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96)

 #30

 놀란 얼굴로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어?”

“그 얘기를 내가 너한테 왜 해.”

“…….”

 흔들리는 시선 속에, 부드럽게 미소 짓는 강주가 보였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잖아.”

 얼굴만큼은 평소의 다정한 강주 오빠인데, 한없이 차가운 말만 내뱉는.

“…아…….”

 재희의 눈망울이 애처롭게 젖어 들었다. 하지만 차마 눈물을 흘릴 수 없어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방금, 그와 저 사이에 높다란 벽이 생겼다. 타고 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날카롭게 가시를 세워 절 떨어냈다.

 난 오빠를 욕심부린 적 없는데. 그런 주제넘은 생각, 한 적도 없는데.

 그녀의 상처 받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강주는 스스로에게 조소를 보냈다.

 감정 제어도 제대로 못 하는 철부지. 그게 자신이다.

 내가 느꼈던 배신감만큼 너도 느껴 봐. 악의적인 유치함이 치솟는 동시에, 모진 말을 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상처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주제에, 막상 상처를 주는 자신이 못나 자괴감이 치밀었다.

 그녀를 향한 비틀린 감정이 치졸한 가시를 세웠다.

 재희야, 내가 무섭다며. 싫다며. 내 마음 다 알면서, 난 너밖에 없는 거 다 알면서.

 절 무섭다고 말하는 재희가 원망스러운데. 언젠가부터 절 피하는 재희가 미운데.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어 집착하고 싶어진다. 상처 입혀서라도, 짓뭉개서라도 어떻게든.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기에.

“고마웠어. 잘 지내고.”

 강주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오도카니 선 재희를 두고 커다란 저택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홀로 무너졌다.

 ***

 그렇게 떠난 주제에. 아무렇지 않은 척 먼저 뒤돌았던 주제에. 강주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절 해외에 영영 파묻어 버리려는 차 회장의 수작을 헤치고 결국엔.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된 윤재희.

 재희는 어색한 얼굴로 몇 년 만에 만난 그에게 주저주저 인사했다.

“저……. 안녕하세요. …상무님.”

“…….”

 강주는 한동안 미동 없이 재희만 내려다보았다. 잃어버린 꿈을 좇는 것처럼 멍하니. 그러다 이내 그린 것처럼 미소 지었다. 마치 친한 친구와 다시 만난 듯 손을 그녀에게 내밀며.

“안녕하세요, 윤재희 씨. 오래간만이네요.”

 맞잡은 손이 서늘했다.

 강주 오빠가 아닌 차강주 상무님. 재희가 아닌 윤재희 씨.

 한없이 가까웠던 두 사람이, 한없이 낯설게 조우하던 순간이었다.

 8장. 낯설고도 따뜻한

 재희는 집으로 돌아와 차가운 철문을 닫았다. 구두도 벗지 않은 채 멍하니 현관에 서 있노라니 효정이 다가왔다.

“언니?”

 재희는 효정에게 대꾸하지 못했다. 아까 보았던 강주의 모습. 아까 들었던 강주의 목소리만 떠오를 뿐이다.

 민철이 공포스러웠고, 강주가 안타까웠다. 바닥을 뒹구는 건 민철, 피 묻은 손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건 강주였는데. 그런데도 강주가 안타까웠다. 상처 입힌 주제에 상처 입은 눈으로 서 있는 그를 당장이라도 안아 주고 싶었다.

 절 바라보며 처연히 웃던 미소를, 혼잣말처럼 울리던 그의 목소리를 되새겨 본다.

‘무서워한대도 어쩔 수 없어요.’

 씁쓸하게 삼키던 자조적인 목소리.

‘재희 씨는 이미 알잖아. 내가 이렇게 생겨 먹은 놈인 거. …답도 없는 정신병자 새끼.’

 아아, 재희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표정 하나 없던 그의 얼굴이, 마치 목이 멘 것처럼 잠겨 있던 그의 목소리가 마음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홀로 힘겨워하던 어린 시절의 그가 떠올라서. 하지만 차마 그때처럼 끌어안고 위로해 주지 못해서.

