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96)

 #27

“언니.”

“…….”

“언니!”

“응? 응!”

 효정이 두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재희는 정신을 차렸다.

“오빠가 말 걸었잖아. 아까부터 계속.”

“어?”

 재희는 눈을 끔뻑이며 시선을 움직였다. 효정 옆에 앉은 강주가 절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재희의 얼굴이 다시 휙 돌아갔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져 버린 탓이다. 삽시간에 얼굴이 달아올라 귀가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왜, 왜 불렀어?”

 애꿎은 바닥만 손끝으로 긁으며 재희가 물었다. 강주는, 여전히 제 시선을 외면하는 재희를 빤히 바라보다가 담담히 말했다.

“저녁에 효정이랑 같이 서점 가자고. 효정이한테 사 주기로 한 책 고르러.”

“아, 나 저녁에 약속 있는데.”

 그를 회피하며 답했다. 사실이었다. 곧 있으면 강주의 생일. 재희는 시간을 내 그의 생일 선물을 사러 가기로 한 참이었다. 깜짝 선물로 줄 생각이라 미리 말을 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강주의 시선이 재희를 훑었다.

 저번부터였다. 그러니까 창고에서 자신이 그녀를 끌어안았던 그때부터. 재희는 무섭고 꺼림칙한 것을 대하듯 절 피하고 외면하기만 했다.

 강주는 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고, 나지막이.

 ***

 날씨가 영 이상했다. 쨍쨍 해가 뜨다가도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폭우가 쏟아지다가도 갑자기 비가 멎어 물기가 바짝 말랐다. 이상한 날씨 때문일까. 왠지 으슬으슬 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재희는 효정의 머리를 감겨 주다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날 밤. 눈앞에 있던 강주의 얼굴. 조각같이 매끄러웠던 뺨과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 고개를 조금만 들면 닿을 것 같던 입술. 흩어지던 숨결.

 명치가 간지럽고 숨이 가빠졌다.

“으아!”

 재희는 쥐어짜는 소리를 지르며 샤워기를 휘둘렀다. 달아오르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소녀의 마음은 불긋불긋 타올랐다. 그래서 강주의 얼굴을 당당히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절 샅샅이 훑어 내리는 것 같은 깊은 눈을 마주하면 부끄러운 속내를 들켜 버릴 것만 같아서. 그에게 품은 연정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날 것 같아 무서워.

 첫사랑이란 게 이런 건가. 이렇게 마주하기도 부끄럽고 마음 떨리는 건가. 강주 오빠를 제대로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어. 어쩌면 좋아.

“언니, 왜 그래!”

 비눗물 범벅이 된 효정이 재희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재희는 으아으아, 하며 어금니를 물다가 효정의 머리카락을 다시 문지르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사랑의 열병에 빠져도 정말 단단히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밤이 되자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저녁만 해도 멀쩡했는데 마치 하늘이 찢어진 것처럼 쏟아졌다. 재희는 카디건을 챙겨 입고 창문을 닫았다. 서늘한 공기가 밀려들자 머리까지 아픈 것 같다.

 잠든 효정과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뜨거운 보리차를 들고 창가에 앉았다. 그러다 발견했다. 창고에 갇히는 강주를.

 빗소리 때문에 소리는 묻혔다. 만약 창가에 앉아 있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일.

‘왜 또? 요새는 저런 일 없었는데!’

 미국 유학 문제로 차 회장과 강주 사이 신경전이 계속됐다. 차 회장에게는 그 일이 아예 자존심 싸움 문제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뒤엔 당연히 강주가 갇히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재희가 몸을 일으켰다.

 차 회장, 이 나쁜! 그냥 벌일 뿐이라고, 괜찮다고 강주가 절 안심시켰지만 그게 아니란 걸 이미 알고 있다. 저건 정말 학대 아닌가. 강주 오빠는 가끔 숨도 잘 못 쉬는데.

 경호원들이 사라지자마자 우산을 들고 창고로 뛰어갔다. 쏟아지는 폭우에 우산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재희는 젖은 몸으로 창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강주를 향해 급하게 다가섰다.

“오빠, 강주 오빠.”

 오늘이다. 강주 오빠가 유달리 힘들어하는 날.

 강주는 빳빳하게 굳은 어깨로 앉아 있다가, 재희가 절 흔들자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텅 빈 눈동자가 환영을 좇듯 재희를 따라붙었다.

 재희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강주의 손을 꽉 잡았다.

“숨 쉬어. 응? 숨. 후, 하고 깊게. 얼른.”

 그의 호흡이 너무도 느릿했다. 재희는 강주와 함께 호흡하듯 자신이 먼저 후우 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마를 더듬어 보니 차게 식은땀이 배어났다.

 어떡해, 어떡해.

 재희는, 떨리는 강주의 손을 꽉 맞잡다가 강주의 목덜미에 매달리듯 안겼다. 그를 끌어안고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괜찮아, 응? 숨 쉬어, 얼른…….”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그를 달래듯 어루만졌다. 그제야 강주에게서 탄식 같은 숨이 흩어졌다.

 강주는 재희의 어깨에 살며시 이마를 댔다. 절 안아 주는 온기에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재희야.

 재희야.

