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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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처음으로 보내는 직접적인 반격이었다.

 그간 온갖 치사하고 더러운 꼴을 보아도 참았다. 효정이 때문에. 돈 때문에. 직책상 을인 제 위치 때문에. 하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그냥 괄시만 하고 욕만 하면 참겠는데, 아이디어까지 훔쳐 가 놓고는 뻔뻔하게 나오는 꼴을 더는 못 보겠다.

“야, 윤재희!”

“윤 주임이에요.”

“…….”

 김 과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재희에게 차마 무어라 할 수 없어 더욱 부아가 치민다. 재희는 고개만 힐끗 올려 김 과장을 올려 보았다.

“할 말 있으시면 사무실 말고 다른 데서 얘기하시죠. 여기서 소리 지르시면 곤란합니다.”

“…….”

 몸을 휙 돌린 김 과장이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그의 잇새로 “나중에 보자.” 하는 악당 같은 문장이 흘러나왔다. 재희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참기에는 열 받고, 받아치니 찝찝하다. 참으로 까끌까끌한 사수였다.

 ***

“일이 좀 있었다면서?”

 강주의 모친, 유영현이 가라앉은 얼굴로 물었다. 강주는 심드렁히 답했다.

“네.”

“어쩌다 그랬니?”

“뭐, 어쩌다 보니.”

 영 대화 같지 않은 대화였다. 강주의 답은 여전히 간단했다. 말을 늘여 설명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영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몇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던 기억이 난다. 그 폭력 사건으로 결국 미국으로 떠났지. 내 아들이 어째서. 바르게 컸다고 생각한 강주가 왜.

“그런데 이번에도 재희 때문에 그런 거라면서? 걔도 참 신기하게 자주 얽혀. 이번엔 무슨 일이었니? 우연이었어?”

 윤재희. 영현이 아는 재희는 싹싹하고 밝은 여자애였다. 마주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첫인상만으로도 호감이 갔던. 하지만 ‘고용한 가정부의 딸’ 딱 그 정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윤재희 씨 제 부하 직원입니다. 이번에 제가 꾸렸던 TF 팀 소속이기도 하고. 그래서 얽힌 거예요.”

“그랬니? 참 신기한 우연이 다 있네. 혹시 그날 밤까지 같이 있었던 거니?”

“아뇨, 별일 아니었어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영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답했다. 딱 잘라 선을 긋는 강주가 신경 쓰지 말라는데 무슨 첨언을 하겠는가.

 마냥 어린 것 같던 침착하고 조용한 아이는, 어느새인가 훌쩍 커서는 스스로 모든 걸 알아서 하기 시작했다. 이따금 제 일에 상관하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밀어내며.

 어릴 때 사랑을 온전히 주지 못했던 탓일까. 죄책감으로, 영현의 마음속에는 늘 따끔한 가시 하나가 박혀 있었다. 아픈 손가락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영현은 한숨을 내쉬고는 티스푼으로 잔을 저었다. 어떻게 하면 제 아들의 곁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적잖은 고민을 하며.

 ***

 수더분한 술집에 열기가 돈다. 전략 마케팅 2팀의 회식 자리. 팀장이 좌천된 상황이지만 오히려 더욱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잔이 오갔다.

 짠, 하고 잔을 마주친 임 대리와 재희가 키득 웃었다.

“…그래서 저번 주말에 그 영화를 조조로 보러 갔는데 나밖에 없는 거야.”

“그거 평이 안 좋아서 관도 많이 내렸던데요?”

“영화관 전세 낸 것 같아서 기분 좋던데? 재벌 집은 막 영화관처럼 스크린 크게 해 놓은 데도 있다고 하더라? 재벌 된 기분이었다니까.”

“그래요?”

 재희는 튀김을 아작아작 씹으며 선강 그룹 회장의 저택을 떠올렸다. 그곳 별채에 살 때. 엄마를 도우러 이따금 들어갔던 기억을 되새긴다. 영화관 비슷한 건 없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강주의 집을 떠올렸다. 그냥 평범한 집 같던데. 무척 고급스럽고, 부담스러우리만큼 넓다는 것 빼면. 넓은 거실에 침대 하나 달랑 있는 건 특이하지만.

 재희의 목덜미가 찬찬히 달아올랐다. 침대. 강주의 침대를 상상하니 필연적으로 그날 일이 떠오른 까닭이다. 그곳에서 뒹굴었던 둘의 모습 역시 아주 선명하게.

 재희는 손부채를 파닥이며 열을 식혔다. 고개를 휙휙 내저어 그의 생각을 애써 떨쳤다. 얼음 잔을 들어 타는 목을 축이려는 순간이었다.

“좋냐? 재밌어 죽겠어?”

 옆에서 난데없는 시비가 던져졌다. 재희는 잔을 내려놓고 시비를 향해 눈길을 뒀다. 아까부터 죽상을 하던 김 과장이 보였다. 혼자 술을 마셨는지 그의 앞에 소주병이 늘어서 있었다.

 한쪽 입술을 괴상하게 비튼 김 과장이 재희를 흉흉하게 노려보았다.

“정 팀장님이 그렇게 되셨는데 다들 웃음이 나와? 씨발, 이깟 게 무슨 팀워크야!”

 쾅! 하고 테이블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다들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심했다.

 정 팀장의 부재를 진실로 걱정하는 이는 실상 아무도 없었다. 위에 살랑거리느라 타 부서 일까지 다 끌어와 던져 놓거나, 무책임하게 일을 뭉갰던 팀장이니 오히려 없어진 편이 나았다. 솔직히 말해, 속이 시원했다.

“특히, 너! 윤재희! 너, 씨발, 넌 진짜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뭉그러진 발음으로 김 과장이 외쳤다.

