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96)

 #37

“어……. 그게 우선 이걸, 이걸 내셨으니까…….”

 감사실 직원은 부산스럽게 서류를 매만졌다. 성희롱 방지 대책 전담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기는 하지만 늘 교육만 담당했지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건 그로서는 처음이었다. 뒤에서 듣고 있던 부장이 그를 제치고 재희의 맞은편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감사 팀 마진희 부장이에요. 마케팅 2팀 소속 윤재희 주임이라고 했죠?”

“네.”

“아무래도 이 건은 제가 직접 맡는 게 좋겠어요. 혹시 당사자나 관련 팀원들에게 미리 신고문을 보내 놓았나요?”

“아니요, 자료를 제출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그렇다면 재희 씨는 이 일을 어디까지 공개하여 진행할 생각이신가요?”

 마 부장은 서류를 팔락팔락 넘기며 진지하게 질문했다. 재희 역시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일을 은폐할 생각은 없지만, 굳이 크게 만들 생각은 없으며, 그의 사과를 받은 후 정당한 징계가 주어지기를 원한다고.

 마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러면 우선 수신인에 김인무 과장을 넣어서 제게 정식으로 메일을 발송해 주세요. 물론 이 자료들을 첨부해서요.”

“네, 알겠습니다.”

 몇십 장에 달하는 신고서를 바라보는 마 부장이 입술을 달싹였다. 어휴, 이 사람 참…….

 술자리에서 김 과장이 치근덕거렸던 것. 거절하자 그때부터 시작됐던 괴롭힘에 대한 상세 내용이, 육하원칙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적혀 있었다. 날짜까지 상세하게.

 다음 날까지는 마케팅 부서는 아주 평화로웠다. 재희가 보낸 메일이 김인무 과장을 참조하여 감사 팀으로 발송되기 전까지는.

 담배를 피우고 온 김 과장이 냄새를 흩뜨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마우스를 몇 번 딸깍거리더니 소리를 꽥 질렀다.

“뭐야! 이게 뭐야?”

“왜요?”

 옆에 앉은 임 대리가 그에게 물었다. 김 과장은 당황했는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성급히 메일 창을 껐다. 그리고 재희를 향해 급히 다가왔다. 헉헉 내뱉는 숨결 사이로 담배 내음이 흩어진다.

“야! 아, 아니, 윤재희, 윤 주임.”

“네, 과장님.”

“나랑 얘기 좀, 얘기 좀 하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는 말을 더듬었다. 재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뭐? 뭐?”

 그가 앞으로 할 행동이야 뻔하지 않겠나.

 진심 없는 사과를 할 것이고, 이 일을 무마시켜 달라며 애원할 것이다.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며 동정심을 유발할 것이고, 그것에 넘어가 사건을 무마시키면 다시 뻔뻔하게 예전의 파렴치한 김 과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당연한 순서였다. 그가 꿈꾸는 미지근한 순서에, 재희는 발가락 하나 들이밀 생각이 없었다.

“할 말이 있으시면 나중에 소집될 위원회에서 말씀하세요.”

“…….”

 책상을 짚은 김 과장의 손가락이 발발 떨렸다. 뭐 이런 일이 있지. 현실을 믿을 수 없어 차마 재희의 책상 앞을 떠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임 대리가 “위원회?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물어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자리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재희에게 문자와 메일 폭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김 과장이 보낸 것이었다. 내가 잘못했다는, 제발 사과를 할 기회를 달라는.

 아마 네 오해로부터 기인한 소동인 것 같다. 고의는 아니었다. 그저 농담이었고 업무상 있었던 마찰인 거 너도 알지 않느냐, 라는 내용의 뻔한 메일이.

 일방통행에 가까운 막무가내의 사과가 이어졌다. 자신의 행동을 우발적인 실수로 축소하고 은폐시키는.

 재희는 모두 무시했다. 그동안 당한 게 있지. 저런 나쁜 놈은 한 번쯤 고꾸라져야 정신을 차릴 게 뻔했다.

 ***

 강주는 턱을 괸 채 짤막한 서류를 내려 봤다. 재희가 신고한 서류 중 한 페이지. 김 과장의 발언이 담겨 있는 녹취분 정리 서류 자료였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상무님한테 다리라도 벌렸냐?

 -너 믿을 구석 그거 하나잖아. 얼굴 반반한 거. 아, 근데 그럴 리가 없지. 네 뭘 보고, 상무님이.

 김 과장이 말했던 상무님. 그게 바로 강주였기에, 고민하던 감사 팀 마 부장이 그에게 짤막한 보고를 올린 것이다. 혹여 불미스러운 상황에 연루될까 걱정된다며.

