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11장. 비밀
주말을 맞이해 기숙사에서 올라온 효정과 만났다.
이 주 만에 만난 효정과 둘이 손을 꼭 잡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작은 술집에서 술잔을 부딪쳤다.
“내 새끼, 언제 이렇게 컸지? 언니랑 술상 겸상도 하고?”
“나 이제 다 컸어.”
“응, 진짜 다 컸다, 내 새끼.”
“이제 언니 더 고생 안 해도 돼. 내 뒷바라지한다고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
재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동생 효정을 훑었다. 효정은 씨익 웃더니 테이블 위 재희의 잔에 제 잔을 짠 갖다 댔다.
“언니, 새로 구한 집은 어때?”
“아, 새로운 집.”
그러고 보니 효정이에게 제대로 말을 하지 않았다. 강주의 집에 들어간 경위도. 그의 집에 함께 사는 이 상황도. 어쩌면 많이 당황할지도 모르는데. 효정의 앞에서는 여자이기 이전에 늘 엄마이자 언니 역할이었기에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강주는 효정이 원할 땐 언제든 집에 데리고 와도 좋다 했고, 불편하면 다른 집을 구해 준다고도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언제까지 이 일을 숨길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적당히 상황이 넘어갔다. 꼬치를 먹던 효정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재희에게 말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나 언니가 새로 구한 집으로 못 가.”
“왜?”
“희영이네서 자기로 해서. 내일이 희영이 생일이라. 미안.”
“괜찮아, 그러면 다음에 와.”
그땐 제대로 얘기해 줄게. 비밀 하나 없이 모든 상황을 다.
둘은 그 이후로도 맥주를 한 병 더 마셨다. 둘 다 뺨이 기분 좋게 달아올랐다. 술자리를 끝낸 후. 재희는 효정이를 희영이네 집까지 바래다준 후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강주가 홀로 있을 커다랗고 차가운 집으로.
혹시 자고 있을까. 잠을 깨우면 미안한데.
벌써 1시가 넘었다. 재희는 조심조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취기에 젖은 걸음이 휘청휘청 흔들린다. 어그러지는 시선 속에 이리저리 은은하게 퍼지는 조명 빛이 보였다.
그녀의 부재 시, 강주의 집은 늘 채도 낮은 조명으로 가득했다. 강주가 집 안의 불을 끄는 경우는, 재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 없었다.
재희는 온 힘을 다해 씻었다. 취한 시선 속에, 물줄기가 휙휙 어그러졌다. 간신히 씻고는 젖은 머리를 대충 꾹꾹 말린 후 술이 깨지 않은 얼굴로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강주가 침대맡에 등을 대고 앉아 책을 보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좀 술이 깼어요? 내 인사도 못 듣더니.”
강주가 고갯짓으로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목소리에 옅은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재희는 그의 몸 위에 드리운 조명 빛을 응시했다. 멋스럽게 짜인 근육 사이로 은은한 빛이 켜켜이 박혀 있었다. 그는 잘 때 오늘처럼 상체를 탈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평소에도 질리도록 본 몸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야릇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술 때문인가.
재희는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강주의 셔츠를 들었다. 그러고는 무릎으로 그에게 기어가 다짜고짜 그에게 티셔츠를 쑥 밀어 넣었다. 취기가 준 커다란 용기였다. 제정신으로는 결코 하지 못할.
“…뭡니까.”
강주가 답지 않게 당황하여 물었다. 재희가 풀어진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춥게 입고 자면 감기 걸려요. 맨날 벗고 자고.”
보는 사람 가슴 떨리게.
강주는 어이없다는 픽 웃더니 셔츠를 챙겨 입기 시작했다. 술꾼이 하는 말을 우선은 들어준다는 뜻 같았다.
사실 그에게 옷을 입힌 건 걱정보다 제 마음 문제가 컸다. 그대로 저 단단한 몸에 안기고 싶어 져서. 취기에 기대어 사랑을 속삭일까 봐. 그러다가 결국 다시 예전처럼 내쳐질까 봐, 그게 무서워서.
한 번 넘어진 경험은 사람을 위축시킨다. 달리기 선 앞에 서서 차마 달리지 못하고 제자리만 빙글빙글 돌게 되는 것이다. 또 넘어질까 두려워.
재희는 강주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뼈대가 곧고 단단한 그의 손이 보였다. 그와 살을 섞는 사이가 됐지만, 손을 잡는 건 어쩐지 조심스럽다.
“기억나요? 아주 어릴 적에는 뭘 몰라서 상무님 손을 막 잡고 그랬잖아요, 제가.”
“…….”
강주의 시선이 재희의 얼굴에 천천히 달라붙었다. 재희의 혼잣말이 이어 속삭여졌다.
“그때는 상무님이 아니라 오빠였는데. …강주 오빠.”
강주의 눈빛이 한 번 내려앉았다.
재희는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강주의 손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그러다 이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다시 온 그녀 손에 뜨개 장갑이 쥐여 있었다.
“이거 효정이가 직접 만든 거래요. 입학 때까지 시간이 남는다고 언니 생각해서 만들었다고. 그런데 처음 만들다 보니까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렸대요. 그래서 이제야 준 거 있죠? 내년에 잘 끼라는데, 너무 귀엽지 않아요?”
재희는 주정하듯 주절거렸다. 그리고 강주의 손에 선물 받은 작은 장갑을 억지로 욱여넣었다. 강주는 재희를 가만히 바라만 봤다. 그러다가 낑낑대는 재희에게서 장갑을 빼앗아 그녀의 손에 천천히 끼워 넣었다.
“억지로 벌리면 천 상해요.”
