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96)

 #50

“무슨 소문이라도 들었어요? 그건 신경 쓰지 말아요.”

 재희는 시선만 내려 테이블을 응시했다. 우아한 대리석 문양이 보였다.

‘드디어 이 말이 나왔구나.’

 자신이 절망을 느끼는 상황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강주와 자신은 이런 변명이 필요 없는 사이였는데.

 초조한 얼굴로 소파 가죽만 문지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저……. 괜찮아요, 상무님.”

 애써 올린 웃음이 어색하지 않기를 바라며 재희는 말을 이었다.

“주제넘게 참견할 생각 없어요.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담담한 얼굴로 고백하듯 말했다. 주제넘게. 그런 문장을 말하며 상처받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이 상처마저 본인이 낸 생채기였다. 처음에는 그의 옆에 있고 싶어, 지금은 엄마의 진실을 알고 싶어, 마지막을 알면서도 불을 향해 뛰어든 건 바로 자신이었다.

 그를 탓할 생각도, 이 상황을 원망할 생각도 없었다. 다만, 그와의 마지막이 좀 더 유예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전 정말 상관없어요. 누구를 만나시든 그건 상무님 사생활이니까.”

 강주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얼음물을 흠뻑 뒤집어쓴 듯 차게 식는다. 시선을 내린 재희는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어 중얼거렸다.

“하지만 만약 결혼이라도 하시게 된다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외도 상대가 되고 싶지는 않거든요.”

 다시 고개를 들고 애써 담담함을 유지하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날카롭고 뾰족한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부서져 생채기를 그었다.

 그래, 엄마를 위해 표정을 포장하는 것쯤이야 대수겠어.

“…….”

 딱딱했던 강주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늘 깊고 잔잔했던 눈동자 속에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재희는 저도 모르게 소파에 등을 대며 몸을 물렸다. 연유 없는 긴장감으로 어깨가 흠칫 좁아 들었다. 그저 절 바라보는 것뿐인데 잘못을 추궁당하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의 시선에서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강주가 이를 악물고 짓씹듯 말했다.

“그렇죠. 재희 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니죠. 우리는 섹스 파트너니까.”

“…….”

“그래요, 원한다면 꼭 말해 줄게요.”

 강주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재희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얼 생각하는지 한없이 가라앉은 눈빛은 마치 그녀의 밑바닥까지 긁어내릴 것같이 날카로웠다.

 강주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올렸다. 언뜻 입꼬리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재희 씨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 재희 씨도 내가 원하는 걸 해 줘야겠어요.”

“네? 어떤…….”

 강주는 그대로 소파에 나른히 앉았다. 그리고 포식자처럼 등을 대고는 명령이 깃든 것같이 고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빨아요.”

 재희의 시선이 한 번 흔들렸다.

 그와 밤을 보낸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스스로 그의 섹스 파트너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정말이지 이건 몸뿐인 관계 같지 않은가.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확인받고 나니 새삼 심장이 덜컹 떨어져 내렸다.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재희는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 뗐다. 그에게서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재희 씨가 내 집에 온 이유도 섹스 때문이잖아요.”

“…….”

“싫어요?”

 악의가 차오른 눈동자로 그가 거만하게 물었다.

 강압적인 명령도, 억지로 이끄는 악력도 없었다. 느긋하고 조용한 권유가 그녀를 제 앞으로 잡아끌었을 뿐이다.

 재희는 자리에서 유령처럼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제의에 거절의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두 사람 관계의 민낯이었다. 그의 다정함과 상냥함은, 타오르는 욕망을 얇게 씌운 포장지일 뿐이다. 껍질을 발가벗기면 외설적인 욕구만이 남게 되는.

 재희는 강주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태산같이 자리 잡은 그의 모습은 마치 오만한 독재자 같았다.

 마음은 정했으나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아 그의 단단한 다리만 바라보았다. 그녀의 숙인 턱 아래, 단단한 손이 들어왔다.

 재희의 턱을 당겨 올린 강주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무표정하게 물었다.

