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혹시 제게 말씀하신 건가요?”
“아니, 아니에요. 제 어릴 적 친구랑 너무 닮아서 저도 모르게. 미안해요. 실례했어요.”
중년 여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차분한 색감의 반지르르한 코트. 주름 하나 없는 바지와 발목을 우아하게 덮은 부츠. 한눈에 보아도 부잣집 사모님이다. 곱고 부티가 나는.
돌아서려는 그녀를 재희의 목소리가 붙들었다.
“저, 실례지만 혹시 그 어릴 적 친구분 성함이 강미령인가요?”
“맞아요, 강씨. 강미령.”
“아…….”
재희의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그녀가 난생처음 만나는 엄마의 지인이었다.
재희와 여인은 커뮤니티 센터 테이블에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둘은 방금 통성명과 적당한 자기소개를 끝낸 참이었다. 여자의 이름은 오은진으로 엄마의 오래전 친구라 했고, 미령과 소식이 끊겨 궁금하던 차에 미령을 닮은 재희를 보고 저도 모르게 놀라 이름을 부른 것이라 말했다.
은진이 화려한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미령이 딸이구나?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네가 갓난아기였을 때 한 번 본 적 있는데.”
재희는 “그런가요?” 하고 저 역시 어색하게 웃었다.
“미령이랑 정말 닮았다. 딸이니까 당연한 거겠지?”
“저도 많이 닮긴 했는데 저보다는 동생이 더 닮았어요.”
“그러니?”
“네, 엄마 젊을 때 사진을 본 적 있는데 동생이랑 똑같이 생겨서 신기해했거든요. 꼭 쌍둥이처럼.”
효정이를 제외하고 누군가와 엄마 얘기를 하는 건 오래간만이었다.
엄마에게 친구가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고아로 자란 엄마는, 가족도 친구도 없이 늘 혼자였다고 했는데. 아빠를 만나 새 삶을 찾았다고, 언젠가 말했던 적이 있다. 두 딸을 낳아 온전한 내 가족이 생겼다며. 유일하고도 값진 보물들이라며.
절 안고 속삭여 주던 엄마의 품이 생각나, 재희는 괜히 코끝을 훌쩍였다. 그래도 엄마한테 친구라는 사람이 있기는 있었나 보다. 보육원에서 컸으니 혹시 거기서 만난 친구일까.
제 어린 시절에는 강주가 있었듯, 엄마에게는 저분이 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괜히 반가웠다.
“여기 사는 거니?”
“…네.”
재희가 어렴풋하게 답했다. 자신의 집은 아니지만 우선 이곳에 사는 건 사실이었다.
“가족이랑 사는 거야? 미령이도 여기 있어?”
“…음, 아뇨.”
“아, 그렇지. 재희 넌 이제 결혼할 나이지?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
“아뇨, 아직 결혼 안 했어요.”
“어머, 그럼 혼자 사는 거야? 혼자 살기엔 좀 크지 않나? 하기야 클수록 좋지. 나도 좁은 데는 답답해서 못 살아.”
“혼자 사는 건 아니에요.”
재희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은진에게 남아 있는 엄마의 젊은 시절을 찾듯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그럼, 친구랑 사는구나?”
“친구도 아니고…….”
“아아, 그럼 결혼할 사람이랑? 요샌 없는 일도 아니지.”
이해한다는 듯 은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젊은 애들이 다 그렇지, 뭐.
재희는 어떻게 답할까 하다가 그냥 답을 쉬었다. 상황을 딱 잘라 설명하기가 곤란했다. 회사 상사의 섹스 파트너 겸 룸메이트로 들어왔다? 그와 섹스도 하고, 그가 이따금 힘들어할 때 위로해 주고 싶어서?
재희 역시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가 제안했기에 받아들였을 뿐이다. 잠시나마 함께하고 싶어 그 손을 주저 없이 붙들었었다.
재희의 대답을 무어라 파악한 걸까. 은진은 어렴풋이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절 반짝반짝 바라보는 재희의 순수한 눈망울을 묘한 얼굴로 응시했다.
“미령이는 잘 지내니? 언젠가부터 소식이 끊겨서 궁금했는데.”
“아프세요, 입원 중이시고요.”
“어머, 얼마나 아픈데?”
“몇 년 전부터 의식이 없어요.”
재희는 담담히 말했다. 괜히 제 슬픔을 드러내 위로받고 싶지도, 엄마를 동정받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엄만 아픈 거지 불쌍한 게 아니니까.
은진이 어머 이를 어째, 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어쩌다가 다쳤어, 어쩌다 그렇게까지.”
“그냥 사고가 좀 있었어요.”
“남편 죽고 집 망해서 차병준 씨네 가정부로 들어갔다는 소식까지는 내가 들었는데.”
“…….”
“아휴, 딱해라. 어릴 때 인연으로 병준 씨가 거두어 줘서 숨통 좀 트나 했는데……. 운이 안 좋았네.”
재희의 표정이 순간 그대로 굳었다.
차병준. 은진의 입에서 예고 없이 차 회장의 이름이 나왔다.
차병준. 차병준.
아까부터 제 마음속에서 이유 없이 달칵달칵 걸리는 이름이었다. 한데 이런 식으로 다시 드러날 줄이야. 어릴 때 인연이라? 그게 무슨 소리일까. 엄마와 차 회장님이 원래 알던 사이란 얘기일까.
그러고 보니 그랬지. 차 회장이 빚을 갚아 주고 가정부로 집에 들여 주었다고. 아빠와 개인적으로 알던 사이라 그랬으리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엄마와 아는 사이였다니.
숨이 가빠졌다.
