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그날 이후. 강주는 비가 오는 날이면 늘 힘들어했다. 자동차조차 타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굳었다. 혼란에 빠진 채 어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드는 자신을 마주할 뿐이었다.
새까만 창고를 가득 채우던 빗소리. 뜨겁게 열이 올랐던 재희.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나약한 자신.
비가 올 때마다 두려움을 닮은 감정이 질척하게 그를 붙들었다. 진득하고 음습한 공간으로 한없이 깊숙하게.
***
재희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강주가 떠나자마자 정신을 차렸는데, 자신이 왜 병원에 누워 있는지조차 알 수 없어 눈만 끔뻑였었다.
고개를 내리자 제 손을 꼭 잡고 이마를 훔치는 엄마가 보였다. 긴장했는지 손이 차게 식어 있었는데 그게 시원해 재희는 한 번 웃었다.
“뭘 웃어. 아픈 애가 뭐 좋다고.”
“뭐야? 나 여기 어떻게 왔어?”
“강주 학생이 데리고 왔어. 다 큰 애가 왜 오밤중에 돌아다녀. 강주 학생이 너 발견하고 엄청 놀란 거 같더라.”
“아……. 그럼 오빠는?”
“갑자기 열이 올라서 경호원이 억지로 데리고 집에 갔어. 너 깨는 거 본다고 했는데…….”
열이 올라? 나한테 옮았나……. 난 다 나았는데.
목은 아직 칼칼했지만, 가뿐하게 앓고 수액 한 번 맞고 나니 놀라울 정도로 평소로 돌아왔다.
“나 집에 갈래. 다 나았어.”
재희의 말에, 모친 미령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멀쩡해? 젊은 게 복이지. 그래, 가자.”
집, 그러니까 본채는 텅 비어 있었다. 재희는 어깨에 숄을 걸친 채, 부엌에서 일하는 엄마를 도와 부산스레 움직였다.
“아픈 애가 왜 이래?”
“다 나았어. 움직여야 더 나아.”
재희의 모친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재희를 끝까지 쫓아내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일이 밀려 있던 참이었다.
재희는 엄마를 도와 이것저것을 건네다가 하얀 미음을 한참이나 저었다. 다 저은 미음은 오목한 그릇에 단정하게 담겼다.
“이거 강주 학생 주고 와.”
“오빠한테? 내가?”
“응, 엄마 바빠서. 학생 자면 깨우지 말고 살짝 다시 갖고 와. 알았지?”
미령이 걱정스레 말했다. 그녀가 아는 차강주는 예의 바른 학생이었지만 동시에 예민하고 차갑기도 했다. 혹여 재희가 강주의 심기를 거스를까 걱정스러웠다.
재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쟁반을 들고 차박차박 계단을 올랐다.
“오빠.”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새하얀 햇살이 쏟아졌다. 그는 웬만해서는 커튼을 내리지 않았다. 꽉 막힌 공간이 싫은 거겠지.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재희는 마음이 욱신거렸다.
침대 옆 탁자에 쟁반을 놓고 침대가에 앉았다. 말끔한 얼굴이 보였다. 진짜 아픈 모양인지 제가 들어온 줄도 모른 채 자고 있었다. 열이 올랐다고 하더니 끙끙 앓고 있나 보다. 무슨 릴레이도 아니고 나 다음에는 오빤가.
볕이 강한지 미간에 미약한 신경질이 맺혀 있다. 재희는 힐끔 문을 돌아봤다가 그의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잘 때 누가 이렇게 인상을 써…….”
그리고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최근 그와 얼굴을 마주하노라면 부끄럽고 속이 달아서 고개를 돌리느라 바빴다. 이렇게 찬찬히 훑어보는 건 아무래도 오래간만인 것 같다.
‘꼭 천사 같네. 어쩜 이렇게 생겼지.’
다시 힐끗 문을 돌아봤다가 조심스레 강주의 뺨을 건드렸다.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뺨이 열 때문인지 달아올라 있었다.
차강주. 강주 오빠. 나 오빠가 너무 좋은데 어떡하지…….
엄마가 이곳 가정부가 아니었다면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했을 상대다. 신분의 차이라는 게 없는 시대라지만, 그보다 더한 계급의 벽은 아직 존재한다.