 건드리면 안 될 상대가 서류에 드러나 있어 미리 언질부터 넣은 것이다.

 강주는 서류를 가만히 내려 보다가 거칠게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버튼을 눌러 비서에게 전했다.

“마진희 부장 호출해요. 방금 보낸 자료 원본 다 들고 당장 올라오라고.”

 잠시 후.

 마 부장은 긴장한 얼굴로 강주를 응시했다. 강주는 마 부장이 들고 온 서류 파일을 살피고 있었다.

 차강주. 그가 누구인가. 전략 기획 조정실 상무이기 전에 선강 그룹가 일원 아닌가. 그렇기에 더욱 긴장됐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이름이 올라가 불쾌하고 짜증스러울 것이다. 당연했다. 불똥이 애꿎게 튀면 안 될 텐데.

 하지만 의외로 강주의 무심한 얼굴은 균열 하나 없이 매끈했다.

 강주가 서류를 책상 위로 툭 내던지며 물었다.

“이 일,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우선 윤재희 주임이 신고문을 작성해서 정식으로 접수했고, 감사 팀에서 조정을 위해 김인무 과장을 소집한 상태입니다. 사실관계 조사하여 제대로 해결 방안을 모색할 생각입니다.”

 강주의 뼈대 곧은 손가락이 미간을 문질렀다. 신경질이 미약하게 밴 얼굴이 다시 멀끔히 펴진다.

“여기에 저도 거론된 것 같은데. 혹시 제 의견도 말씀드려야 합니까.”

 올 것이 왔구나. 마 부장은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두 손을 휙휙 내저었다.

“아, 그건 재희 씨가 올린 많은 신고 사안 중 하나일 뿐이라서요. 김인무 과장 역시 제게 ‘상무님과 관련된 발언은 술 취해 생각 없이 뱉은 말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헛소리이니 오해 없길 바란다.’라며 거듭 말을 해 와서……. 신경 쓰실 일은 없을 거예요.”

 마 부장이 생각하기에, 그 발언은 가벼운 혓바닥이 불러온 참사에 불과한 일이었다.

“…….”

 강주는 마 부장을 빤히 바라만 보았다. 마 부장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꿀꺽 넘어갔다. 이내 강주가 힘주어 말했다.

“제가 거론된 이상 이 일, 끝까지 지켜볼 겁니다.”

“네, 네.”

“대충 뭉갠다거나, 윤 주임에게 합의 강요하는 일, 제 귀에 들어오지 않게 하세요.”

 마 부장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제가 하려는 말이 무언지 이해하셨죠?”

“아, 네! 상무님!”

 마 부장이 이해했다는 듯 크게 답했다. 가끔 이런 일은 말도 안 되게 진행되는 경우도 적잖이 있었다. 합의를 도와준다며 피해자에게 억지로 사과를 받아들이게 한다거나, 오히려 피해 당사자의 퇴사를 종용한다거나.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 일이 벌어질 때 좌시하지 않겠다고 저 차강주 상무는 경고하는 것이다.

 이내 강주는 나가 보라는 듯 마 부장을 향해 손짓했다. 마 부장은 허리를 푹 숙였다가 편 후, 힘차게 문밖을 나갔다. 김 과장을 처절하게 응징하기 위하여.

 그 뒤, 강주는 마케팅 2팀 소속 임선민 대리도 불렀다. 그녀는 재희의 바로 직속 상사로, 둘의 공방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사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상무님. 절 부르셨다고…….”

 임 대리가 우물쭈물 말을 흩뜨렸다. 무슨 일일까. 상무님과 자신이 이렇게 대면할 일이 있던가. 이건 너무 어려운 자리 아닌가.

 강주는 긴장을 풀라는 듯 옅게 웃으며 부드럽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마케팅 2팀 소속 임선민 대리죠?”

“네! 그렇습니다.”

“윤재희 주임과 김인무 과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겠군요.”

“아, 네. 네. 그렇습니다!”

“평소 둘 사이가 어떻습니까? 그리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아는데.”

 임 대리의 어깨가 위축됐다. 저 질문을 하는 의도를 알 수 없어 더욱 그랬다. 상무님이 한낱 사원들 일에 신경 쓸 리가 없는데, 왜 물으시는 거지. 어떻게 대답해야 맞는 건지. 우물쭈물 임 대리가 답했다.

“저……. 사이가 좋지 않다기보다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업무상 마찰이 살짝 있었고……. 하지만 저희 팀워크는 늘 괜찮았습니다. 문제가 생긴다거나 그런 적은 없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칫 팀이라도 해체될까 두려워 애써 변호해 보았다.

“그래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네! 네!”

