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96)

 #38

 얼마 뒤. 김 과장의 징계 위원회가 열렸다. 녹취 증거가 확실하고, 참고인으로 나선 임 대리의 증언이 명확한 덕에 일은 수월했다. 우발적인 실수라는 그의 힘없는 반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직과 보직 해임이 뒤따랐다. 아마, 선강 그룹에서의 김 과장의 승진은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무방할 처사였다.

 보직 해임이 끝난 뒤에는 근무지 이전 발령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아마 정 팀장처럼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컸다.

 결국, 김 과장은 스스로 사표를 제출했다. 임 대리를 위시한 팀원들의 눈초리. 이미 상무에게 찍혀 버린 제 위치. 여러 사안이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뒤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김 과장은 흠칫 어깨를 움츠리며 주위를 살폈다. 누가 내 욕을 하는 건 아닐까. 그 치욕스러운 일을 속닥거리는 건 아닐까. 제게 하는 말이 아닌데도 트라우마가 된 것 같았다.

 아마 다른 곳으로 이직한다고 하더라도, 타 기업 인사부에서 오는 전화를 받고 김 과장의 업무를 좋게 말해 줄 리는 없으리라. 강주가 엮인 이상 당연한 사실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는 떠났다.

 잘 지내라는 인사 하나 없이 힘없이 짐을 싸 그대로 사무실을 나섰다. 팀원 그 누구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고, 그 역시 당당하게 작별 인사를 외치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패잔병처럼 다리를 끌며 퇴장했을 뿐.

 초라하고 지저분한 마무리였다.

 10장. 생각하지 말아요

 재희는 의례 행사처럼 피임약을 먹고 물을 마셨다. 꿀꺽, 목 뒤로 넘어가는 알약의 부피감을 느끼며 생각에 잠긴다. 피임약을 먹기 시작한 건 약 석 달 전.

 피임을 위해 먹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강주와 보낸 밤 말고는 임신을 걱정할 그 무엇도 그녀에게는 없었으니까.

 생리 불순으로 산부인과에 찾아가자 약을 처방해 주어 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덕분에, 강주와의 그 밤. 그가 안쪽에 파정했으나 초조하지는 않았다. 이것도 운이라면 운이라고 해야 할지.

 약을 다 삼킨 재희는 등 돌려 풀 죽은 얼굴로 다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좁다란 반지하 집에 커다란 가방 두 개가 놓였다. 그 안에 드라이기며 옷이며 욱여넣으며 재희가 울 것처럼 속삭였다.

“서운해.”

“서운하긴 뭐가. 이제 곰팡이랑 안녕이니 좋아해야지, 언니.”

 재희를 향한 효정의 타박이 뒤따랐다.

 재희는 효정의 짐을 싸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효정은 지방 교대에 합격했는데 필연적으로 기숙사에 들어가게 됐다. 홀로 남게 된 재희는 효정이가 기숙사에 들어간 김에 이 집을 정리하여 다른 곳으로 이사하기로 한 참이었다.

 이제 효정이 없으니, 방이 두 개 있는 곳이 필요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밝은 데로 집 구해. 알았지? 골목 없는 곳.”

“응, 알겠어.”

“경찰도 많이 다니고, 가로등도 잘 켜진 데. 꼭 그런 데로 가, 언니. 알았지?”

“그래.”

 민철과의 소동이 있었던 골목을 지날 때마다 흠칫 몸이 떨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겸사겸사 집을 옮기기로 한 것이다. 내 새끼 효정이가 잘 커서 입학한 건 참 기쁜 일인데.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어 헤어지게 된다니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서운하고 아쉬워 견딜 수가 없다.

“내가 방 구하러 같이 안 가 줘도 돼?”

“괜찮아, 바쁜데 언니 혼자 갈게.”

“원룸으로 구해. 나 이제 방 필요 없으니까. 대신 좁아진 만큼 더 좋은 데로.”

“알겠어.”

“얼굴 펴고, 언니.”

“응.”

 이제 다 자란 동생이 언니 재희의 뺨을 매만지며 위로했다. 재희는 애써 고개를 들어 마주 웃었다. 품 안의 새끼가 떠나는 것만 같아 몹시 서운했다.

 그래도 훨훨 날아가렴, 효정아. 날개 활짝 펴고 훨훨.

 ***

 아, 불편하다. 그것도 몹시 불편하다.

 재희는 강주를 힐끔 훔쳐보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원룸을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그들 옆에 선 부동산 중개업자가 홀로 떠들기 시작했다.

“창문 큰 거 보이시죠? 채광이 아주 좋아요. 곰팡이도 걱정하셨죠? 여긴 곰팡이 걱정 없습니다. 창문 활짝 열고 살면 곰팡이도 안 피고, 환기하기도 좋아요.”

 중개업자가 두툼한 입술을 달싹이며 창문을 열었다. 곰팡이 걱정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재희가 부동산에 들어섰을 때부터 ‘곰팡이가 없어야 해요!’라고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살던 반지하 방은 비가 올 때마다 창문 틈으로 빗물이 줄줄 샜다. 경계를 조금만 풀면 벽지 여기저기에 곰팡이가 꽃처럼 피어났는데, 그걸 닦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이제 곰팡이라면 진절머리가 났다.