‘왜 내 이름이 안 나오나 했네.’

 재희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말고 밖에서 얘기하시죠, 과장님.”

“하이고, 네가 얘기하자면 내가 쫄 것 같아서? 네! 네! 그럽시다, 자알나신 윤재희 주임님!”

 김 과장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재희를 따라 팔을 들썩이며 걸어 나갔다.

“안 따라가 봐도 되나?”

 남겨진 팀원들 사이로 웅성웅성 걱정이 맴돌았다.

 재희는 술집을 나오자마자 커브를 돌아 좁다란 골목에 들어섰다. 그리고 벽에 등을 대고는 절 따라 나온 김 과장을 담담히 응시했다.

 먼저 입을 연 건 김 과장이었다.

“너, 도대체 뭐냐?”

“뭐가요.”

“너 같은 년 때문에 이게 무슨 좆같은 상황이냐고! 팀장님이 다 말했어! 네가 상무한테 다 꼰질러서 일 키운 거라고! 팀장님 좌천된 거 다 네 수작 때문이잖아!”

 그가 윽박지르며 상체를 들이밀었다. 훅 끼치는 알코올 내음에 재희는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뒤로 물렸다.

 김 과장의 말은 분명 사실이 아니다. 정 팀장의 좌천은 스스로 불러일으킨 화였다. 아이디어를 훔친 것도, 진실을 숨기라며 윽박질렀던 것도, 추한 민낯을 상무님께 들킨 것도 모두 그 아닌가.

 재희는 주머니에 있는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다가 제 어깨를 힘주어 누르는 김 과장의 억셈에 고개를 들었다.

“너 도대체 뭐 믿고 이러냐? 어? 갑자기 뻗대기나 하고. 믿는 구석이 도대체 뭐야?”

“믿는 구석 없어요. 김 과장님 폭언을 더 참기 싫었을 뿐이지.”

 담담한 그녀의 말에 김 과장은 입술만 질금 씹었다. 술기운으로 살짝 달아오른 재희의 예쁜 뺨을 바라본다. 그의 얼굴 위로 느물느물한 미소가 번졌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상무님한테 다리라도 벌렸냐?”

“…뭐라고요?”

“너 믿을 구석 그거 하나잖아. 얼굴 반반한 거. 아, 근데 그럴 리가 없지? 네 뭘 보고, 상무님이.”

 김 과장 역시 재희와 강주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재희가 몸을 던져 정 팀장을 쳐 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재희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기 위해. 저 도도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수치심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면 속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아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것.

 재희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이건 명백한 성희롱 아닌가. 불쾌하고 저열하기 짝이 없는. 하지만 그보다 더 치욕스러운 건, 믿을 구석이라고는 얼굴 반반한 거 하나뿐이라는 그의 발언이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를 버텼는데. 집에서도 밤새 아이디어 짜내고, 발로 여기저기 뛰고, 김 과장 너란 놈이 저질러 놓은 일 아래서 다 수습하며 발 동동거렸는데. 내 아이디어까지 훔쳐 간 놈이 도대체 뭐가 당당해서.

 재희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야.”

 낮게 그를 불렀다. 김 과장은 절 ‘야’라고 부른 윤재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눈만 끔뻑였다.

“너 지금 나한테 야라고 했냐……?”

“그래, 너. 너한테 야라고 했다. 너도 나한테 이년 저년 야야거리는데, 난 안 돼?”

“…하! 와, 진짜…….”

 그가 목덜미를 주무르며 헛웃음을 흘렸다. 재희의 표정이 더욱 싸늘해졌다.

“어때요? 저한테 반말에 야, 소리 들으니 기분 더럽죠? 저도 그래요. 기분 더러웠고, 지금도 더러워요.”

“너 말 다 했어?”

“아뇨, 더 할 거예요. 그러는 김 과장님이야말로 도대체 뭐 믿고 저한테 이러는 건데요? 정 팀장까지 좌천당했는데 도대체 뭐가 그리 당당한 거예요? 남의 아이디어나 훔쳐 가 놓고?”

“야! 너! 씨발! 너! 너!”

 김 과장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삿대질을 했다. 하나하나 반박할 수 없어 애꿎게 팔만 허우적거린다. 재희는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손을 쳐서 밀었다.

“야, 너, 하지 마. 당신이 뭔데. 고작 과장 하나 더 달았다고 유세는.”

“이거 아주 얌전한 척하더니……. 와……. 너 이렇게 할 말 못 해서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

“오늘처럼 김 과장님이 끈 떨어진 갓 되기만을 기다리며 살았어요. 왜요.”

“아우, 진짜!”

 순간 화를 이기지 못한 김 과장이 발을 쾅 굴렀다. 그의 폭력적인 반응에도 재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막말로 그간 절 위협하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나.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민철에게 맞을 뻔하기도 했었다. 저까짓 것쯤이야.

“할 말 없으시면 전 먼저 갈게요.”

 재희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주머니 안에서 흔들리는 휴대 전화를 꽉 쥔다. 내일 어떻게든 저 김 과장에게 엿을 먹여 줄 생각이었다.

 ***

 9층 감사 팀 사무실. 재희는 맞은편 직원을 향해 두 가지 물건을 내밀었다. 하나는 그간 김 과장이 저에게 했던 행동들을 하나하나 정리하여 모아 놓은 신고문. 다른 하나는, 어제 김 과장과 나눈 대화 내용이 담긴 USB였다.

 재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녹음 파일 하나를 켰다.

 -야, 너 솔직히 말해 봐. 상무님한테 다리라도 벌렸냐?

 김 과장의 녹음된 목소리가 사무실 안을 울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상대 직원의 얼굴을 마주하며 재희가 물었다.

“사내 언어폭력 및 성희롱 신고 프로세스가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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