 강주가 의자에 등을 느른히 기대며 잔뜩 긴장한 임 대리를 향해 말을 이었다.

“앞으로 김 과장의 징계 위원회가 열릴 예정이에요. 그때 임 대리가 참고인으로 나와 줘요.”

“네?”

“봤던 일을 솔직하게 얘기해 주면 됩니다.”

“네? 징계 위원회라니……. 제가 본 일은 또 무슨……. 어떤…….”

“김인무 과장의 폭언. 직위를 이용하여 후임에게 위해를 가했던 일을 말하는 겁니다.”

“아…….”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임 대리는 말을 늘였다. 강주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그녀를 다정하게 안심시켰다.

“곧 감사실에서 부를 거예요. 그때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게 될 텐데, 임 대리는 한 가지만 명심하면 돼요. 사실을 은폐하지 않는 것.”

“네……? 아, 네. 네. 알겠습니다.”

 임 대리는 멍청히 답했다. 대략 감이 잡히는 것 같다. 그녀는 머리로 이것저것을 떠올리며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든 게 모호했으나 확실한 건 있었다.

 아, 이제 김인무 과장이 엿을 먹을 시간이구나. 그것도 아주 커다랗게.

 ***

 재희는 시선을 내린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바로 전, 차강주 상무의 호출이 있었다. 초기 TF 프로젝트가 성공적이라 그 이후 일은 마케팅 1팀으로 우선 이관됐다. 그렇기에 그와 자신이 사내에서 공적으로 마주할 일은 없을 텐데.

 이렇게 부른 건, 아마.

‘내가 신고한 걸 알게 되셨겠지. 상무님도 언급되어 있으니까.’

 등골이 싸했다. 이런 불쾌한 일에 자신을 끌어들였다며 화를 내면 어쩌지. 불안함으로 입술 안쪽만 초조하게 짓씹는데 강주가 재희를 향해 까딱 손짓했다.

“이리 와요.”

 재희는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마치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을 들은 것처럼. 그리고 그의 의자 옆에 서서 로봇처럼 입을 열었다.

“불쾌했다면 죄송합니다. 상무님께 미리 말씀을 못 드린 건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 새끼가 뭘 잘 모르네요.”

 강주는 그녀의 말을 뎅강 끊었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후 제 쪽으로 당겼다.

 휘청거리던 재희가 빨려 들어가듯 그의 무릎 위에 털썩 떨어졌다. 강주가 그녀의 허벅지를 쑥 끌어 제 위에 바짝 올렸다. 두 몸이 강하게 밀착됐다.

 재희는 그의 다리를 타고 앉아 숨을 들이켰다. 마주한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배어 있다. 다리를 벌리고 앉느라 훤히 올라간 치마 아래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재희는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 하체를 바짝 마주한 탓에, 그의 흉흉히 선 앞섶이 아래를 쿡 찔러 왔기 때문이다.

“재희 씨에게 개처럼 발정해서 먼저 세운 건 나인데.”

 그와 처음으로 밤을 보낸 이후. 별다른 일은 없었다. 다음 날이 되자 재희는 잠든 그를 두고 홀로 빠져나왔고, 그게 다였다. 하룻밤의 위로가 끝났으니 염치없이 머무는 대신 사라져 준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홀로 고민했건만 아무래도 그는 노선을 확실히 정한 것 같았다. 아래에서 아찔하게 느껴지는 묵직한 것이 말해 오고 있지 않은가.

 강주는 허리를 느릿하게 움직여 그녀의 하체에 비비고는 손끝으로 그녀의 눈가를 더듬었다.

“울던 재희 씨 먼저 꼬신 것도 나고.”

 아래가 천 사이로 은근히 마찰될 때마다 불씨가 인다. 재희는 뜨거워지는 감각을 애써 내리눌렀다. 강주가 눈가를 매만지던 손을 천천히 내려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기 먼저 빨아 먹은 것도 나고.”

 강주는 재희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그녀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한없이 담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 새끼 말은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며 넘겨요.”

 셔츠 위를 매만지던 손이 천 아래로 쑥 들어왔다. 브래지어 위를 움켜잡는 손아귀 힘에 절로 신음이 흐른다. 강주는 얇은 브래지어 천 위를 매만지며 재희의 입술을 핥았다.

“전에도 말했잖아요. 내가 재희 씨 몸에 환장해서 그런 거로 생각해요. 편하게.”

“아, 읏…….”

“재희 씨는 신경 쓸 거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몸 가는 대로 하면 돼요. 지금처럼.”

 두 입술이 살짝살짝 스치는 감각이 아찔하다. 침착한 그의 저음이, 마치 달콤한 독약처럼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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