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유선은 잔을 꽉 쥐었다. 순간 눈 아래가 일그러졌지만 이내 숨겼다.
이어 커피를 두 모금 정도 더 넘긴 유선이 깔끔하게 잔을 내렸다. 그리고 스카프를 두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 속에 반쯤 남은 커피처럼 마음속에 반쯤 미련을 깐 채 가방을 든다.
“그래요,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이해해 주어 고맙습니다.”
유선은 절 문밖으로 에스코트하는 강주를 빤히 올려 보았다. 뼈대 단단한 강주의 손이 사무실 문을 직접 열어 그녀를 밖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매너 좋게 올라온 근사한 미소는 덤이었다.
저리 친절한 얼굴을 해서는 이토록 딱 자른 퇴장 종용이라니. 유선은 그가 연 문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절 향해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강주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아까 그러셨죠? 유 관장님 얼굴을 봐서 차 한잔 정도는 대접해 줄 수 있다고. 또 커피 마시러 올게요. 다음에 뵙죠.”
아무렇지 않게 다음을 기약한 후 유선은 자리를 떠났다.
“…….”
강주는 돌아선 유선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의식적으로 올렸던 미소는 어느새 깔끔히 지워진 뒤였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문 옆 공간에 앉아 있던 비서가 괜히 눈을 피했다. 상무님과 저 부용 그룹 사람이라는 여자의 관계가 궁금해 훔쳐보다가 시선을 정통으로 들켜 버렸다.
강주의 시선이 비서의 책상 쪽으로 끌려 내려갔다. 쿠키 박스가 있었다. 유선이 사무실 안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것과 같은.
이미 하나 꺼내 먹었는지 찻잔 받침대 위에 쿠키 포장지가 나뒹굴고 있다. 강주는 구겨진 포장지를 빤히 바라보다가 비서를 불렀다.
“최 과장님. 제 허락 없이 외부인을 들이셨네요.”
“그게, 유 관장님께서 직접 전화하셔서 어쩔 수 없-”
“그러면 제 어머니의 비서를 하시지 왜 여기 계십니까?”
“…….”
최 비서는 눈동자만 굴려 강주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으로 입술만 달싹인다. 늘 감정의 동요를 잘 보이지 않던 상무님이 절 대놓고 비꼬며 불쾌한 심중을 비추고 있었다.
최 비서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아, 실수했구나. 늘 젠틀하고 매너 있던 강주였기에, 긴장을 놓은 게 큰 화근이었다. 저렇게 차가운 표정을 짓는 사람인데, 그걸 잊고.
“아, 저, 죄송합니다. 그게-”
“후임 구하세요. 보직 변경을 하든, 새로 사람을 뽑든 최대한 빨리.”
변명을 나열하려던 최 비서의 말을 자르고 강주는 뒤를 돌았다. 깜짝 놀란 최 비서가 벌떡 일어났다.
“상무님?”
강주가 고개만 돌려 힘주어 말했다.
“인수인계 확실히 해요. 지금 최 과장 자리는 제 직속 비서예요. 노선 똑바로 잡을 사람으로 앉혀요.”
쿵. 뒤이어 문이 무겁게 닫혔다. 최 비서는 꽉 닫힌 문을 응시하다가 손톱을 잘근 씹었다.
“아……. 망했다.”
유 관장님, 상무님 어머니의 부탁이라 아무 생각 없이 손님을 안내한 건데. 그녀의 입에서 탄식 같은 숨이 흘렀다.
차강주 상무. 늘 매너 있게 행동하고 임원임에도 거들먹거리지 않아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되는 최고의 상사였다. 그런 상사를 보필하던 꿀 보직을, 지금 제 발로 뻥 차 버린 셈이 된 것이다.
한편, 유선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목 안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강주가 절 냉랭하고 야멸차게 밀어냈지만 그리 상처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대쪽 같은 면에 더 끌릴 정도였다. 매력적이지 않은가. 여기저기 개새끼처럼 꼬리 흔들며 껄떡거리는 타입보다 훨씬. 무릇 가지기 힘든 보석을 손에 쥐었을 때 더욱 성취감이 드는 법이다.
“잘생기긴 잘생겼네.”
방금 봤던 강주를 떠올리며 유선은 어깨를 으쓱였다. 왠지 웃음이 흘렀다.
***
퇴근 후, 귀가하는 차 안. 강주는 영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벨 소리가 울리자 영현이 기다렸다는 듯 받았다.
-강주니? 오늘 어땠어? 유선이랑 저녁은 같이 먹었어?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 뒤로 유선이랑 통화를 못 했는데. 괜찮았니?
전화를 건 것은 강주인데, 영현에게서 질문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강주는 대답할 새도 없이 튀어나오는 모친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다가 틈이 생기자 그제야 천천히 대답했다.
“저녁은 같이 먹지 않았고, 괜찮지도 않았습니다.”
-응? 왜? 저녁에 별다른 일정 없지 않았어?
강주는 신호등 앞에 차를 세우며 운전대를 툭툭 두드렸다. 스케줄이 없다는 정보는 아마 제 비서가 흘렸을 터. 일이 꽤 귀찮아지게 생겼다. 마음에도 없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거니와…….
신호가 바뀌자 강주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저 만나는 사람 있어요.”
-응? 뭐라고?
“만나는 사람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어머, 정말이니? 누구니? 혹시 네 아빠가 이번에 들이민 사람이야?
엄만 그 애들 마음에 안 들어, 영현이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 회장이 강주에게 들이미는 이들에게 제대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강주의 짝을 향한 영현의 기준치가 퍽 높은 것 같았다.
