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96)

 #47

 물을 잠그고 우두커니 섰다. 똑, 똑.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얼굴을 차갑게 두드린다.

 수증기에 휩싸인 채 재희는 결심했다. 차강주. 그가 제 몸을 원해 이곳에 들어오게 된 이상, 이 몸으로 그를 이용하여 어떻게든 진실에 가까워지겠노라고.

 내 엄마의 명예를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 몸을 던져서라도.

 머리를 말린 후 밖으로 나오자 강주가 보였다. 소파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선 재희가 그의 옆에 공기처럼 앉았다.

 늘 입던 반팔 티에 잠옷 바지가 아닌 깊게 파인 실크 슬립 차림이었다. 천 아래, 풍만한 가슴과 부드러운 허리 곡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몸을 매끄럽게 감은 천 위로 가슴 정점이 은밀하게 드러나 있다.

 강주가 서류를 보던 그대로 팔만 올려 재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언제 왔어요?”

 뒤늦게 고개를 돌리며 묻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달콤하기만 하다. 재희는 그의 시선을 피해 무릎을 응시하며 답했다.

“아까 상무님 씻으실 때요.”

“내 옆에는 웬일이에요?”

 귓가에 입을 맞추며 그가 물었다. 그가 들고 있던 서류는 이미 테이블 위로 내팽개쳐진 채였다. 촉촉하게 닿는 입술이 부드럽다.

“웬일이라니, 그게 무슨…….”

“한동안 나 피했잖아요.”

 귓가를 빨아 당기는 입술이 마치 그녀를 부드럽게 타박하는 듯했다. 재희는 그 감촉에 어깨를 떨었다. 작정하고 차려입은 슬립이 얇아 그런지 몸에 한기가 돌았다.

 그의 서늘한 손바닥이 슬립 아래로 은밀히 들어왔다. 긴장으로 굳은 허벅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랑한 안쪽 살을 느릿하게 훑었다. 커다란 손이 살갗을 쓸어내릴 때마다 야릇한 소름이 돋았다.

 재희는 신음을 흘리며 턱을 살짝 젖혔다. 단지 그와 살짝 맞닿았을 뿐인데. 불씨가 당겨진 것처럼 열기가 도는 제 몸이 야하게만 느껴졌다.

 그가 하얗게 뻗은 재희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작정하고 유혹하니 장단은 맞춰 주겠는데…….”

 커다란 손이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아!”

 깜짝 놀란 재희에게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강주는 언제 우악스레 가슴을 움켜잡았냐는 듯, 동그랗게 솟은 살덩이를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 손길에, 속옷도 입지 않은 젖가슴 위로 실크 천이 살짝살짝 스쳤다. 야릇한 감각으로 숨이 가빠진다.

“재희 씨가 이렇게 나오면 난 물을 수도 없어져요. 왜 이러는 건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으응…….”

“넌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그가 짓씹듯 읊조렸다.

 목덜미에 꽃잎처럼 닿던 입맞춤이 느릿하게 내려와 어깨를 훑는다. 매끄러운 선의 동그란 어깨를 깨물고 혀끝으로 핥았다.

“재희 씨는 알고 있죠? 재희 씨가 이런 식으로 다가오면 내가 절대 거부하지 못한다는 거.”

 가슴을 주무르던 강주가 실크 천 아래 젖꼭지를 엄지로 꽉 눌렀다.

“읏!”

 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약한 통증과 야릇한 쾌감이 인다. 꽉 눌렀던 유두가 다시 볼록 솟아나자 그는 그것을 슬금슬금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

 유륜 주변으로 간질간질한 쾌감이 번졌다. 젖꼭지를 돌리고 자극할 때마다 숨길 수 없이 달뜬 신음이 튀어나왔다. 허리가 움찔거리고 아랫배에 열기가 고인다.

 그의 품 안에서 늘어지는 스스로에게 웃음이 났다. 노골적인 차림새를 하고는 그를 유혹하려 했는데, 도리어 그에게 휘둘리는 건 본인 같았다. 그의 손길 하나에, 귓가에 감기는 목소리 하나에 무너지며 신음하는 자신이 있었다.

‘진실을 파헤치기 위함이니 뭐니 해도 몸을 판다는 건 같잖아.’

 그와 마음이 통해 몸을 섞는 게 아니었다. 그의 욕구에 부응해 몸을 파는 거였다. 그의 욕망에 편승하여, 잠시라도 그의 곁에 있고 싶은 제 탐욕을 채우는 것에 불과했다.

 단지, 몸뿐인 관계. 그렇기에 더욱 죄책감 없이 그를 이용할 수 있는.

 재희의 어깨에 입을 맞추던 강주가 재희의 팔을 들어 올려 제 목에 휘감았다. 그리고 절 끌어안는 그녀의 몸을 안아 천천히 소파 위로 눕혔다. 수줍게 닫힌 다리를 벌리고 그녀의 안쪽으로 들어선다.

 재희의 목덜미에서만 맴돌던 입술이 물길처럼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흐트러진 어깨끈을 쥐어 슬며시 끌어 내렸다. 재희의 몸 선을 따라, 실크 슬립이 부드럽게 끌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풍만한 가슴 곡선을 타고 천천히 내려가던 슬립 끄트머리가 젖꼭지에 툭 걸리는 순간.

 똑. 똑. 똑.

 거실 너머로 낯선 소음이 끼어들었다. 누군가 찾아온 것이다.

 벨 소리를 죽여 놓았다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문을 두드린 것 같았다.

 재희는 지레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강주가 그녀의 가슴팍을 누르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상무님, 누가 온 것 같은데.”

“신경 쓰지 말아요.”

“그래도, 앗.”

 재희의 허리를 가득 끌어안고, 강주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상무님, 전해 드릴 게 있습니다.

