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테라스에 들어선 그는 아직 멀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재희부터 찾아온 것 같았다. 큰 방과 이어진 테라스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그녀를.
“오셨어요?”
재희는 어색하게 그를 향해 인사했다.
강주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어쩐지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제야 손에 쥐고 있던 차 키를 테이블 위로 툭 던져 올렸다.
“집에 먼저 간다던 사람이 보이지 않아 걱정했어요.”
“제가 갈 데가 어디 있어요. 상무님 집이 지금은 제 집인데.”
재희는 빙긋 웃고는 의자에 발을 올려 쪼그리듯 앉았다. 맨발에 스미는 공기가 차가웠다.
“재희 씨가 내 차를 타고 왔으면 제가 이렇게 찾아 헤매는 일도 없었을 텐데요.”
“퇴근 시간에는 오히려 지하철이 빨라요. 보세요, 제가 훨씬 일찍 도착한 거.”
재희는 웃으며 가볍게 답했다.
그와 함께 살게 됐지만, 출근과 퇴근은 각자 하고 있었다. 강주는 늘 자신의 차를 타고 함께 출퇴근하자고 말했지만, 어찌 그러겠는가. 아무리 비밀스럽게 움직인다 한들 같은 일상이 반복되다 보면 누군가에게 발각될 게 뻔하다.
상무님의 차를 타고 매일 출퇴근하는 사원. 아마 호사가의 입방아에 오르겠지. 말도 안 되는 소문에 휩싸일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김 과장을 성희롱으로 신고할 때 강주를 한 번 써먹은 이상, 불미스러운 일에 그를 연루시키는 건 금물이었다. 그럼 자신은 정말 강주에게 ‘다리를 벌린’ 사람이 되는 거니까.
‘그런데 그 말이 맞기는 하네.’
재희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 과장의 말에 아니라며 수치스러워하기는 했지만, 사실 비슷하기는 했다. 자신이 강주와 자는 사이인 건 확실했으니. 물론 그 대가로 무얼 받는 건 아니었지만.
재희는 물끄러미 한강 반대편을 응시했다. 불빛을 담은 아파트가 보였다.
‘저기가 얼마라고 했더라.’
요새 집값에 관심이 많은 임선민 대리가 이것저것을 알려 주기는 했는데 다 한 귀로 흘려보냈었다.
평생 벌어도 닿을 수 없는 가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질 수 없는 건 제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공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운 좋게 이곳에 기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 있는 타일 조각 하나조차 제 것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곳을 언젠가 떠나가게 되리라 생각해도 아쉬움은 없었다. 애초에 내 건 없었는걸.
‘하지만…….’
재희는 강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지만 저 사람에게는 몹시 탐이 났지.’
탐낼 수 없는 그가 탐이 났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안을 수 있었다. 다가간다면 아마 안아 주겠지. 커다랗고 따뜻한 품에 파고들면 머리를 쓰다듬어 줄는지도 모른다. 최근의 차강주는, 그런 다정한 남자였으니까. 마치 진심으로 연인이 된 사이가 된 듯.
그래서 자꾸 욕심이 생겼다. 그에게 손을 뻗으면 결국 그를 가질 수 있으리라, 하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이 치밀었다.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
“상무님도 무언가를 갖고 싶어 안달했던 적이 있어요?”
모든 걸 다 갖고 태어난 남자에게, 당연한 질문을 했다. 상무님은 그런 마음 모르겠죠? 갖고 싶은 걸 가지지 못해 애타는 마음을, 당신은 알까요. 마음속으로 그리 덧묻는다.
강주는 재희를 빤히 응시하다가 이내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있어요.”
“…있어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가 느리게 웃었다.
“있어요, 내게 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더 미치겠는 거. 있어요.”
“아…….”
재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도로를 가로지르는 클랙슨 소리가 멀리서 환영처럼 밀려든다.
재희는 차가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한참이나 앉아 있다가 의자에서 발을 내렸다. 눈앞의 강주처럼 당당히 허리를 펴고 어깨를 폈다. 그리고 며칠이나 속에서만 썩던 질문을 꺼냈다.
“상무님, 저희 엄마를 좋아했다고 하셨죠. 그래서 가끔 보러 가셨다고.”
“맞아요.”
“엄마를 보러 갔던 건, 단지 그 이유 때문인가요?”
재벌 3세가 가정부에게 정을 주면 얼마나 주었겠는가.
재희는 가만히 강주의 표정을 주시했다.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프기 시작했다. 보육원 출신 엄마. 어릴 때부터 차 회장과 알고 지냈던 엄마. 며칠 전, 병실로 엄마를 찾아왔던 차 회장.
도대체 왜.
엄마의 사고 이후, 괘씸해서 씩씩대던 그 차 회장이 어째서 엄마를 찾아와 절실하게 마주했던 건지.
그리고 강주의 출국 전에 갑자기 일어난 엄마의 사고. 엄마를 자주 찾아갔다던 차강주.
치열하게 얽힌 줄기가 꼬이고 엉켜 속을 조였다. 탐이 나고 욕심이 나는 강주가. 연인으로 대해 주는 것같이, 모호하게 다정한 저 남자가, 어느 순간 몹시 낯설어졌다.
혹시 상무님은 엄마의 사고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나요.
설마.
혹시.
