쥐고 벌린 다리 사이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재희는 강주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창가에 걸터앉아 절 물끄러미 올려 보는 강주가 보였다. 말끔하게 조각된 것 같은 얼굴. 저도 모르게 홀린 것처럼 손을 올리려다가 얼굴 근처에서 멈추고 머뭇거렸다.
강주가 그녀의 손을 잡아채 제 뺨에 올렸다.
“그때처럼 불러 봐요.”
“…네?”
“예전처럼 불러 보라고.”
부탁 같은 명령이 던져졌다. 재희는 손끝을 움츠렸다. 호흡이 가빠 제대로 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처럼 강주 오빠라고 불러 보기라도 하라는 건가.
왜인지 심장이 뛰었다. 두근두근, 조용한 방 안에 제 심장 소리가 거세게 울려 대는 것 같았다.
강주의 입꼬리에 씁쓸함이 걸렸다.
“싫으면 강주 씨라고 해 봐요.”
“…….”
“상무님 말고.”
재희는 손가락을 움츠렸다. 제 손바닥에 닿는 강주의 살갗이 흠 하나 없는 실크처럼 부드럽고도 따뜻했다. 쪽. 손바닥 위에 강주의 입맞춤이 닿았다. 숨을 한 번 들이켠 재희가 머뭇거리며 속삭였다.
“강주 씨.”
“…한 번만 더.”
“강주 씨.”
재희는 목소리 끝이 갈라지지 않으려 애쓰며 어렵게 그를 불렀다.
강주가 그제야 눈으로 웃었다. 눈꼬리를 느른하게 좁히며 미소 짓는다.
“좋아요. 재희 씨가 원하는 그 비밀, 내가 같이 파헤쳐 줄게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과연 내 아버지가 재희 씨 어머니께 무슨 짓을 했는지.”
“네?”
깜짝 놀라 물러서는 재희를, 강주는 꽉 붙들어 끌어당겼다. 날아가는 새를 다시 새장으로 이끌듯 제 다리 위에 억지로 앉히며 이어 속삭인다.
“뭘 그렇게 놀라요, 내게 접근한 이유가 그것 때문 아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