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고개 숙여 재희의 표정을 살피며, 강주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재희는 젖은 머리카락만 매만졌다. 할 말을 찾을 수 없어 그의 가슴팍만 응시한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뭐라고 해야 할까. 그때, 효정이를 구해 준 건 고마웠다고 늦은 인사를 전해야 할까. 아니면, 오늘 민철이를 때려 주어 고맙다고? 그것도 아니라면…….
비가 오는데 괜찮냐며 주제넘은 안부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걸까.
걱정돼 왔노라고. 마음이 쓰려 참을 수가 없었노라고.
그녀가 온 이유는 그 모든 이유이기도 했고 그 모든 이유가 아니기도 했다. 그녀 스스로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서 있는지. 어째서 강주를 앞에 두고 서서 할 말을 고르며 서성이는 건지.
“우선 들어와요.”
강주는 그녀가 지나갈 수 있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재희는 안을 응시하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빛을 향해 걸었다.
사방이 은은한 조명 빛으로 가득했다. 부엌에도, 거실에도, 그가 책을 읽고 있던 소파 옆에도. 어둠을 모조리 몰아낸 집 안. 거실을 한가득 채운 창 위로 투둑투둑 빗줄기가 흐른다.
흘러내리는 빗물 사이로 아른거리는 서울 야경을 응시하고 있노라니, 옆에 찻잔 하나가 놓였다. 진한 커피 향이 흩어졌다.
“마셔요.”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젖은 곳을 닦으라며 수건 하나를 건네주더니 소파에 앉을 뿐이었다.
재희는 따뜻한 잔을 쥔 채 시선을 들었다. 절 가만히 바라보는 강주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 창백해진 뺨. 표정 없는 얼굴. 사방이 빛으로 가득한 집. 비 오는 밤이 두려운 걸까. 오늘 역시 그리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투둑투둑-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 사이로 조용한 선율의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음악이 좋네요.”
“그래요?”
침묵이 신경 쓰여 아무렇게나 건넨 말에 강주는 가볍게 답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며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빗소리 가리려고 아무거나 틀었어요. 재희 씨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아, 재희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에는 이미 익숙해졌는데도 오늘따라 견디기가 어렵다. 네가 이곳에 왜 왔느냐고 묻는다면, 차라리 이야기가 쉬울 텐데. 심장만 쿵쿵 뛰었다.
강주는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나른히 말을 건넸다.
“정민철, 그 새끼 일로 걱정되어 온 거면 신경 쓰지 말아요.”
“네?”
사실 정민철 같은 건 생각도 나지 않았었다. 강주로만 가득한 머리를 비집고 다른 생각이 들어왔을 리가. 강주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그쪽이 협박하더라고. 선강 그룹 상무가 사람을 때렸다……. 언론에 제보하겠다며.”
“그래서요……?”
“그래서 하라고 했어요. 기사가 나겠죠. 모두 개떼처럼 달려들겠지. 아마 궁금해할 거예요. 선강 그룹 회장 아들이 도대체 왜 사람을 때렸을까……. 우습게도 내가 그 정도 주목도는 있겠더라고.”
하기야 모두가 관심을 가질 거다. 선강 그룹 회장 아들이 사람을 쳤다는데. 누군가는 오너 리스크라 떠들 거고, 누구는 콩밥을 먹여야 한다며 성토할 게 분명했다. 재희가 파리해진 얼굴로 강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강주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그렇게 궁금해할 때 동영상 하나가 뜨는 거죠. 정민철, 그 등신 새끼가 재희 씨에게 달려들던 장면이 담긴.”
“아…….”
CCTV가 없는 곳인데 어떻게. 혹시 휴대 전화로 촬영이라도 한 걸까.
거기까지 설명한 강주가 그녀를 안심시키듯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재희 씨는 걱정하지 말아요. 그깟 일, 내게 아무런 타격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그제야 재희는 뒤늦은 고마움을 전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그에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했었다. 재희가 어색하게 물었다.
“정민철 때리기 전에 동영상이라도 찍어 놓았나 봐요. 다행이에요. 제가 아무리 상무님 변호를 한다고 해도 증거가 없는 이상 한계가 있었을 텐데.”
강주의 입꼬리에 옅은 미소가 달렸다.
“찍었겠어요?”
“아…….”
아아, 재희는 그제야 바보같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냥 그럴싸한 거짓말로 협박한 거구나.
민철의 부모님은 지방에서 꽤 유명한 한방 병원을 운영했다.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인데 아들인 민철이 그런 일로 오르내리는 것 자체를 불명예라고 생각했을 거다. 법적으로는 강주가 처벌을 받더라도, 그는 여자를 구해 준 선인이 되는 거고, 민철은 여자에게 손을 대던 무뢰배로 전락하는 거니까.
평생 고고하던 사람들이 제 아들을 파렴치한으로 만들 수 있을 리가.
어쨌든 다행이었다.
강주는 찻잔만 만지작거리는 재희를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심했으면, 이제 돌아가요. 운전기사 불러 줄게요.”
“아니, 저는.”
“알고 있겠지만… 내가 오늘 같은 날에는 운전을 못 해요. 미안해요.”
