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예쁘다.”
재희는 곱게 포장한 향초 박스를 살펴봤다. 곧 돌아올 강주의 생일 선물이었다. 모든 걸 가진 사람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건 퍽 힘든 일이다. 오빠가 어둠을 싫어하니까, 초를.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산 것이었다.
“그런데 이거 받아 주려나.”
최근 강주의 태도가 조금 이상해졌다. 주말이 됐는데도 잘 찾아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효정이의 공부를 봐주며 함께 얘기도 하고 시간을 보냈을 텐데.
‘혹시 그 일 때문일까. 그날. 그날 내가 오빠한테 얼굴을 막 들이밀어서…….’
재희의 얼굴이 금세 울적해졌다. 키스를 한 건 그였건만 먼저 다가간 건 자신이었다. 그것도 아파서 정신이 없는 사람을 향해. 어쩌면 얼굴이 앞에 있으니 본능적으로 끌어당긴 것일 수도 있고.
그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재희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 주위에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모여드는지. 중심에 서서 먹이사슬 꼭대기를 차지하는 건 늘 그였으니까.
내가 자신을 덮쳤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혐오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답을 찾을 수 없어 자책만 했다.
다음 날. 재희는 야간 자율 학습 후 홀로 집으로 걸어갔다. 보통 때라면 엄마가 데리러 나왔을 텐데 바빠 그런지 혼자 가게 됐다. 고급 주택가에 밤이 깔리면 차만 지나갈 뿐 인적이 드물다.
그림자를 길게 달고 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불러 왔다.
“윤재희.”
뒤를 돌아보니 임지예였다. 권은영, 이해란과 함께 절 따돌리려 하고 SNS에 욕설을 올려놓았던 그 애.
어느 날 갑자기 이사장의 명으로 학폭위가 열리더니 학교 내 폭력으로 정학 처분이 떨어졌다. 재희 자신은 신고한 적이 없었는데.
생기부에 적히게 생겼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세 명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들이 재희만 괴롭혔던 것이 아닌지라 그 누구도 동정하지 않았었다.
한데 갑자기 얘가 날 왜 찾아왔을까.
“얘기 좀 해.”
지예는 뒤를 향해 손짓했다. 여기서 몇 분 더 가면 놀이터가 나오는데, 거기서 얘기하자는 것 같았다. 혹시 사과라도 할 셈일까. 재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놀이터에 도착해 보니 커다란 남자 한 명이 절 기다리고 있었다. 지예의 오빠, 임지원이었다.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었다. 처음 임지예와 싸웠을 때 절 혼내 준다며 찾아왔었다.
지원은 재희가 도착하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와 팔부터 억세게 붙들었다.
“야, 너 내일 당장 이사장한테 찾아가. 찾아가서 다 제대로 돌려놔.”
“뭘요?”
“네가 다 잘못 안 거라고, 네가 다 지예한테 덮어씌운 거라고!”
아아,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갔다. 학폭위가 열려 정학 처분을 받았으니, 지금 어떻게든 그걸 돌려놓으란 거다.
“학교에 말한 거 저 아니에요.”
“네가 했든 안 했든! 야, 막말로 지예가 너 때렸어? 발로 차고 밀었어? 별것도 아닌데 혼자 피해 의식에 빠져서 지랄하니까 이런 사달이 난 거 아니야!”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글 올린 것도 지예고, 저 왕따시키려 했던 것도 지옌데 왜 저한테 그러세요? 애초에 그럼 동생 단속을 잘하든가.”
재희가 그를 담담히 비웃었다. 그 태도에 지원은 더욱 부아가 치민 것 같았다. 혼자 씩씩거리던 그가 위협하듯 솥뚜껑만 한 손을 확 치켜들었다.
뒤에 있던 지예가 악을 내질렀다.
“거봐 오빠, 내가 저년 독하다고 했잖아!”
임지원이 재희의 어깨를 툭툭 밀기 시작했다.
“야, 네가 아직 뭘 잘 모르나 본데. 내가 진짜 너 가만 안 둘 줄 알아. 우리 엄마가 의사고, 우리 아빠-”
“아빠는 변호사라고요. 알아요. 돈 없고 빽 없는 제가 상대 안 되는 거.”
툭툭, 떠밀리며 재희가 답했다.
임지예가 매일 했던 말이다.
넌 이 학교 어떻게 왔어? 우리 엄마 의사고, 우리 아빠 변호사인데 너네 엄마는 가정부라며. 우리 엄마 아빠가 쌔 빠지게 돈 벌어서 학비 낸 거, 너같이 가난한 년이 장학금이라고 가져가는 거야? 아주 도둑년이네.
“학교에 똑바로 얘기해서 다 돌려놓으라고, 이 거지 같은 년아!”
