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활짝 웃고 있는 단발머리 여성의 사진이었다.
재희의 흔들리는 시선이 흰 종이 위에 닿았다. 이름, 나이, 학력 등등이 마치 이력서처럼 적혀 있었다.
‘…아.’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그게 무언지 대번 알아차렸다. 흔히 드라마에서 나오지 않나. 재벌가 후계자에게 밀려드는 혼처들. 그녀들을 만나기 전 서류 심사처럼 올라오는 상세 프로필.
헛웃음이 흘렀다. 그래, 이게 현실이었다. 아주 차갑고도 당연한 현실. 그간 외면하고 고개 돌렸던.
새삼스럽게 놀랄 게 뭐 있어.
그래, 이건 완벽한 상호 교환이었다. 그의 집에 들어왔던 첫날, 그가 말하지 않았나.
‘서로가 원하는 걸 주고받는 상호 교환이라고 생각해요.’
그 말이 딱 맞았다. 그는 제 몸을 원했고 자신은 차 회장과 엄마 사이에 얽혀 있는 비밀을 파헤치길 바랐다. 차 회장과의 유일한 연결 고리가 바로 차강주였으니까.
완벽한 상호 교환. 강주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 재희는 씁쓸히 웃으며 봉투에서 손을 떨어뜨렸다.
강주는 삐죽 나온 맞선 상대 사진을 발견하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서류를 쓰레기통에 처박고 온 강주가 재희 옆에 앉았다.
“오해하지 말아요. 이건.”
설명하기 힘든지 그의 말과 말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황급히 그를 끌어안는 재희의 행동이 먼저였다.
“기석 씨 갔으니까 다시 안아 주세요.”
“…….”
“서류에 손댄 건 죄송해요. 이제 그러지 않을게요.”
그에게 매달려 딱딱히 뺨을 비볐다.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올 그 어떤 단어도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맞선.
집안에서 정해 준 약혼녀.
정해진 결혼.
그런 날카로운 말을 마주하기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직 엄마의 일도 캐내지 못했잖아. 그리 자기 합리화하며 그에게 무너지듯 기댔다. 아직 상처를 방어할 무엇도 걸치지 못했는데. 이대로 발가벗겨져 잔인한 현실 속으로 던져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강주는 갑작스러운 재희의 접근에 굳어 있다가, 그녀가 안아 달라며 흐느끼듯 속삭이자 천천히 그녀를 마주 안았다. 작은 몸을 힘껏 안아 꼭 가둔다.
“재희 씨는 정말 알 수가 없어요.”
눈가에 닿는 키스와 함께 그의 속삭임이 흐트러졌다.
재희는 감정을 애써 삼켰다. 그가 절 모르듯, 재희 역시 본인을 알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마음인지. 그를 향한 마음이 과연 무언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함이라고 스스로 마음을 포장하고 있으나, 사람을 이토록 절박하게 매달리게 하는 당신은 과연 무언지.
그의 힘에 눌려 몸이 천천히 넘어갔다. 맞붙은 입술은 따뜻했고 허리 아래 들어온 손은 뜨거웠다.
체중을 실어 절 덮치듯 올라탄 강주를 올려 보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차마 그를 마주할 수가 없었다. 출렁이는 표정을 보이면 제 속마음이 들킬까 봐.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감정을 숨겼다.
지금은 눈을 감을 시간이었다. 모든 것에서 시선을 돌리고.
13장. 네가 원하는 것
정유선은 엘리베이터 안내 창을 올려 보았다. 21층, 22층. 딱딱하게 박힌 붉은 숫자가 모양을 달리했다.
미끄러지듯 올라온 엘리베이터는 곧 22층 앞에서 멈췄다. 띵, 하고 문이 열렸다. 유선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유선아, 강주가 아직 뭘 몰라. 도통 결혼에 관심이 없다니까? 이럴 땐 점찍은 사람이 먼저 움직여야 하는 거야. 내가 미리 말해 놓을 테니까 찾아가 볼래? 다섯 시가 좋겠다. 저녁도 같이 먹게.’
유선은, 어제 통화했던 영현과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강주의 모친 영현이 유선에게 러브 콜을 보낸 건 벌써 몇 달 전 일이었다. 일전에 해외에서 만나 친분을 쌓은 뒤로 연락을 이어 가던 어느 날. 영현이 은근슬쩍 유선을 떠보았던 것이다.
‘유선아, 우리 강주 어때? 한번 만나 보면…….’
‘어머, 강주 씨야 너무 매력적인 사람이죠, 관장님.’
유선은 영현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기뻐했다.
차강주. 그간 탐냈던 상대였다. 파티장에서 이따금 마주치고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친분을 쌓고 싶었으나 번번이 실패했었다. 차강주, 그는 친절하고 다정한 남자였으나 타인과 묘하게 벽을 쌓는 분위기라 쉬이 다가서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선강 그룹이라는 후광을 떼고 본다 해도 근사한 사람이었다. 여유로운 미소나 몸에 밴 매너, 당당한 태도가 매력적이라 저절로 이목을 끄는.
딸을 가진 사모라면 누구나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쓰다듬었다. 그런 사람의 모친이 절 마음에 들어 한다니. 영현이, 혼담 얘기를 먼저 꺼내 왔을 때 유선은 마구 환호하고 싶은 기분을 애써 눌러 참아야만 했다.