그와 저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아무리 그를 좋아한다고 한들 그 마음을 표현해서조차 안 되는 그런 벽이.
재희는 다시 고개를 돌려 꽉 닫힌 문을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강주를 향해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렸다.
그에게 고백하고 싶다는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 같은 건 없었다. 그냥 가까이에서. 가까이에서 한 번 바라보고 싶었다. 그의 가지런한 속눈썹, 예쁜 입술. 언젠가 때가 되면 다시 볼 수 없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다 용기 내어 입술을 살짝 댔다.
“아……!”
순간 재희의 심장이 덜컥 떨어져 내렸다. 강주가 눈을 뜬 것이다.
고열로 달아오른 강주의 눈매가 가깝다. 환한 햇살 아래, 강주의 눈동자가 선연히 빛나고 있었다. 마치 절 헤집을 것처럼 깊고도 짙게. 재희는 차마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저기, 그게-”
그녀의 변명은 이어지지 않았다. 손을 뻗은 강주가 재희를 그대로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둘의 입술이 놀랄 새도 없이 맞붙었다. 깜짝 놀라 달싹거리는 입술 틈으로 혀가 파고든다. 오가는 숨결, 거칠게 섞이는 혀가 불덩이같이 뜨거웠다.
재희는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몸 위로 넘어졌다. 목덜미를 휘감는 그의 손바닥이 뜨겁다. 몸을 뒤덮는 열기가 그의 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강주는 재희를 잡아끌어 제 위에 올렸다. 그녀의 입술을 정신없이 삼키며, 그녀를 단단히 옭아매고 타액을 받아 삼켰다. 도망가는 혀를 휘감고 휘저으며 절 밀어 넣었다.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이고. 밀어 넣고 또 밀어 넣어도 부족한 것처럼 절박하게.
여린 커튼이 휘날린다. 둘의 몸을 슬며시 덮는 커튼 아래, 끈적한 소리가 울렸다.
재희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던 손이 아래로 내려왔다. 커다란 손바닥이 등을 쓸고 따라와 재희의 셔츠 아래로 들어왔다.
그가 맨살을 더듬을 때마다, 재희의 솜털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손길이 닿는 살갗이 불타는 것처럼 달아올랐다.
그러다 기어코 손끝이 브래지어까지 더듬었을 때, 재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손은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멀어지는 그녀의 얼굴을 따라 입술이 계속 따라붙었다. 멀어지는 재희의 몸을 끌어당겨 다시 혀를 밀어 넣고 젖은 살덩이를 빨아 당겼다.
숨이 벅차 학학거리는 숨결을 삼키고, 입가에 흐르는 타액까지 모조리 핥았다.
얼마나 붙어 있었을까. 흐느적거리는 재희의 몸이 온전히 힘을 잃었을 때. 입술이 떨어졌다.
축축한 소리와 함께 뜨거운 입술이 멀어졌다. 달뜬 숨이 벌어진 틈 사이를 메꾼다. 재희의 눈이 황홀함에 반쯤 풀렸다. 강주는 쏟아지는 재희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입술과 함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살갗 위에 미끄러졌다.
“재희야.”
재희는 제 이름만 부르는 강주 위에 그대로 늘어졌다. 마주 닿는 몸이 뜨겁다. 야릇한 여운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재희야…….”
이상하지.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 강주의 목소리가 꿈결같이 애달프게 느껴졌다.
잠시 후. 강주는 재희를 꽉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열병에 휩싸인 몸은, 절 휘감은 흥분을 안고 다시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재희는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심장 박동이 너무나 거세 가슴께가 묵직하게 아팠다.
어떡해. 오빠가 나한테 키스해 줬어. 내 첫 키스가 오빠랑.
어떡해.
너무 좋아.
이거 꿈인가.
근질거리는 손만 꽉 쥔 채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다가 몸이 간지러움으로 뒤틀리는 것 같아 그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재희가 품을 벗어나자, 강주의 손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아 눌렀다. 깜짝 놀란 재희가 그를 돌아봤다. 천사처럼 자는 강주가 보였다. 꿈결 중에 한 행동 같았다.
재희는 한동안 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여전히 입술 위에 온기가 남아 있는 것만 같다.
