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96)

 #53

 몸을 뒤척거리던 재희가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절 한가득 안고 있는 그의 품이 보였다. 너른 어깨 너머로 푸른 새벽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밤새 몇 번의 절정을 오르고 내렸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에게 갇혀 휘청이고 휘둘리며 두 뺨을 눈물로 적시다 보니 깊은 밤을 지나 지금이 됐다.

 강주는 재희를 손수 씻겨 준 후 커다란 수건으로 폭 덮어 안고 나왔다. 그리고 강보에 싸인 아이를 다독이듯 그녀를 끌어안고는 노곤히 누웠었다.

“…….”

 재희에게서 느릿한 숨이 흘렀다. 온몸이 무기력했다. 녹진녹진하게 녹아서 몸이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하체가 이따금 잘게 떨려 왔다.

 절 해일처럼 덮었던 그의 형형한 눈빛을 기억한다. 산 채로 잡아먹을 것처럼 번뜩거리며 일그러져 있었다. 그 눈으로 마음껏 유린하고 몰아붙였다.

 그에게 안겨 있음에도 등골에 차가운 한기가 돌았다. 오한이 치밀어 이가 닥닥 맞물렸다. 심적으로 치민 냉기였다.

“추워요?”

 등에 부드러운 그의 손길이 닿았다. 어루만지듯 쓸어내리고 다독여 준다. 재희는 고개를 내저었다. 몸을 움직이자 어깨를 덮었던 천이 흘러내려 갔다. 재희는 두 팔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는 품에 파고들었다. 너른 가슴에 뺨을 대자 그의 일정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차강주. 차강주. 한참이나 절 다독여 주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만 있다가 그를 물끄러미 올려 보았다. 우아하게 뻗은 단단한 턱선이 보였다.

“상무님.”

 강주가 고개 내려 재희를 응시했다. 재희는 그의 나른한 눈동자를 향해 흘리듯 속삭였다.

“저택 생각이 나요. 제가 어릴 적에 살던 커다란 집. 상무님과 함께 지냈던 그곳요.”

“…….”

“제 집은 아니었지만, 이따금 떠오를 때가 있어요.”

 그와 함께 공부하던 작은 방. 강주에게는 아픈 기억이겠지만, 그럼에도 둘이 함께여서 설??던 창고 안. 이따금 엄마를 따라 들어갔던 본채. 강주와 함께 앉아 햇볕을 즐기곤 했던 너른 후원.

 그곳에 가서 무어라도 찾고 싶었다. 엄마 사건에 대한 그 어떤 단서라도. 이미 모든 게 지워진 후겠지만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해 봐야겠지.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부드럽게 넘기며 강주가 물었다.

“그리워요?”

“네, 약간요.”

“이번에 가족 여행을 가서 집을 비울 텐데 놀러 갈까요?”

“정말요?”

 재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손바닥에 닿는 매끄러운 피부가 단단하고 따뜻하다. 그를 더듬으며 더욱 달라붙었다. 강주 역시 그녀를 마주 안아 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말을 잇는다.

“내가 말했잖아요. 할 수 있다면 뭐라도 해 주겠다고. 뭐든 말해요. 재희 씨가 원한다면 다 해 줄게요.”

“그런데 가족 여행이라고 하면 강주 씨도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강주가 옅게 웃었다.

“재희 씨, 난 한 번도 그들 가족이었던 적이 없어요.”

 씁쓸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재희를 꽉 껴안아 품에 단단히 가두었다.

 어미에게 파고들듯 그녀의 목덜미에 파고들어 이마를 기대고 뺨을 붙인다. 그녀의 체온을 느끼고 싶은 듯 한참이나 재희의 살갗에 제 뺨을 비비던 그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내 옆에 있어 주었던 사람은 늘 하나뿐이었으니까.”

 14장. 독

 은진은 재희의 질문에 고개를 내저었다.

“일기장이나 그런 거? 없을걸. 그런 거를 어떻게 다 모으니.”

“역시 그렇겠죠?”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재희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재희는 주말을 맞이해 다시 은진을 만났다. 엄마 미령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자신은 모르는 엄마의 과거 이야기도 전해 듣는 중이었다.

 저번에 은진과 만났을 때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화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단어 하나, 이름 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차 회장과 관련된 거라면 특히 더욱.

 사고의 연유도 알아내야 했고, 엄마의 결백도 풀어야 하지 않은가.

 다행히 은진은 수다에 취미가 있었고, 재희는 상대를 살살 꼬셔 말을 풀어내는 데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이제 막 물어본 참이었다. 혹시 엄마가 보육원에 있을 때 썼던 일기장 같은 건 없는지.

 혹여 남아 있다면 차 회장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진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그곳을 거쳐 간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다 모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일기장은 갑자기 왜?”

“그냥 엄마가 어릴 때 어떻게 사셨나 궁금해서요. 지금은 엄마 얘기를 못 들으니까, 글자로라도 짚어 보고 싶었어요.”

 차 회장을 파 보겠다는 목적이 있기는 했으나 지금의 말 역시 사실이었다. 이제는 침묵으로만 마주하는 사이. 엄마가 종이 위에 쓴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어린 시절의 엄마라도 마주하고픈 심정이었다.

“그래도 내가 다시 한번 찾아볼게.”

 딱하다는 듯 혀를 찬 은진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 치곤 말을 이었다.