 재희는 안을 슬슬 구경했다. 구경할 건 별거 없었다. 현관을 잇는 부엌 하나, 그와 맞닿은 거실 겸 방이 전부였으니. 그래도 창문이 커다래서 퍽 마음에 들었다.

‘여기로 할까.’

 그녀는 지금 부동산을 돌며 여러 원룸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효정이 기숙사로 떠난 이후 본격적으로 집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문제가 하나 생겼다. 차강주, 그가 따라와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것.

“앞이 도로인데 시끄럽지 않겠습니까.”

 강주의 질문에 부동산 중개업자가 씩 웃으며 창문을 훅 닫았다.

“아, 문만 닫으면 도로 소음은 들리지 않습니다. 전혀 문제 되지 않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다 창문 닫고 살더라고요.”

 창문을 닫자 집이 적막에 싸였다. 강주는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창문을 열고 살면 곰팡이가 안 생긴다. 한데 도로는 시끄러우니 창문은 닫아라.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

 부동산 중개업자의 뺨이 실룩였다. 아까부터 따라와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그를 확 쫓아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분명 저 아가씨는 이 방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남자 친구로 보이는 사람이 따라와 훼방만 놓는 꼴이 퍽 껄끄러웠다.

 먼저 보여 준 방은, 번화가라 취객 때문에 시끄러울 것이라며 반대. 그 전에 보여 준 방은, 들어오는 골목이 외져 밤에 위험할 것이라며 반대. 솔직히 모두 맞는 말이라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원래 그런 건 적당히 포장하고 감춘 후 장점만 나열해야 집이 나가는 건데.

 마음 같아서야 호되게 한 소리 해 주고 싶었다. 네가 뭔데 자꾸 훼방만 놓냐고. 하지만 생긴 게 워낙에 멀끔하고, 부티가 나 저도 모르게 살짝 위축됐다.

 강주는 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찼다. 고개를 내저은 재희가 중개업자를 향해 머쓱하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보면 될 듯해요. 좋은 방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에 가서 차근차근 고민해 볼게요.”

“그래요, 좋은 방은 빨리 나가니까, 집에 가자마자 바로 전화하는 게 나을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재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공친 것 같았다. 절 따라온 차강주. 저 상무님 때문에.

 파스타를 돌돌 말며 재희가 강주에게 물었다.

“안 바쁘세요?”

 강주가 딱 잘라 답했다.

“안 바빠요.”

“…….”

 …차라리 바쁘길 바랐는데.

 재희는 묻고 싶었다. 도대체 왜 절 따라와서 방해만 하는 건지. 얼른 새집을 구해야 깔끔하게 이사를 할 텐데.

 그와 함께, 새로 살 집을 구경하게 된 건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돌아온 토요일. 강주의 냉장고에 반찬을 채워 넣다가, 부동산 업자와 통화를 하게 됐다.

 원룸 방문 일정을 잡으며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둘의 통화를 가만히 듣던 강주가 다짜고짜 물어 온 것이다.

‘이사 가요?’

 그리고 오늘 집을 구경하러 간다고 답하자 갑자기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본인이 함께 가 준다며.

 아니라고,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 그녀를 향해 그는 침착하게 덧붙였다.

‘젊은 사람 혼자 가면 제대로 된 집 못 봐요.’

 일이라는 게 다 그렇다며. 얕보이고 쉽게 보이는 순간 거래는 끝난 거라고 보면 된다며, 조용히 설득했다. 재희 씨는 순해 보여 특히 더 얕보인다고.

 신빙성 있는 발언이다. 그렇기에 재희는 그의 막무가내 페이스에 말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가 사사건건 방해하며 딴지를 걸 줄도 모르고.

 우선 처음 갔던 집을 봤을 때, 본인의 욕실보다 작은 원룸을 보고 그는 약간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내 침착을 되찾았다.

 하지만 재희는 보았다. 이런 개집만 한 곳에서 살 거라고? 묻는 그의 눈빛을. 그리고 그의 방해가 이어졌다. 그러다 결국 지금이 됐다. 소득 없이 밥만 먹고 있는 지금이.

“오늘 함께 봐 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그리 고맙지는 않았지만, 인사치레는 보냈다. 그가 무슨 변덕으로 호의를 베푼 건지는 모르겠으나 우선은.

 강주가 가만히 재희를 응시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사는 왜 하는 건가요. 혹시 정민철과 있었던 일 때문에?”

“…아뇨, 그냥 좀.”

 재희는 답을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이사의 가장 큰 이유는 효정의 대학 입학이었지만, 민철의 일 역시 영향을 끼치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 일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강주가 자신을 구해 주느라 곤욕을 치렀는데 부담을 주기 싫었다.

 하지만 당연히도, 강주는 그녀의 속내를 간단히 간파했다.

“그 길 지날 때마다 무서워요?”

“아, 음. 살짝 그렇기는 한데.”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재희가 답했다. 초조해 보이는 그녀의 행동에 강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나는.”

“네?”

“이제 나는 안 무섭냐고.”

“…….”

 그 말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눈만 끔뻑거렸다.

 그가 무섭다니. 고마우면 고마웠지 무서웠던 적은 없다. 예전에도, 지금도. 무섭고 두려운 건, 저로 인해 그가 입을 피해였다.

 머뭇머뭇 제 의견을 전하려는데 강주가 마시던 물 잔을 내려놓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집으로 와요.”

 마치 저녁 식사에 초대하듯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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