하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 같던 일은 난관에 닥쳤다. 차강주 본인이 결혼에 영 무심했기 때문이다. 결혼이 무언가. 형식적인 맞선조차 늘 퇴짜를 놓았다. 영현이 몇 번이고 밀어붙였지만 늘 고개만 저으며.
바쁘다는 핑계로, 아직 때가 아니라는 명분으로, 관심 없다는 상투적인 말로. 늘, 다음에, 다음에.
그렇게 되자 결국 유선이 먼저 칼을 빼 들었다. 작정하고 이렇게 직접 찾아오기까지 한 것이다.
또각또각 구두 굽을 울리며 다가서자, 상무실 앞을 문지기처럼 지키고 있는 비서가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부용 그룹 정유선입니다. 유 관장님께 미리 언질받으셨죠?”
부용 그룹 정유선. 배경과 이름만으로 주어지는 프리 패스. 유선은 비서를 향해 여유로운 태도로 쿠키 박스를 건넸다.
“드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유선은 빙긋 웃고는 비서 책상을 지나쳐 사무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커튼을 걷은 사무실 안. 환한 햇살이 쏟아졌다.
“안녕하세요. 정유선이에요.”
강주는 창가에 비스듬히 앉아 모친 영현과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영현은, 유선이 방문할 테니 엄마 얼굴을 봐서라도 부디 상냥하게 상대하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전화 너머로 유선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연거푸 당부했다.
-유선이 벌써 왔니? 매너 있게, 상냥하게. 알았지? 엄마, 믿을게.
“…….”
전화를 든 채 강주는 개인 사무실 입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안으로 당당히 걸어오는 유선이 보였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휴대 전화를 내려 보는 낯 위로 얼핏 짜증이 스쳤다. 하지만 다시 고개 들어 유선을 마주했을 땐 꾸민 것처럼 매끈한 미소가 올라온 뒤였다.
“안녕하세요. 차강주입니다. 갑자기 찾아오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손짓으로 유선을 앉힌 뒤 강주는 그녀의 맞은편이 아닌 제 데스크 앞에 앉았다. 쿠키 박스를 내려놓으며 유선이 소파에 편히 앉았다. 강주가 대놓고 보이는 거리감을 무시하는 듯 표정은 여전히 당당했다.
“제가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불편하신 건 아니죠?”
“불편합니다.”
강주가 웃는 얼굴로 칼같이 답했다. 유선은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아무렇지 않게 마주 웃었다.
“생각보다 직설적이시네요.”
“빙빙 돌려 말하면 피차 피곤해지지 않겠습니까.”
턱을 괸 강주가 유선을 빤히 응시했다. 매너 좋게 띤 미소는 아직 그린 듯 배어 있었다.
유선은 다리를 꼬고 아예 소파에 등을 붙여 편히 앉았다. 직구로 꽂히는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나갈 생각 역시 없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온 건 제 의지예요. 집안에서 등 떠밀어 온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니 너무 경계하지 마세요.”
“유감이네요. 전 지금 제 어머니의 의지로 유선 씨를 상대하고 있는데.”
“유 관장님이 아니었으면 지금 절 상대하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강주는 대답 대신 미소를 되돌렸다. 긍정을 뜻하는 것이었다. 다리를 반대로 꼰 유선에게서 직설적이면서도 귀염성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좀 봐주세요, 강주 씨. 사실 예전부터 강주 씨에게 호감이 있었어요. 이렇게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라도 친해지고 싶을 정도로.”
“…….”
“전 가지고 싶은 건 꼭 가져야 하거든요.”
그녀가 가진 당당한 태도의 근원은 자신감이었다. 탄탄한 배경과 나무랄 데 없는 외모.
눈앞의 차강주가 ‘아직 결혼에 관심이 없다’라는 핑계로 철벽을 딱딱 세워도, 남자인 이상 별수 없다. 게이가 아니고서야 결국에는 넘어오고야 말 것이다. 어차피 해야 할 결혼, 자신처럼 완벽한 조건을 가진 상대가 어디 있겠는가.
강주가 들고 있던 만년필을 툭 내려놓았다. 유선을 빤히 바라본다.
“…….”
유선은 순간 긴장감에 손바닥을 비볐다. 미소가 깔끔히 사라진 그의 낯이 사뭇 냉랭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강주가 다시 의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의 긴장 역시 풀렸다.
“유선 씨에게는 관계가 늘 일방통행인가 보군요.”
커피 머신 앞에 선 그가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커피? 그의 저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커피.
원두 갈리는 소리 뒤로 짙은 커피 향이 사무실 안을 채웠다. 곧 잔 두 개를 들고 온 강주가 유선 앞에 잔 하나를 놓더니 맞은편에 앉았다.
둘은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커피 내음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잠깐의 침묵을 뚫고 강주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차 한잔 정도는 대접해 드릴 수 있습니다. 어머니 얼굴도 있으니.”
잔을 밀어 옮긴 강주가 소파에 등을 댔다. 턱을 괸 채 유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사뭇 냉랭하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
직설적으로 거절이 던져졌다. 이 커피를 다 마시면 나가라는 차가운 퇴장 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