그에게 밀쳐져 뒷걸음질 칠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재희의 어깨를 팍팍 밀던 그가 옷깃까지 거칠게 붙들어 흔들었다. 재희의 맨 위 단추가 툭 떨어져 나갔다.
“아!”
재희는 그의 우악스러운 힘에 비틀거리다가 손을 허우적거리며 넘어졌다. 휘저은 손이 스치듯 지원의 뺨을 지나쳤다.
“야, 사람 치냐? 씨발, 네가 먼저 쳤다? 어?”
“오빠! 내가 찍었어! 저년이 오빠 친 거 찍었어!”
“이거 정당방위라고!”
지원이 재희의 멱살을 거칠게 붙들었다.
상체가 들린 재희의 눈에서 공포가 뚝뚝 떨어졌다. 뜯어진 옷깃 사이로 찬 바람이 스민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가 도대체, 뭘. 그의 손바닥이 금세 절 내려칠 것만 같다.
재희는 두려움에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뒤이어 느껴지는 건 뺨 위의 둔탁한 통증이 아니었다.
“꺄악!”
지예의 째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절 움켜쥔 우악스러운 손아귀 힘도 사라졌다. 어디서인가 뼈 어그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재희는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다문 채 눈을 떴다.
“악! 왜 이래! 뭐야, 씨- 억!”
비틀거리며 악다구니를 쓰던 지원이 강주의 발길질에 바닥으로 푹 쓰러졌다.
“야! 이 미친 새끼가- 으악-!”
지원의 욕설과 고통에 찬 고함이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그를 발로 찬 강주는 다시 지원의 멱살을 붙들고 주먹을 휘둘렀다.
섬뜩한 타격음이 이어졌다. 강주의 무자비한 주먹질과 발길질에서 벗어나려던 지원은 이내 애원조차 하지 못한 채 축 늘어졌다.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새빨간 피에 재희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제야 정신 차린 지예가 달려들었다.
“우리 오빠 때리지 마!”
하지만 절 찬찬히 돌아보는 강주의 눈빛에 그대로 우뚝 멈췄다. 무감정한 눈은 한기가 서릴 만큼 서늘했다.
굳어 있던 재희가 그제야 강주를 향해 다가갔다. 강주는 다시 미동도 없는 사내를 내려치고 있었다.
“오빠.”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추스르고, 휘청이는 몸을 겨우 바로 세웠다. 그리고 그를 애타게 만류했다.
“오빠, 그만해. 응?”
그제야 강주의 움직임이 멈췄다. 툭. 강주가 멱살을 쥔 손을 놓자 커다란 지원의 몸이 쿵 하고 아래로 떨어진다. 강주는 찬찬히 몸을 세워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는 재희에게 다가갔다.
가만히 그녀 얼굴을 들여다본다.
“재희야, 괜찮아?”
재희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둑한 밤. 새파랗게 튀는 그의 눈동자가 지독히도 낯설었다.
***
“너, 이 새끼. 제정신이야!”
차 회장의 목구멍을 뚫고 나온 목소리가 꽝꽝 울린다. 짝! 차 회장의 손찌검에 강주의 뺨에 벌건 자국이 났다. 강주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뺨으로 침묵을 지킬 뿐이다.
“미친놈도 아니고, 사람을 그렇게 때리는 새끼가 어디 있어? 지금 그거 무마하려고 얼마나 곤란한지 알아? 이거 알려지면 우리 회사 평판이 뭐가 돼, 이 정신병자 새끼야!”
차 회장의 흥분으로 집 안이 들썩였다.
아아, 회사 평판. 강주는 픽 웃더니 그대로 뒤를 돌았다.
“야! 어디 가! 야!”
뒤에서 차 회장의 악다구니가 들려왔지만 그대로 무시했다. 회사 평판이고 뭐고, 다 알 게 무언가. 감옥에 처넣을 거면 넣으라지. 제게 소중한 건 단 하나뿐인데.
서늘함이 옷깃을 파고든다. 강주는 피가 말라붙은 손등을 옷에 대충 문질러 닦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생각나는 건 하나였다.
재희.
한 시간 전. 늦은 밤이 됐는데 가정부인 미령이 집에 있었다. 재희를 데려갈 시간이었는데. 왜 있냐고 묻자 차 회장이 늦게 저녁을 차려 달라고 말해 데리러 가지 못했다고 했다.
강주는 그 말을 듣자마자 집을 나섰다. 하지만 남몰래 그녀를 기다림에도 재희는 오지 않았다. 괜히 이곳저곳을 거닐었다. 그러다 발견했다. 우악스럽게 재희의 멱살을 잡은 웬 남자와, 파들파들 떨리는 재희의 어깨를.