조각난 퍼즐 조각이 제 머리 위로 와르르 떨어져 내린 기분이다. 맞춰 보려 애쓰지만, 밑그림조차 그릴 수 없어 조각난 잔해만 붙들고 혼란스러워만 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재희를 향해, 은진이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어쩌지, 재희야? 나는 이제 들어가 봐야겠는데.”
“아, 네. 들어가 보세요. 저는 조금 더 있다가 갈게요.”
“그래, 너도 여기 사니까 가끔 만날 수 있겠네.”
“네.”
은진이 가방을 뒤져 명함 하나를 건넸다. 빳빳한 갈색 종이 윙에 금박 글씨가 박혀 있었다.
“연락해, 재희야. 이모가 맛있는 밥 사 줄게. 알았지?”
재희는 여전히 수면 아래 잠긴 표정으로 명함을 가만히 내려 보았다. 정갈하게 새겨져 있는 몇 글자. 그레이스 나눔 재단 이사장, 오은진.
나눔 재단. 뭘 하는 곳인 걸까.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글자를 더듬던 재희가 은진을 향해 뒤늦은 질문을 보냈다.
“그런데 엄마와는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은진의 입꼬리가 빙긋 올라갔다.
“나? 네 엄마, 미령이가 있던 보육원 원장 딸.”
12장. 눈을 감고
시은은 제 맞은편에 앉은 오빠 강주를 보며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회사 근처로 강주를 찾아온 참이었다.
강주가 점심 약속이 있다며 돌려 거절했지만 굴하지 않고 사무실까지 쳐들어가 기어코 끌어내고야 말았다. 그렇게 밀어붙이지 않는 이상 오빠 강주는 먼저 만나자는 말을 절대 꺼내지 않을 테니까.
다 마신 커피 잔을 밀어내고 시은이 말했다.
“…그래서 아빠가 저녁 같이 먹자고 하던데.”
“못 가.”
시은은 입을 삐죽였다. 또. 또 싫단다. 저렇게 친절하고 상냥한 얼굴로 하는 말이라고는 늘 ‘싫어.’ ‘못 가.’ ‘안 돼.’뿐. 그래도 피가 섞였는데, 살가운 오누이 사이는 되지 못하더라도 저렇게까지 타인 대하듯 하지는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시은이 맞은편 강주를 향해 테이블 위로 상체를 늘였다.
“그거 알지? 아빠 요새 강경한 거. 오빠가 들은 척도 안 하니까, 직접 사무실로 내려가시겠다고 하던데.”
“알아, 기석 씨가 사진 들고 자꾸 사무실로 오던데.”
강주가 픽 웃으며 답했다.
예전에도 그렇긴 했는데 요새 들어 차 회장의 성화가 더욱 심해졌다. 강주의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다.
눈이 벌게져서는 경호원을 통해 여러 사진을 보내왔다. 소위 말하는 맞선 상대 사진들. 상대의 상세 프로필 파일철과 함께 끼워진 사진은, 사무실 서랍 어딘가에 깊게 처박혀 있었다. 물론 강주는 열어도 보지 않았다.
맞선 같은 것 보지 않는다고, 아직 관심 없다고 강주는 누누이 말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래 보았자 통할 리가. 차 회장은 본디 그런 사람이었다.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에는 어떤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밀어붙이는. 이번에는 도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서.
아무래도 모친 영현이 좋은 혼처를 손수 물어 오려 하자 위기감을 느낀 게 분명했다. 차 회장 본인 선에서 적당히 휘두르고 주무르기 좋은 상대를 강주에게 붙여 주어야 했으니.
그래서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주식 승계 전까지는 적당히 몸을 사리고 있다가, 때가 되면 선강 그룹에서 발을 뺄 생각이라 더욱 그랬다.
“저번에 엄마도 엄청나게 바람 넣었잖아. 안 그래도 이번에 정 아저씨네 결혼식 다녀와서 더 그런가 봐.”
“그래.”
“이젠 나한테까지 만나는 남자 없냐고 묻더라? 있으면 억지로 헤어지게 할 기세 같았어.”
“만나는 남자 있어?”
강주가 짧게 질문했다. 대화 화제를 적당히 시은에게 돌리기 위함이었다. 시은은 아, 하고 목 안을 울리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눈치로 보아 무언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부모님께 말하기는 힘들고 오빠에게는 설명하기 힘든 애매한 사람이. 하지만 깊게 파기 귀찮아 강주는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시은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아빠 작정했더라고. 그중 한 명한테 꽂힌 것 같던데……. 전 경찰청장 딸인데, 그쪽도 오빠한테 관심이 아주 많다더라. 근데 뭐 오빠한테 관심 있는 게 한둘인가.”
강주는 답 없이 그저 미소 지었다.
그의 껍질 두른 다정함을 마주하며 시은은 애써 말을 늘어놓았다. 강주와 저 사이에 끊긴 고리를 어떻게 이어 보기 위해 애를 쓰며.
***
재희는 테라스 테이블에 앉아 새까맣게 물든 한강을 응시했다. 봄이 왔다고는 하지만 아직 바람이 차갑다. 휘날리는 숄로 어깨를 단단히 싸맨 후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머릿속은 엉켜 있고 마음은 복잡한데 한강은 유유자적 곱게도 흘렀다. 며칠 전, 엄마를 찾아온 차 회장을 본 이후로 쭉 이 상태였다. 엄마의 친구라던 오은진을 만난 뒤로는 더욱 심해졌다.
풀리지 않는 실타래가 가슴속에 엉켜 있는 것 같았다. 초조함이 치미는데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어 더욱 숨이 막혔다.
차가운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내쉬는데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었어요?”
차분한 강주의 목소리가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