“언니, 언니. 괜찮아?”

“아니.”

 강주는 파리하게 질린 재희 앞을 지키듯 서 있다가, 연락을 받은 비서가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먼저 바래다주었다. 더러운 바닥을 나뒹구는 민철을 비서에게 맡긴 채 말없이 그녀를 올려 보냈다.

‘잘 자요. 그러기 힘들겠지만.’

 차가운 철문 앞에 서서, 다정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었다. 그리고 미처 돌아서지 못하는 그녀 대신 현관문을 열더니 부드럽게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틈 사이로 스며들던 마지막 목소리.

‘미안해요.’

 도대체 뭐가 미안한 걸까. 도대체 무엇이.

 혼잣말처럼 내뱉는 그의 목소리가 한없이 슬프게 들렸다. 재희는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그와 저를 가르는 차가운 철문이 쾅 닫혔고 다시 벽이 생겼다.

“언니, 도대체 무슨 일인데.”

 재희는 회상을 멈추고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효정의 손을 잡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미친 사람처럼 번뜩거리던 민철의 눈이 떠올랐다. 입술 위로 한기가 돌았다.

“민철이가 찾아왔었어.”

“민철 오빠? 아니, 오빠는 무슨. 그 새끼가 언니한테 뭔 짓 했어?”

“어, 욕하고 날뛰더니 때리려고 하더라.”

“뭐? 이 미친놈이!”

 효정은 당장 밖으로 나갈 것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저번에도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더니, 이번에는 때리려고까지 해?

“효정아, 가지 마. 다 끝났어.”

“끝나긴 뭐가 끝나! 그냥 내버려 둘 거야, 그 미친놈?”

 재희는 신발에 발을 구겨 넣는 효정을 다시 끌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다른 사람한테 엄청 맞았어. 그러니까 우선 내버려 둬.”

“왜? 언니, 도대체 왜 그렇게 민철 오빠한테 물러? 왜 그래!”

 효정이 소리를 꽥 질렀다. 재희는 외투를 벗고는 옷걸이에 걸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너 구해 준 사람이니까.”

 그 일만 없었어도. 그 일만 아니었으면 민철과 사귀는 일도, 그에게 이런 일을 당하고도 용서해 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내 새끼 효정이를 구해 준 사람이니까. 이번 한 번은 넘어갈 생각이었다.

“날 구해 주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새끼가 날 왜 구해.”

 욕실로 향하는 재희를 따라붙으며 효정이 물었다. 재희는 손을 뻗어 효정의 뺨을 매만졌다. 따뜻한 동생의 온기를 느끼니 비로소 마음이 풀린다. 내 집. 우리 효정이. 내 공간. 이제 위험한 건 없다.

“기억 안 나? 너 골목 계단에서 넘어져서 다쳤을 때 수습해 준 게 민철이잖아. 내가 충격으로 아무것도 못 할 때 와서 해결해 준 사람. 그때 민철이 아니었으면, 너…….”

 말하는 중간에 목이 메 호흡을 꼴깍 삼켰다. 효정이가 그때 잘못됐더라면 저도 없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눈물이 날 것 같은데. 그리고.

‘괜찮아, 재희야. 괜찮아.’

 그날 제 귓가에 속삭여 주던 그 목소리. 확실히 기억할 수는 없으나 아련하게 흔적처럼 남아 있는.

 간신히 버티고 있던 자신을 애틋하게 위로해 준 것 역시 민철이 아니었나. 그날 느꼈던 그 따뜻함이 없었더라면 정말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 언제보다 나약해졌을 때 파고들었던 빛. 진창 속에서 끌어 올려 다시 품어 줬던 온기. 그게 정민철이었다. 그러니 한 번은 용서해 줘야지.

 효정은 잠시 침묵했다.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욕실 안으로 들어서는 재희의 등을 향해 의아한 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때 나 병원에 데려다줬던 거, 강주 오빤데.”

“뭐?”

“언니가 강주 오빠한테 연락했잖아. 강주 오빠가 수습 다 해 주고, 병원비 다 내 주고. 근데 왜 갑자기 민철 오빠를 찾아? 그때 일시적 기억상실 왔다는 게 거기서부터였어?”