‘오빠랑 나랑 아까…….’
그러다가 아래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화들짝 놀라 문밖으로 나섰다. 잘못을 저질렀다가 들킨 아이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텅그렁. 그녀가 탁자에 올려놓은 죽 그릇이 넘어졌다.
강주는 천천히 눈을 떴다. 해는 이미 져 있었다. 방 안에는 짙은 어둠이 가득했다. 느릿하게 옆자리를 더듬었다. 차가운 냉기만이 만져졌다.
“…….”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 얼마나 우두커니 앉아 있었을까.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복도에서 조명 빛이 희미하게 줄기를 뻗는다.
문 사이로 들어온 건 미령이었다.
“강주 학생, 일어났어? 뭐 좀 먹어야지. 아플 때 더 잘 먹어야 해.”
쟁반을 들고 들어온 그녀는 걱정스러운 말과 함께 불을 켰다. 강주는 눈이 부셔 눈썹을 찡그렸다. 탁자 아래, 죽 그릇이 엎어져 있다.
아이고, 하고 탄식한 미령이 걸레를 가지러 나갔다.
다시 들어온 미령이 바닥을 훔치기 시작했다. 강주는 미령이 가져온 물을 마시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재희, 제 방에 들어왔었어요?”
미령의 손이 흠칫 멈췄다. 엎어진 죽 그릇. 심기가 좋아 보이지 않는 강주. 강주가 예민할 때는 되도록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
아무래도 재희가 죽 그릇을 엎고 나간 것 같은데 그 사실을 강주 학생에게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는 일. 회장님 안 계실 때 본채로 들어오게 한 것도 신경 쓰이는데, 재희에게 화를 내면 어찌하는가.
‘재희 얘는 강주 학생 자면 다시 죽 그릇 들고 오라니까, 왜 엎기까지 해서는.’
미령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안 왔는데. …왜?”
“…아니에요.”
강주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스몄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강주는 샤워 후 방의 불을 끈 후 커튼을 모두 열었다. 달빛이 밝아 어둠이 그리 무섭지 않은 밤이다.
홀로 우두커니 앉아 가만히 입술을 더듬었다. 차가운 물로 씻었음에도 열기가 가실 줄을 몰랐다.
무릇, 감기 때문에 만은 아니었다.
손바닥 아래 부드럽게 달라붙던 피부. 부드러운 입술과 젖은 혀. 뜨거운 숨결. 절 밀어 넣고 밀어 넣어도 느껴지던 애타는 갈증.
그녀가 환상이었을지언정 제 속에 치미는 욕망은 선연히 남아 있었다. 더러운 충동과 풀어내지 못한 욕구가 응어리져 뜨겁게 고여 있다.
재희를 마구 흐트러뜨리고 싶었다. 그 가느다란 허리를 움켜쥐고 마구 핥으며 발가벗기고 싶었다. 숨결을 나누는 꿈속에서조차 목이 말라 미칠 것 같았다. 재희의 혀를 빨아 당기고 타액을 삼키면서도 만족은커녕 애가 탔다.
부드러운 몸을 옭아매어 온기를 느끼고 마구 밀어 넣어 절 모조리 새기고 싶었다. 끓어오르는 충동을 풀어내고, 엉엉 우는 재희를 보며 음습한 만족을 느끼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재희 속에 자신을 파묻고.
그리고.
저열한 욕망은 꿈에서 깬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해소되지 않는 욕구가 폭류처럼 몸을 휘감고 있었다.
강주는 입술을 짓씹으며 손을 내렸다. 그리고 욕망으로 단단하게 뭉친 제 것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어둑한 방 안에 젖은 마찰음이 울렸다.
“재희야, 재희야.”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탄식같이 새어 나왔다. 가쁜 호흡을 삼키며 손을 움직였다. 머릿속을 꽉 채운 한 사람의 망상으로 눈앞이 어지러웠다. 고열이 가시지 않은 몸이 충동과 뒤범벅되어 타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를 떠올리며 한참이나 손을 움직이던 그는, 곧 거친 숨과 함께 제 것을 쏟아 냈다.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렸다. 진득한 욕망이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는 게 보였다.
“씨발…….”
잇새로 억눌린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