강주는 명확한 답을 회피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나중에 소개할게요.”
-나중에? 언제? 왜 지금은 아니고? 혹시 진지한 관계는 아니란 뜻이니?
“진지해요.”
강주는 고민 없이 답했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듯 말을 쉬는 영현을 향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치 그녀를 달래 안심시키듯 다정한 목소리로.
“걱정하지 마세요. 준비되면 가장 먼저 어머니께 소개해 드릴게요.”
-…엄마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네.”
영현이 전화 너머로 속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강주의 발언이 그저 이 상황을 넘기기 위한 핑계인지 무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부디 제대로 된 상대여야 할 텐데.
강주를 어릴 때부터 직접 챙겨 주지 못했던 탓에 영현은 늘 강주를 향한 채무감을 안고 있었다. 좋은 부인을 얻어 주고자 발을 동동 구르는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자신이 주지 못했던 사랑과 애정을, 누군가에게라도 오롯이 받기를 바라며.
“어쨌든, 앞으로도 오늘 같은 일은 없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
-그래, 알았어. 그래도 한 번만 더 만나 보면…….
“저 이제 주차장 들어가요. 통화 상태가 안 좋네요. 다음에 전화할게요.”
아직 대로변을 달리며, 강주는 영현의 말을 잘랐다.
***
재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뜨거운 물에 몸부터 씻었다. 제 방 욕실로 뛰어들어 가 뽀얀 물안개 속에 몸을 묻고 한숨을 힘겹게 내쉬었다.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어떻게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사내 메신저로 들었던 낯선 소식이 근무 시간 내내 속을 헤집어 놨었다.
‘들었어? 부용 그룹 딸이 상무님 사무실 드나든다는데?’
소문은 바람처럼 빨랐다. 낮에 강주의 사무실을 방문했던 ‘정유선’이란 이름은 벌써 사내 메신저를 거세게 들었다 놓았었다. 혼기가 찬 재벌가 집안끼리의 만남. 뻔하지 않은가. 이렇게 상대 회사까지 대놓고 드나들 정도면 이미 어느 정도 둘 사이에 진전이 있다는 뜻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젊고 잘생긴 상무. 능력 있는 재벌가 후계자. 외적으로나 배경적으로나 차강주라는 사람은 가십에 휘말리기에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누구나 흥미로워하고 누구나 한 번쯤 소문에 귀를 기울여 볼 만한.
물론 메신저를 휩쓴 소문을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무료한 근무 시간을 보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호들갑을 떨었을 뿐.
다만, 그 가벼운 소문이 누군가를 바윗덩어리보다 무겁게 짓눌렀다는 게 문제였다. 윤재희. 그녀에게는 몹시도 무섭고 두려운 소문으로 다가온 것이다.
“하아…….”
재희는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닦으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녹진하게 풀린 몸을 수건으로 감싼 채 밖으로 나왔다.
커다란 침대에 푹 누웠다. 최근 강주가 새로 사 준 침대로, 푹신하고 편안했지만 누워 본 적은 몇 번 없었다. 그녀의 밤은 늘 강주의 침대 위에서 지나갔기에.
멍하니 침대 천을 쓸었다. 부드럽고도 서늘한 기운이 감겼다.
“꼭 상무님 같네.”
부드럽고도 차가운. 다정하면서도 서늘한.
아까부터 마음에 구멍이라도 난 것 같았다. 뻥 뚫린 공간에 차가운 현실이 파고들어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잠시 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강주가 온 모양이다. 재희는 그제야 일어나 잠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강주는 보이지 않았다. 씻는 듯했다.
‘밥을 먹자고 해야 하나. 밥을 먹었냐고 물어야 하나.’
그 정유선이란 분이랑 식사라도 하고 들어온 건 아닐까.
거실에 오도카니 앉아, 현실적인 고민을 했다. 늘 겪어 온 저녁인데 오늘따라 낯설었다. 그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척 담담하고 싶었는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마음 같지가 않았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주방도 한 번, 테이블에 올라온 책을 만지작거리며 어둠 내린 바깥 창도 한 번, 불안하게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그러다가 이윽고 강주가 나오자 허리를 쫙 펴고 긴장한 모습으로 앉았다. 강주는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며 말을 건넸다.
“이제 재희 씨랑 손잡고 사이좋게 지하철을 타고 와야 하나 생각 중이에요.”
“왜요?”
“늘 재희 씨가 먼저 도착하는 거 보니까, 억울해서.”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강주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사람 엄청 많아서 힘드실걸요.”
“재희 씨는 매일 하잖아요.”
“저야 뭐 익숙하니까…….”
지하철을 탈 수 있는 사람, 지하철을 탈 수 없는 사람.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게 퍽 우스웠지만, 재희 입장에서 강주는 절대 지하철을 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하철 한 칸을 통째로 샀으면 샀지.
시답잖은 대화를 하면서도 재희는 어색하게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를 마주하는 지금이 불안하고 두려웠다. 일상적이고도 당연하게 누리는 지금의 행복이 이대로 끝이 날까 두려워 초조해졌다.
강주가 언젠가 이곳에서 절 쫓아낸다면, 자신은 미련 없이 떠나야만 했다. 그것이 그와 저의 관계였다. 마땅한 순리이자 암묵적인 약속.
온몸을 던질 기세로 접근했으나 알아낸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에 대한 진실도, 차 회장과 관련된 과거도. 아직은 알게 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강주는, 말이 없어진 재희를 응시했다. 물 잔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꼬리를 좁힌다. 재희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뻔히 보였다. 분명 무슨 소문이라도 들은 게 확실했다.
그가 재희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