하얗게 굳은 강주가 씁쓸히 웃었다. 그는 소파를 짚고 서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손끝이 살짝 떨려 온다. 재희 앞에서 태연한 척하는 것도 한계인 것 같았다.
재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는 대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정신적 방황을 제일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던 건, 늘 자신이었으니까.
“가요.”
“상무님.”
“가라고. 매달리는 꼴 보이기 싫으니까.”
“…….”
순간 음악 소리가 멎었다. 트랙과 트랙을 잇는 약간의 틈. 그 찰나의 순간, 빗소리가 해일처럼 거실을 덮쳐 왔다. 숨을 들이켠 강주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스스로를 향한 욕설이 작게 흘러나온다.
“그냥. 그냥 여기 앉아 있다가 갈게요. 혼자 계시면……. 그냥 옆에 있을게요.”
손에 얼굴을 묻고, 강주는 읊조리듯 답했다.
“다른 사람 부르면 돼요. 올 사람 많으니까.”
“이런 날 다른 사람하고 있는 거, 싫어하잖아요.”
제 나약한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어했던 강주다. 그 사실을 아는 재희가 작게 속삭였다.
그를 제일 잘 아는 것도, 그의 상처를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던 것도 모두 자신뿐이었다. 그런 것 따위 이젠 의미 없는데. 그를 잘 안다는 사실에 우월감을 가져 무얼 하겠다고. 재희에게서 자조감 어린 웃음이 흘렀다.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를 누구보다 모른다는 지금의 현실이 우스워.
강주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차게 식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강주가 짓씹듯 입을 열었다.
“네가 날 그렇게 잘 알아?”
“…….”
툭 내뱉는 목소리가 차갑기 그지없다.
“다 알면서, 그렇게. …다 알면서.”
재희는 멍하니 그의 얼굴만 응시했다. 절 헤집을 듯 노려보는 눈동자에 어쩐지 원망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상처 입어 버려진 짐승을 보는 기분이었다. 정작 그에게 내쳐지고 내던져진 건 자신이었는데, 왜 그가.
먼저 벽을 세워 단절시켰으면서, 왜. 다 알면서 잔인하게 내친 건 오히려 차강주, 본인이었으면서.
재희는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맞닿는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부드럽게 힘을 주어 당기자, 그녀보다 훨씬 커다란 그가 고개를 숙여 기대 왔다. 녹은 눈이 땅 아래 스미듯 아주 천천히.
“하아…….”
그의 허탈한 숨결이 어깨 위에 느껴졌다. 재희는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어린 시절 그를 끌어안고 위로하듯, 언 얼음을 녹이듯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손길이 닿는 곳마다 열기가 돌았다. 바짝 굳은 그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강주는 용기 내어 천천히 팔을 둘렀다. 그녀의 여린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온기가 품에 온전히 안기자마자, 비로소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
틈 없이 맞닿은 몸 사이로 미열이 흐른다. 그녀를 당겨 안은 강주가 매달리는 것처럼 재희를 부둥켜안았다.
“내가 불쌍해요?”
힘겨운 물음이 던져졌다. 그의 목소리는 어둑하게 잠겨 있었다. 그가 눈 아래를 찬찬히 일그러뜨리며 다시 물었다.
“이건 무슨 의미예요? 동정이에요?”
“…….”
“이젠 내가 무섭지 않아요?”
재희는, 나직하게 묻기만 하는 그를 향해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동정해. 내가 어떻게. 그리 답하고 싶었지만 깊게 그늘진 그의 눈동자를 보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사실은 그가 무서웠다. 그의 앞에 선 자신이 무서웠다. 그의 앞에만 서면 절 잃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싫었다. 꼿꼿하게 중심을 지키고 싶은데, 늘 그를 향해 휘청휘청 넘어지는 바보 같은 자신이 무섭고 두려웠다.
그가 절 밀어내는 것 역시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다.
‘저번에 키스해 보니까, 생각보다 좋더라고.’
문득, 옥외 정원에서 들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제게 키스하는 그에게, 제 몸을 만지는 그에게 왜 그러냐 묻자 그는 그리 답했었지.
이젠 아무렴 상관없었다. 절 위로하던 목소리도, 차강주. 제가 원하는 것도, 차강주. 늘 갖고 싶고 닿고 싶어 안달하던 차강주였는데,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는 명분이 무어가 되든 중요하지 않았다.
강주 오빠와 재희가 아니라 해도 상관없었다. 예전과 달라져 버린 사이라 해도 괜찮았다. 마음이 이렇게 그를 원하는데 온몸 다 내던지는 한이 있어도 잠시나마 곁에 있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차가운 벽 너머 세상으로 내던져진다고 하더라도. 초라하게 버려진다 해도.
“상무님은 불쌍한 사람 아니에요. 동정한 적도 없어요. 제가 어떻게 동정해요, 상무님을. 제가 어떻게.”
“…….”
강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를 더욱 꽉 끌어당기고는 매달리듯 안으며 숨을 골랐을 뿐.
비가 점점 거세졌다. 들이닥치는 빗소리가 흐르던 음악을 짓뭉갰다.
강주는 눈을 감고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이런 날 찾아오는 건 반칙이잖아.”
곧 뜨거운 손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
두 입술이 거칠게 맞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