 차 회장의 충실한 심복이자 경호원인 권기석의 목소리였다.

 이번에는 강주 역시 행동을 멈췄다. 기석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상,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기석의 모든 움직임은 모든 게 차 회장의 의지와 맞닿아 있었다. 기석이 ‘전해 드릴 게 있다’며 대답 없는 안을 향해 말을 건다는 건, 이미 강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강주의 얼굴에 짜증이 배었다.

“후우…….”

 그는 재희에게 묻었던 상체를 일으키며 까칠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현관에 다가섰다.

 문을 벌컥 열자 역시 예상대로 권기석이 서 있었다. 허리를 꾸벅 숙인 기석이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전해 주라 하셨습니다.”

 강주는 봉투를 받아 현관에 기대어 느슨히 섰다. 곧 기석에게 늦은 인사가 던져졌다.

“오래간만입니다.”

“네, 상무님. 잘 지내셨습니까.”

“회사에서 전해 주어도 됐을 텐데요. 이렇게 불시에 찾아오시면 불쾌합니다.”

 강주가 정갈한 갈색 봉투를 들여다보며 심드렁히 말했다. 기석은 웃는 낯으로 목을 한 번 더 숙였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상무님.”

 기석이 강주의 본사 사무실로 찾아갔던 것이 몇 번이던가. 방문 목적을 알기에 절 들이지 않는 사무실 앞에 서서, 비서에게 서류를 건네주기만 했다. 물론 비서는 강주에게 서류를 전달해 주지 못했다. 기석이 준 서류라는 말을 듣자마자, 강주가 버리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기어코 그가 집에 있는 이 시간에 집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기석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허리를 꾸벅 숙인 후 뒤돌았다.

 강주가 다시 돌아오자 소파는 텅 비어 있었다.

“재희 씨.”

 강주는 서류 봉투를 대충 던져 놓고는 재희를 찾았다. 그제야 거실과 맞닿은 방문이 빼꼼 열렸다.

“기석 씨는 가셨나요?”

“갔어요, 왜 거기 들어가 있어요?”

“혹시나 기석 씨가 들어오기라도 할까 봐. 오해받으면 곤란해지잖아요.”

 재희는 애써 해명했다.

 이 시간에 남자 집에 와 있는 여자. 뻔하지 않은가. 같이 산다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사이인지 의심을 받을 게 뻔했다. 기석이 차 회장의 측근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이런 가벼운 관계를 들키게 되면 강주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눈치껏 숨은 것이었다. 혹여 무슨 일이 있을까 봐 평소에 입던 잠옷으로 갈아입기까지 하며.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재희는 괜히 이것저것을 물었다. 강주의 심기가 묘하게 불편해 보였다.

“이 시간에 올 정도면,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었나 봐요.”

“권 실장을 알아요? 목소리만 들렸을 텐데.”

 질문에 답 대신 반문이 돌아왔다.

“네, 알아요. 예전에 자주 만났었어요.”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권 실장은 강주가 해외로 출국할 때 즈음 온 사람이었다. 재벌가 식구가 아닌 사용인들은 서로 알음알음 안면을 트고 있었다.

 기석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저 쾌활한 청년이었는데, 시간이 흐르자 진중함이 가득한 사내가 됐다. 몇 년 전, 경호 실장이 되었으나 어릴 때부터 기석 씨라 불렀던 탓에 아직 재희의 입에 그 호칭이 달라붙지는 않았다.

 강주는 턱을 괴고 재희를 응시했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얇은 티셔츠와 잠옷 바지. 아까의 열기는 온데간데없이 순수하게 빛나는 두 뺨만 남았다.

“재희 씨가 곤란할 게 뭐가 있어요. 권 실장에게 오해받으면 곤란한 일이라도 있어요?”

“네?”

“권 실장은 왜 기석 씨인가요? 실장이라는 멋진 직함이 있는데.”

“…아…….”

“재희 씨 직함 부르는 거 좋아하잖아요. 상무님, 그런 거.”

 목소리에 은근히 날이 서 있다. 재희는 난데없는 말에 머쓱하게 뺨만 만지작거렸다. 아까의 그 섹스를 방해받아 기분이 좋지 않은 건가. 아까부터 그의 말투가 은근히 까칠했다.

 강주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소파에 등을 댔다. 스스로가 한심스러운지 작은 한숨을 내뱉는다.

 재희는 시선을 테이블에 뒀다. 분위기가 묘하게 어색했다.

 테이블 위에 흐트러진 서류 봉투가 보였다. 강주가 대충 집어 던진 탓에, 갈색 봉투에서 내용물이 삐져나와 있었다. 재희는 주섬주섬 서류를 챙기기 시작했다. 불편한 사이에 아무 말이나 하듯, 이 불편한 자리를 불필요한 행동으로 채우기 위함이었다.

 소파 등받이에 뒤통수를 대고, 얼굴을 쓸어내리며 강주가 나른하게 말했다.

“손대지 말아요.”

“…죄송해요.”

 재희는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급히 손을 치웠다. 고개가 절로 수그러들었다. 머쓱함과 이유 모를 서운함으로 속이 조여들었다.

 내가 그의 개인적인 서류를 만질 정도는 아닌데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 손을 댔다가…….

 마치 그때 같다.

‘재희야, 우리가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잖아.’

 다가서려던 절 밀어내고 냉정하게 벽을 긋던 그때의 강주 오빠. 그를 다시 마주한 것만 같아 가슴속에 찬물이 흘렀다. 몸 좀 섞는 사이가 됐다고 주제 모르고. 이렇게 다가서려 하면 밀쳐진다는 거 이미 알고 있었잖아. 새삼 상처받아 무얼 해.

 황급히 종이를 내려놓는데 틈 사이로 사진 하나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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