강주는 재희의 의중을 파악하듯 잠시 답을 쉬었다. 그러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올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어요. 다만.”
그가 잠시 말을 쉬었다. 재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음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강주는 말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바람이 차갑네요.”
덧붙인 이유 같은 건 없었다. 키를 주머니에 처박듯 넣는 강주를, 재희는 오도카니 바라만 봤다. 뒤따라 일어서지 않는 그녀를 향해 강주가 손을 뻗었다.
“이만 들어가죠.”
재희는 그 손을 마주 잡지 않았다.
“먼저 가세요. 전 좀 더 있다가 갈게요. …그리고 오늘은 제 방에서 자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강주는 눈을 살짝 가느다랗게 뜨며 재희의 표정을 훑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안녕히 주무세요.”
“추운데 오래 있지 말고 들어와요.”
그가 마지막 말과 함께 뒤돌았다.
재희는 황량해진 테이블 앞에 앉아 텅 빈 그의 자리를 응시했다. 심장이 자르르했다. 절 바라보던 그의 메마른 눈빛이 떠올라서.
어쩌면, 그가 엄마의 사고에 연관된 건 아닐까 하는 두려운 의문이 치솟았기에.
차 회장과 엄마 사이에 숨겨진 진실은 무얼까. 혹여 상무님은 무언가를 알고 있을까. 차 회장과 상무님은 도대체 왜 엄마를 찾아갔던 걸까.
만약, 차 회장이 엄마 사고와 정말 맞닿아 있다면, 난…….
***
차 회장을 의심하고, 풀리지 않는 의혹을 품고 있다 보니 자꾸 태도가 딱딱해졌다. 강주 앞에서도 멍하니 정신을 놓기 일쑤였다.
아픈 내 엄마. 불쌍한 내 엄마가, 어쩌면.
도둑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해명 하나 하지 못한 채 무의식의 세계로 떠나 버린 엄마. 한번 생각이 물꼬를 트자 의문이 댐을 터뜨린 강줄기처럼 터져 나왔다. 일상을 휩쓸어 버렸다. 엄마 일 아닌가. 일상이 어려워지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재희 씨, 내 말 듣고 있어요?”
그녀의 맞은편에서 강주가 물었다. 돌아온 주말. 재희는 강주와 함께 늦은 아침 식사 중이었다. 그녀가 집에서 밥을 먹는 게 좋다고 한 뒤로는 늘 있던 일.
멍하니 집었던 반찬 하나가, 재희 젓가락 아래로 툭 떨어졌다.
“네? 뭐라고 하셨죠?”
“오늘 점심 약속이 있어서 나간다고 말했어요.”
재희는 다시 멈춘 젓가락질을 시작하며 꿈결처럼 답했다.
“아, 그러세요.”
“저녁 전에는 들어올 테니 저녁은 같이 먹죠.”
“저녁에는 제가 약속이 있어요.”
최근 그와의 약속이나 잠자리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바였다. 저녁에는 일부러 일을 만들어 늦게 퇴근했고 늘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와의 밤을 회피했다. 강주를 마주하면 필연적으로 차 회장과 엄마가 떠올랐기에.
자신의 태도 때문일까. 최근 강주의 심기가 가라앉아 있다는 걸 알아차렸으나 어쩔 수 없었다. 제 마음속에서 풍랑이 요동치고 있었으니.
탁. 강주가 마시던 물 잔을 차갑게 내려놨다.
“진짜 약속이 있는 겁니까, 아니면 없는 약속을 애써 만들어 낸 겁니까.”
“…….”
재희는 허를 찔린 듯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를 피하느라 늘 억지로 만들었던 일정을 눈치챈 모양이다. 하기야 그렇게 티를 냈으니 눈치 빠른 저 사람이 알아차리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의 약속은 억지로 꾸민 게 아니었다. 모친 미령의 친구인 오은진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은진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물을 생각이었다. 엄마와 차 회장이 무슨 관계였는지. 진실을 향해 어떻게든 다가가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 약속을 말할 수 없는 건. 혹시나 강주가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기라도 할까 봐. 아주 작은 틈도, 실수도 용납되어서는 안 됐다. 아니라고는 생각하나 그를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재희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진짜 약속이 있는 거예요.”
강주는 재희의 속을 파헤칠 듯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다 거짓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이내 식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싱크대에 접시를 텅, 박아 넣는 강주를 향해 재희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최근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재희 씨 역할이 뭔데요.”
강주가 주방 냅킨에 손을 문지르며 뒤돌았다. 놀랄 만큼 냉랭한 얼굴이 드러났다. 재희는 괜히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와 함께하고 싶어 들어온 주제에, 그를 일방적이고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다가 이대로 저 남자에게 내쳐질까 두렵기까지 했다. 가진 적도 없는 그를, 잃기 무서워 초조해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와 자신 사이에 이런 복잡한 감정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재희 본인은 그의 섹스 파트너에 불과한 입장이었으니.
네 역할이 뭐냐는 그의 물음을 향해, 재희는 씁쓸히 진실을 읊조렸다.
“상무님 섹스 파트너요.”
“…….”
대리석 상판을 쥔 그가 답 없이 재희를 빤히 바라만 봤다. 툭. 툭. 대리석 상판을 쥔 손이 느릿하게 그것을 두드렸다. 그 작은 소음과 침묵만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