 불을 켜려던 손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몽유병처럼 속삭인다.

“내가 눈 떴을 때 본 건 민철이였어.”

“언니가 골목에서 휴대 전화 잃어버렸었잖아. 그날 밤에 민철 오빠가 언니랑 연락 안 된다고 대신 나한테 연락했었거든. 언니 한창 쫓아다녔을 때니까. 나 그때 정신 차렸을 때라, 내가 병원이라고 하니까 걱정된다고 와 본다더라. 그래서 뒤늦게 온 거지.”

“…….”

“강주 오빠가 아는 의사랑 얘기한다고 잠깐 어디 간 사이에 민철 오빠 왔기에, 나 MRI 찍으러 들어가니까 언니 봐 달라고 했단 말이야. 혹시 그래서 잘못 안 거야?”

 재희의 얼굴이 파리하게 식었다.

 그동안 난 무얼 오해한 걸까. 도대체 뭘.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이 반 바퀴 빙글 돌았다. 거꾸로 매달린 기분이었다. 알고 있던 것들이 모두 아래로 쏟아져 버린다. 그리고 거짓을 몽땅 털어 내자 드러난 건, 차강주.

 강주 오빠.

“그 새끼한테 도움받았다고 착각해서 봐줬어? 와, 그놈도 진짜 웃긴 놈이네? 제가 뭘 했다고 언니한테 생색을 내!”

 효정의 억센 목소리가 그대로 흘러 지나갔다.

 그날. 효정이를 구해 준 것도. 정신없던 절 추슬러 챙겨 준 것도. 제 귓가에 속삭여 줬던 다정한 목소리도. 위로해 주던 품도. 모두, 다.

쏴아아아아- 재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부엌에 달린 자그마한 창 뒤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자그맣게 내리던 눈송이가 차가운 겨울비가 됐나 보다.

 문득 강주의 말이 떠올랐다.

‘알잖아요, 비 오는 날 나 병신 되는 거.’

 그날 이후. 고등학생 때 비 오는 날 창고에 갇혔던 그날 이후, 강주는 비가 올 때면 유독 힘들어한다고 전해 들었었다. 폐소공포증이 심해져 자동차도 타지 못한 채 등교했다고, 엄마가 말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차 회장은 혀를 찼다고.

 재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옷걸이에서 코트를 꺼내 정신없이 입고 현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언니, 어디 가? 갑자기!”

“효정아, 오늘 혼자 잘 수 있지?”

“내가 앤가? 혼자 잘 수는 있는데……. 아니, 어디 가냐고!”

 효정은 계단을 탕탕거리며 올라가는 재희의 등 뒤를 향해 물었다. 재희는 걱정하지 말라며 손만 내젓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차갑게 내리는 빗속으로.

 콩콩콩.

 재희는 작게 문을 두드렸다. 외부인이 잘 방문하지 않는 그의 집은 초인종마저 소리를 죽여 놓아 누를 수가 없었다.

“상무님.”

 입술 틈으로 차가운 한기가 흐른다. 재희는 그를 부르며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상무님, 계세요?”

 무슨 용기인지 모르겠다. 이곳에 왜 찾아온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겨울 하늘처럼 메말랐던 그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 그날 절 위로해 줬던 온기가 그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충동적으로 뛰어온 것이었다.

 안에서는 답이 없었다. 재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충동을 넘어선 짓을 해 보기로 했다.

 긴장에 찬 숨을 내쉬며 지문 인식 장치 위에 엄지를 올렸다. 하지만 그녀가 문을 열기 전. 아무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어두컴컴한 복도 위로, 안에서 스며 나온 희미한 빛이 내린다. 그림자 진 그녀의 몸을 세로로 가르고, 환한 빛줄기가 생겼다. 얇게 저며진 빛은 강주가 문을 온전히 열자 그녀를 환하게 뒤덮었다.

 채도 낮은 조명 빛. 그 빛 속에서 나른히 풀어진 강주가 나왔다.

“…재희 씨.”

 조금은 놀란 것 같은. 환상을 보는 듯한 눈동자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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