“상무님이 다 벗으니까. 추워 보여서……. 손이라도 따뜻하시라고…….”
어이없다는 듯 웃은 강주가 손목에 달린 방울을 툭 건드렸다.
“장갑 예쁘네요.”
“그죠? 제가 지금까지 받은 선물 중에 가장 좋아요.”
재희는 장갑 낀 손을 쥐었다가 펴며 가느다랗게 웃었다. 이내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그런데요, 상무님.”
“네.”
“그때, 제 선물 왜 안 받았어요?”
“…….”
학창 시절. 해외로 떠나는 그에게 마지막 생일 선물을 건넸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용기 내 건넸던 선물을 왜 외면했었는지. 선물이 싸구려라 그런 건지, 아니면 내 마음을 받기 싫어 그랬던 건지.
한 번 그에게 밀쳐졌기 때문일지 모른다. 지금의 행복조차 불안하고 겁이 났다. 다시 밀려날까 두려워. 다가서면 다시 거부당할까 봐. 내가 가만히 있으면, 당신이 이렇게 몸이라도 원한다며 다가올 텐데.
술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엄마 생각 때문일까. 어쩌면 효정이가 준 선물이 감동스러워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왜. 왜 이렇게 마음이 아린 걸까.
뺨 위로 눈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졌다.
알고 싶어. 당신이 원하는 건 정말 내 몸뿐인지. 내가 마음을 표현한다면 당신은 날 다시 밀쳐낼 건지. 진실이 무서워서 이 평화를 차마 깨뜨릴 수가 없어.
강주는 왜 선물을 받지 않았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 젖은 얼굴을 향해 잠잠히 물었을 뿐이다.
“왜 울어요?”
“모르겠어요.”
“…….”
“정말 모르겠어요.”
절 가만히 들여다보는 강주의 눈을, 그녀는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
엄마도 불쌍하고, 하나뿐인 내 동생이 다 커서 곁을 떠나는 것도 슬프고. 언니가 되어 변변한 것 하나 못 해 주는데 고맙다며 이런 거 선물하는 것도 마음 아프고. 이렇게 호화로운 장소에서 복에 겨워 하소연이나 하는 스스로 죄책감이 들었다.
강주는 장갑 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얇은 줄기가 휘듯, 재희가 그에게 넘어지며 기댔다. 젖은 눈가에 강주의 따뜻한 입술이 닿는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없어요.”
강주는 그녀의 뺨 아래에도 입술을 눌렀다. 다정한 입맞춤이 이어지다가 입술에까지 살짝 닿았다. 재희의 장갑을 벗겨 낸 강주가 깍지 끼며 손을 잡았다. 둘의 손가락이 얽히고 맞붙었다.
술기운에 열이 오르는 걸까. 재희는, 그와 닿은 손이 타는 것같이 뜨겁게 느껴졌다.
“난 장갑 말고 재희 씨 손을 잡는 게 좋아요.”
그녀의 입술에 두어 번 키스한 그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었다. 재희가 방금 억지로 입혀 주었던. 강주는 재희가 입은 잠옷마저 쥐더니 아이의 옷을 벗기듯 쉽게 벗겨 버렸다.
“아……!”
엉겁결에 브래지어 차림이 된 재희가 놀라 가슴을 가렸다. 강주는 재희의 손을 잡아 내리며 그녀를 당겨 안았다. 따뜻하고 단단한 그의 몸이 닿아 온다. 갑작스러운 온기에 소름이 돋아 왔다.
“재희 씨랑 이렇게 살 맞대는 것도 좋고.”
그가 그녀의 어깨에 입술을 내리며 속삭였다. 재희는 가슴골을 다시 가렸다. 이미 볼 것 다 본 사이지만, 그에게 절 훤히 드러낼 때마다 창피함이 인다.
어깨 위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부끄러움을 마주할 때마다 강주는 이따금 귀엽다는 듯 이렇게 웃고는 했다.
“재희 씨는 뭘 좋아해요?”
“아, 저는, 저는…….”
제 팔뚝을 핥고 살짝 깨무는 강주의 행동이 아찔하게 다가왔다. 재희는 날아갈 것 같은 정신에 제대로 된 대꾸를 하지 못했다. 술에 젖은 몸이 그의 입술로 쉽게 녹아 버렸다.
강주가 그녀의 브래지어 이음새를 매만지며 물었다.
“생일 선물로 뭘 받고 싶어요?”
“선물요? 갑자기 왜…….”
“이제 곧 재희 씨 생일이니까.”
재희는 어깨를 움츠리며 흠칫 떨었다. 훅을 손끝으로만 더듬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허리를 비틀자 브래지어 안에 꽉 찬 살덩이가 출렁 흔들렸다. 강주가 고개 숙여 그녀의 윗가슴을 물었다. 무른 살갗 위에 이가 박히자 그녀의 입술이 아, 하고 열렸다.
“아……. 아파요.”
재희는 제 가슴 위에 매달린 그를 내려 보았다. 단단하게 펼쳐진 단단한 어깨. 보기 좋게 자리 잡은 등 근육을 본다.
젖은 소리와 함께 살갗이 아프도록 빨리자 곧 붉은 자국이 새겨졌다. 아릿하게 새겨진 그의 각인. 재희는 그가 만든 울혈 자국을 문질렀다. 상처에 가까운 자리에서 찌릿찌릿 아찔한 통각이 일었다.
“생일 선물……. 저는……. 제가 생일 선물로 원하는 건……. 저도 어리광 부려 보고 싶어요.”
“…….”
“선물은 필요 없어요……. 상무님이 그냥 절 꽉 안아 줬으면 좋겠어요…….”
재희가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어리광처럼 가물가물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