그 이후로 생각나는 건 잘 없다. 그곳으로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는 것밖에는. 그리고 폭력적인 흥분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때. 재희의 목소리 하나에 현실로 돌아왔었다.
정말 그것밖에는 기억나는 게 없었다. 절 어둠 속에서 멱살을 잡고 끌어 올려 주는 건 늘 재희 하나뿐이었다.
강주는 모퉁이를 돌아 후원으로 들어섰다. 저 멀리, 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모친, 미령의 목소리까지.
“괜찮아, 재희야? 무슨 일이야.”
“…….”
“재희야, 재희야? 괜찮은 거야?”
“…무서워.”
떨리는 숨을 간신히 삼키고, 재희가 속삭이듯 답했다. 강주의 발걸음이 그대로 굳었다.
“뭐가 무서워, 응?”
“오빠……. 강주 오빠가… 무서워서…….”
초조하게 목소리를 떨던 재희가 이내 눈을 감았다. 참았던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파들파들 떨리는 어깨에 그녀의 공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떡해, 너무 무서워…….”
강주는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머리가 멍했다.
무섭다니.
차 회장의 목소리가 울린다. 이 정신병자 새끼가.
그래, 애초에 난 정상이었던 적이 없는데.
어둠 속에서 발작처럼 공황에 빠지던 절 안아 주던 재희. 아까, 이성을 잃고 주먹을 마구 휘두르던 절 두려움에 떨며 만류하던 재희.
내 마음을 알자 피하던 재희. 손만 닿아도 흠칫 놀라 혐오하던 재희.
재희. 재희.
강주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의 세상이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비틀린 원망이 잔인하게 속삭였다.
‘네가 무섭대.’
비참한 현실이 아프게 들이닥쳤다.
‘어쩔 수 없잖아. 재희 앞에서는 늘 병신이었는데.’
그러다 결국 억누르지 못한 충동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그럼에도, 갖고 싶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이 무어냐 묻는다면 주저 없이 답할 수 있었다.
윤재희.
그런 윤재희를 아프게 할 이가, 두렵게 할 이가, 결국 못난 소유욕과 집착으로 어그러뜨릴 수 있는 이가 누구냐 묻는다면……. 그 역시 단박에 답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내 스스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재희야.”
“재희야…….”
캄캄한 어둠 속. 강주는 그녀 이름만 몇 번이고 불렀다. 애타게, 처절하게.
***
재희는 선물을 쥔 채 정원 조경석 위에 앉아 있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화단은 평화로워 보였다. 며칠 전 보았던 그 참혹했던 광경과는 다르게.
피에 젖은 강주 오빠. 달빛 아래 파랗게 튀어 오르던 강주 오빠의 가라앉은 눈.
무서웠다.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강주 오빠가 다칠까 봐. 작은 잘못으로도 오빠를 가두는 차 회장이 그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결국, 그러다 오빠가 정말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날 위해서 뛰어들었던 건데, 그 일로 강주가 상처 입을까 봐 너무나 두려웠던 것이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나만 아니었으면.
치밀어 오르는 죄책감을 곱씹으며 입술을 깨물 때였다. 저 멀리, 강주가 보였다. 주저주저 그를 향해 다가갔다.
“오빠.”
절 물끄러미 응시하는 눈이 차가웠다.
최근 엄마를 통해 그의 유학 소식을 들었다. 폭행 사건을 간신히 무마시킨 차 회장이 그를 기어코 해외로 내보낸다는 것이었다. 강주는 전과 달리 반항하지 않았다. 남은 건 출국뿐이었다.
재희는 절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강주를 향해 때 지난 생일 선물을 내밀었다. 강주는 눈을 내려 그것을 확인했지만, 손 뻗어 받지 않았다.
재희는 민망함에 손을 내렸다. 포장지가 너무 싸구려 같은가. 나름 애써 고른 건데.
“오빠, 유학 가?”
“…….”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미리 마음의 준비도 못 했는데, 서운하게.”
재희는 잔디를 앞발로 비비며 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애써 장난스럽게.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아 간신히 목소리를 내리눌렀다. 이루어지리라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이렇게 갑자기 떨어질 줄은 몰랐는데.
어쩌면 다시는 오빠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철모를 시절 이어 갔던 인연은, 아마 흔적도 없이 휘발되겠지. 어차피 사는 세계가 다르지 않은가. 이제 그는 얼굴을 마주하기조차 힘든 사람이 될 테니까.
이제 정말 끝인 것이다.
애가 타고, 슬프고, 마음이 미어져 참을 수가 없었다. 제 주제 모를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어 더욱 마음이 바스러졌다.
그때. 머리 위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재희야, 네가 안다고 뭐가 달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