“그렇지! 편지!”

“편지요?”

 기억해 낸 스스로가 뿌듯한 듯 은진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폈다.

“응, 편지. 미령이가 준 편지 나한테 있을 거야. 그거라도 줄까?”

“그게 아직 남아 있어요?”

“원 나가고 나서 몇 번 보냈어. 내가 편지는 다 모아 놓거든. 아마 창고 어디에 있을 텐데…….”

“주시면 감사하죠!”

 재희는 상체를 쭉 내밀어 은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응, 줄게. 꼭 줄게, 재희야. 마주 웃는 은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는 제 손을 마주 잡아 주는 은진의 온기를 느끼며 고맙단 말을 되풀이했다.

 엄마의 친구인 오은진. 몇 번 만나 보니 좋은 사람에 가까웠다. 오지랖이 넓어 재희의 아픈 속사정을 거리낌 없이 찔렀고 선민의식이 있어 은연중에 재희와 재희의 가족을 무시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무런 사심 없이 친절을 베풀고 싶어 하기도 했다.

 가령 지금처럼 엄마의 편지를 찾아준다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효정의 장학금을 알아봐 주겠다며 먼저 손을 내미는 것처럼.

 자꾸 자식 자랑을 해서 그걸 듣는 게 고역이기는 했지만, 맞불 작전으로 재희 역시 자랑을 했기에 아무렇지 않았다.

‘우리 딸이 이번에 취업했거든. 유화 그룹 갔어. 요새 취업 힘들다고 다들 곡소리 내던데 참 잘했지. 재희 넌 무슨 일 하니?’

‘저는 선강 다녀요, 이제 주임이에요.’

 은진에게는 불행하게도, 선강이 유화 그룹보다 규모가 크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아… 그러니? 우리 아들은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데 덕분에 집에서 다니니 돈도 안 들고 좋더라. 효정이는 어디 기숙사 갔다며? 어디로 간 거야?’

‘효정이는 교대요. 선생님 하면 딱 어울릴 거예요, 워낙 착하고 올바른 애라.’

‘흐음, 잘 갔구나…….’

 그쯤 되자, 은진은 더 자식 자랑을 하지 않았다. 살짝 마음이 상한 것 같았으나 재희가 아무것도 모른 척 방긋방긋 웃자 그녀 역시 다시 호호 웃었다. 쉽게 툭툭 쏘고 쉽게 잊는 그런 타입이었다.

“아무튼, 다음에 만날 땐 내가 편지 꼭 갖고 올게.”

“네, 감사합니다, 이모.”

 재희가 휴대 전화를 내려 봤다. 3시. 이제 돌아가 봐야겠다. 집에 들어가 침대 안에서 굼벵이처럼 주말 오후를 즐기고 싶었다. 은진을 향해 슬슬 작별 인사를 전하려는데 은진이 예측하지 못했던 질문을 건네 왔다.

“그런데 재희 넌 애인이 있다고 했나?”

“네?”

 재희의 심장이 덜컹거렸다. 대충 무마하면 되는데 거짓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바보같이 버벅거리고 말았다.

 뭐라고 하지. 그냥 없다고 하면 되는 건데… 그래도 이모랑 같은 맨션에 사는 이상 상무님이랑 같이 있다가 혹여 마주칠 수도 있는 거고. 그럼 좀 상황이 이상해지잖아. 그렇다고 애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경우 없고. 대가까지 받는 불순한 사이인데 내가 어떻게 상무님을 애인이라고 해.

 당황으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은진은 그런 재희의 속마음도 모르고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우리 딸이 이번에 남자애 하나를 데리고 왔는데, 한의사야. 한의사인데도 아주 싹싹하고 장모님, 장모님 하면서 착 달라붙더라니까? 난 솔직히 성에 차지는 않는데 그래도 사람은 좋으니 인정해 줬지.”

“…….”

“여기서 애인이랑 산다고 했나? 어떤 애야? 응? 이모한테 말해 봐. 별로면 이모가 좋은 사람으로 소개해 줄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재희는 어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 음, 그게…….”

“부끄러워서 그래? 다음엔 꼭 같이 나와. 나도 소개해 줘? 알았지?”

 나왔다, 은진 특유의 오지랖. 재희는 곤혹스러움으로 말을 대충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는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이모.”

“응, 그래그래. 내가 편지 찾아서 꼭 가져올게.”

“네, 감사합니다.”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 바르게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상황을 피하듯 황급히 사라졌다. 재희가 떠난 후, 홀로 남은 은진은 콤팩트를 꺼내 얼굴을 요리조리 돌려 보다가 뚜껑을 탁 닫았다.

“미령이 고건 어떻게 저렇게 딱 부러지는 걸 낳았대? 예쁘고 싹싹하기도 하지. 남자 친구랑 동거만 안 했어도 우리 둘째한테 소개해 주는 건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같이 사는 게 남자 친구가 아닌가? 아니면 소개해 주기 좀 그럴 정도로 늙다리거나 뭔가 하자가 있는 놈인가? 스폰 같은 거?”

 짐짓 심각한 얼굴로 재희의 ‘숨겨진’ 애인에 대해 유추할 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방금까지 재희가 앉아 있던 자리를 아주 자연스럽게 차지하고 처음부터 일행인 것처럼 당당하게.

“누구……?”

 은진이 가방에 화장품을 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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