 강주는 입 안으로 그녀 이름만 불렀다. 차마 그녀를 마주 안을 수가 없었다. 다시 끌어안으면, 저번처럼 피할까 봐. 다시 다가서면 절 차갑게 내칠까 봐. 그녀의 외면이 죽는 것보다 무서워서.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간절한 것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모친이 제게 쥐여 주는 값진 무엇에도 감흥이 없었다. 제 속에는 충동과 욕망이 없는 줄, 그렇게만 알았다. 윤재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의 애정을 제 속에 퍼 담고 퍼 담아도 늘 부족했다. 언젠가부터, 음습한 욕망이 뿌리를 뻗어 절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이 모든 건, 제 어딘가가 텅 비어 있어서. 윤재희 빼고는 아무것도 그 속에 담을 수가 없어서. 욕심이 제 주제도 모르고 자꾸만 치밀어 올라서. 윤재희 없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런 병신이라서.”

 강주는 재희의 내음을 맡으며 자조적으로 속삭였다. 따뜻한 맥박 소리. 향기로운 향기. 정신병자 주제에 내가 널 어떻게. 내가 어떻게 너를.

 한없이 환한 재희를 자신이 새까맣게 물들여 버릴 것 같아 두렵기까지 했다.

“응……?”

 재희가 가만히 반문했다. 빗소리에 그의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강주는 말을 잇지 않았다. 재희의 뜨거운 몸에 마구잡이로 파고들고 싶은 욕망을 애써 억누르며, 나지막한 숨을 내쉬었을 뿐.

 차가운 빗소리만이 창고 안을 가득 채웠다.

 쿵! 무언가 큰 소리가 난 것 같다.

 강주는 언뜻 눈을 떴다. 언제 잠이 든 걸까. 재희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가 눈을 감았을 뿐인데.

 옆을 더듬어 재희를 찾았다. 양탄자 위에 누워 있는 그녀의 형체가 보였다.

 달마저 빗물에 숨은 밤. 칠흑 같은 공간은, 제 손가락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강주는 옷을 벗어 재희의 형체를 조심스레 덮었다. 우연히 그녀의 목덜미에 강주의 손끝이 스쳤다. 강주는 흠칫 손을 움츠렸다가 놀란 눈으로 재희의 목덜미에 손을 댔다.

 뜨겁다.

 강주는 다급히 재희의 이마에도 손을 대 보았다. 펄펄 끓는 것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재희야.”

 그녀의 어깨를 흔들어 다급히 이름을 불렀다. 평소라면 응? 하고 잠결에라도 반응을 보였을 텐데, 재희는 눈조차 뜨지 못했다.

“재희야, 눈 떠 봐.”

 재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순간 강주의 세상이 빙글 돌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고 문을 향해 달렸다. 사람을 불러와야 한다. 어서 밖으로 나가서.

 하지만 창고 입구에 도착하자, 그가 마주한 건 꽉 닫힌 창고 문이었다. 재희가 들어올 땐 늘 조금 열어 두었던 문인데. 밖에서만 열 수 있을 뿐, 안에서는 절대 열 수 없는 구조라 한번 닫히면 끝이었다. 아까 들렸던 쿵, 하는 소리가 아마 비바람에 문이 닫히는 소리였나 보다.

“문 열어!”

 강주는 철문을 쾅쾅 두드렸다. 난폭한 소음이 입구를 뒤흔든다. 하지만 굉음은 폭풍우 소리에 묻혀 퍼지지 못했다.

 강주는 문을 부서지라 두드렸다. 호흡이 힘들어졌다.

 이대로 문이 열리지 않으면, 재희는 아침이 될 때까지 이 추운 곳에서 앓아야 한다. 그러다가 만약 재희가 잘못되면. 잘못되기라도 하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졌다. 숨이 막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강주는 무릎을 꿇고는 헉헉 뿜어 나오는 숨을 골랐다.

 병신 새끼. 정신 차려. 그러다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나 재희를 향해 다가섰다.

“재희야! 재희야!”

 매사에 침착하고 평온했던 차강주는 없었다. 스스로를 힐난하며 재희의 뜨거운 이마를 만지던 강주가 다시 일어나 문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문을 두드리고 발로 차기 시작했다.

“문 열어, 문 열라고!”

 쾅! 쾅! 거친 발짓에 녹슨 경첩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하지만 빗소리에 가로막혀 저택까지 닿지는 않았다. 마구잡이로 퍼붓는 비가 이토록 두렵고 원망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분노인지 공포인지 모를 감정으로 눈앞이 흐릿했다.

 얼마나 문 앞에서 미친 듯 날뛰었을까. 강주의 발길질에 덜컹거리던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쏴아아아- 빗소리가 사정없이 몰아쳤다. 강주는 비를 뚫고 정신없이 달렸다. 두려움으로 호흡이 힘들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데, 발을 멈출 수 없었다.

 저택에 들어가자마자 경호원이 대기하는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놀란 눈의 경호원 멱살을 잡고 우악스럽게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차 준비시켜!”

“어디, 어디를, 아니, 이게 무슨-”

 경호원이 허우적거리며 강주를 붙들었다. 반쯤 질질 끌려가며 “강주 학생!” 하고 이름을 불렀다.

 강주가 현관을 향해 그를 밀치며 이를 갈듯 소리쳤다.

“병원 가게 당장 차 준비시키라고!”

 강주의 형형한 눈빛이 헤집을 것처럼 쏘아졌다. 경호원은 그제야 무전기를 들고 운전기사와 연락을 시도했다. 강주는 다시 현관 밖으로 뛰어나갔다. 재희를 향하여.

 거칠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해일처럼 강주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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