“더 기다려 줘요?”

 목소리는 지독히 부드러운데, 마주하는 시선은 타인처럼 낯설었다. 도대체 무어가 저 남자의 눈빛을 저렇게 차갑게 식혔을까. 도대체 왜.

 재희는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상황 역시 모호했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은, 진실을 위해 납작 엎드리고 있는 거다. 이대로 이 관계가 끝이 날까 봐. 공중에 던져진 거미처럼, 거미줄에 매달려 그를 위해 춤을 추려는 것이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흔들흔들 위태롭게 몸을 흔들며, 차마 그 줄을 끊어 낼 수 없어 절박하게 붙들고.

 문득 억울함이 치밀었다.

 그를 향한 마음으로 외사랑을 마음속으로만 곱씹었던 과거가 미웠고, 둘의 관계가 모두 상호 교환에 불과한 이 상황이 씁쓸했다.

‘얼마 주면 안에 그냥 싸게 해 줄 수 있어요?’

 문득 강주가 던졌던 말이 떠올라 재희는 옅게 웃었다.

 그래, 당신 말대로 우리의 섹스가 상호 교환이라면 나도 무얼 받아야겠지. 더없이 상스럽고 속물적인 여자가 되어, 당신 옆에 있을 타당한 이유라도 만들어야지.

 내가 당신 앞에 지금 무릎 꿇은 이유가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의 관계가 사랑이 아니라면. 오롯이 서로의 목적에 의한 거라면.

 재희는 마음속으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단단히 굳어진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올려 보았다.

“예전에 상무님이 그러셨죠. 우리 관계는 상호 교환이니 원하는 게 있으면 무어든 말하라고.”

 빳빳한 그녀의 시선을 강주는 피하지 않았다. 재희는 그의 메마른 시선을 마주하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상무님은 제게 원하는 걸 다 했는데……. 생각해 보니 집세를 탕감받는 것만으로는 제가 밑지는 장사 같아요.”

“…….”

“대가를 주세요.”

 아무렇지 않게 대가를 입에 올렸다.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강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금니를 맞물었는지 그의 우아한 턱선이 다부지게 움직였다가 풀렸다.

 재희는 긴장을 삼켰다. 집요한 그의 시선이 절 집어삼킬 것만 같아 숨이 막혔다. 무슨 대답이라도 던져지면 차라리 나을 텐데. 재희는 그의 답을 기다리는 대신 호기로운 척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상무님께서 결혼하시면 끝인데, 제가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치고 있던 것 같아요.”

 온 힘을 다해 속물이 되었다. 모든 용기와 만용을 짜내고 자기혐오를 감췄다.

 재희의 턱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재희는 침을 꼴깍 삼켰다. 사실 애써 삼킨 건 침이 아니라 긴장과 초조함에 가까웠다.

 그의 일렁이는 눈빛이 재희의 얼굴 위로 진득하게 얽혔다. 오래 머물며 헤집고 훑고 파헤쳤다.

 그러다가 이내 강주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저 입꼬리를 올렸을 뿐인데, 둘 사이를 파고들었던 냉기가 차분히 녹아내렸다.

“좋아요. 뭘 줄까요. 돈?”

 직접적인 문장으로 모멸감을 쏟아붓는 질문이었다. 재희의 목덜미가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예상했던 반응이기는 했으나, 예상했다고 하여 상처받지 않는 건 아니다.

 강주는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소파에 등을 대며 사냥감을 물어뜯기 직전의 포식자처럼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다행이죠. 제게 돈은 많아서. 그래서… 얼마면 만족할 수 있겠어요?”

“돈도 좋기는 한데, 지금 당장은 떠오르는 게 없어요. 앞으로 상무님이 제게 무얼 더 요구하는지, 어디까지 원하는지 보고 제가 차근차근 결정하도록 할게요.”

 담담하게 말을 하면서도 재희는 스스로 당황했다. 이건 진짜 거래 아닌가. 자신은 몸을 주어 그의 기대에 부응하며, 제 손에 떨어질 확실한 대가를 요구하는 거다.

 얼핏 치솟은 오기로 충동적으로 내뱉은 발언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협상 테이블 위에 올라온 협의안처럼 전개되는 지금이 됐다.

 강주가 그녀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뭘 요구할지 궁금해지네요. 재희 씨가 내게 원하는 게 과연 무얼지.”

 그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한 번 쓸고는 말을 이었다.

“좋아요. 재희 씨가 원한다면, 내 힘이 닿는 한 모두 들어줄게요.”

“저도 너무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게요.”

 재희가 당당한 척 고개를 들며 담대히 답했다.

 그래, 이제 돌이킬 수 없다. 기왕 정말 몸을 파는 거래가 된 거라면, 제대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엄마의 진실을 푸는 과정에서 사용하게 될 수도 있으리라.

 방금 ‘그의 곁에 있는’ 행동에 대한 대가가 정해졌다. 그의 요구대로 몸을 주고 그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는 대신 받을 것들.

 대가. 이제 그와 전 섹스 파트너도 아니었다. 이건 몸을 파는 것 아닌가. 그에게 내민 요구는 그녀의 마음을 스스로 뭉개는 바윗돌이었고, 그와 저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완벽한 정의였다.

 강주 머리 위로 화려한 샹들리에가 눈이 멀듯 빛났다. 눈이 부셨다.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흐릿하게 젖어 가려던 눈동자가 다행히 말끔해졌다.

 부디 제 마음이 그에게 닿지 않기를. 태연함으로 가장한 얼굴 뒤 균열을, 그는 모르기를.

 목덜미 뒤로 그의 손이 천천히 들어왔다. 그리고 그 손이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재희는 그의 다리 사이로 억지로 상체를 내렸다. 저항할 수도 없이 자연스럽게.

 숙인 머리 위로 차분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럼 이제 재희 씨 값을 해 봐요.”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오만하게 명령했다.

 재희의 입술에 찬기가 돌았다. 미약한 수치심이 일고 달뜬 초조함이 전신을 내달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다행이었다. 만약 그와 계속 얼굴을 마주했다면 아프도록 깨문 입술이 드러났을 테니까.

 시선 끝에 그의 가운이 보였다. 가운 아래, 커다랗고 묵직하게 자리 잡은 형체가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천천히 천을 걷어 냈다. 반쯤 발기한 성기가 불쑥 모습을 보였다.

 저도 모르게 흠칫 숨을 삼켰다. 그의 것을 안에 집어넣기만 했지, 이토록 적나라하게 가까이 마주한 적은 없었다. 기둥을 감싼 핏줄마저 위험하게 느껴졌다.

 재희는 용기 내어 기둥을 붙들었다. 아직 온전히 발기되지도 않았건만 한 손으로 잡기 버거워 두 손바닥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제 엄지 위로 삐죽 머리를 드러낸 성기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끄트머리에 끈적한 액체가 방울져 있다. 재희는 어찌할 바를 몰라 혀끝으로 입술을 축이다가 수줍게 입술을 벌렸다. 미끌미끌한 것이 입술에 닿았다. 선단을 간신히 물자 귀두가 입천장을 쿡 찔렀다.

 머리 위에서 강주의 억눌린 숨소리가 들렸다. 흥분이 밴 뜨거운 호흡.

 재희는 왠지 배 속이 근지러워 기둥을 쥔 손을 바르작거리다가 고개를 슬쩍 물렸다. 붉은 입술 틈으로 성기가 빠져나왔다.

 초조한 한숨이 샜다. 귀두를 채 물지도 못했었는데 턱이 묘하게 뻐근하고 불편했다. 이대로 하는 게 맞는 걸까.

‘어쩌지.’

 재희는 그의 것을 붙든 채 고민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행동에 주저가 생겼다.

“맛만 보고 끝낸 거예요?”

 재희는 창백한 얼굴로 입술만 잘근 물었다. 강주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재희의 뺨을 두드렸다.

“다시 제대로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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