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96)

 #25

 몇 년 후.

 고등학생이 되자 강주는 창고에 감금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제 머리가 큰지라 차 회장에게 반항하지 않고 죽은 듯 조용히 살아갔기 때문이다.

 창고에서 재희와의 조우 또한 드물었는데, 둘이 만나는 곳은 이제 창고가 아닌 작은 방이 되었다. 강주의 방이 아닌, 후원에 딸린 작은 가정부의 방.

“오빠, 나 이거 모르겠어. 이해가 안 가.”

 강주의 맞은편. 초등학생이 된 효정이 강주를 향해 물었다. 작은 좌상에 앉아 문제집을 풀던 강주가 고개 들어 효정의 문제집을 넘겨다봤다.

“저번에도 시간 문제 어려워했던 것 같은데. 효정아, 우선 한 시간은 몇 분이지?”

“60분.”

“맞았어, 여기 집에서 슈퍼까지 가는 시간은 25분으로 되어 있잖아. 그러니까 우선, 60분에서 25분을 빼고…….”

 차분하게 설명하는 강주의 말을, 효정은 눈을 반짝이며 경청했다. 벽에 기대어 동영상 강의를 보던 재희가 툭 끼어들었다.

“넌 나 내버려 두고 왜 강주 오빠한테만 물어?”

“언니는 맨날 나한테 화내잖아.”

“내가 언제?”

“문제 못 풀면 나 막 구박하고! 지금도 막 뭐라고 하고!”

 연필을 꽉 쥔 효정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자매의 실랑이를 듣는 강주는 옅게 웃었다. 환하고 시끌벅적한 이 작은 방은, 언제부터인가 강주의 꿈결 같은 쉼터였다.

 잠시 후, 효정이 눈을 비비며 낮잠에 빠져들었다. 강주와 재희는 각자 공부를 하다가 그림자가 길어진 오후가 되자 후원으로 나섰다.

“아직은 좀 춥다. 그치, 오빠.”

 조경석에 나란히 앉아 노곤노곤 햇볕을 맞았다. 재희는 두 팔을 뒤로 올려 기지개를 쭉 켰다.

“효정이 좀 그만 우쭈쭈 해. 쟤 요새 오빠한테 치대서 큰일 났어.”

“뭐 어때, 귀여운데.”

“귀엽긴 무슨. …뭐, 귀엽긴 하지. 우리 효정이.”

 배시시 웃은 재희가 뺨을 긁었다. 조그만 게 머리가 컸다고 삑삑거리기 시작했는데 그것까지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있잖아, 오빠. 내가 저번에 나랑 우리 반 애들이랑 싸운 거 얘기해 줬나?”

“응, 네가 이겼다며.”

“어어. 그런데 걔들이 SNS에 나 욕한 거 발견했다? 아빠도 없고, 가난한데 잘난척한다고 재수 없대.”

“…….”

 강주 얼굴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재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 말했다.

“나한테 완전 독한 년이래. 자기 같으면 엄마가 남의 집 가정부인 거 알려졌을 때 쪽팔려 죽었겠다면서.”

 그 나쁜 년의 오빠까지 절 욕하고, 기어이 학교 앞에까지 찾아왔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괜히 걱정할까 봐. 덩치만 커다란 멍청이가 절 협박하고 윽박지르는 게 뭐 별거라고.

 강주를 향해 고개를 돌린 재희가 깜짝 놀랐다.

“뭐야, 오빠 표정이 왜 이래? 무섭게.”

 강주의 입꼬리를 손가락 끝으로 쭉쭉 올리며 웃어, 웃어, 라고 말하곤 제가 먼저 웃는다.

“괜찮아, 다른 애들이 그거 보고 먼저 막 욕해 줬어. 덕분에 걔들이 더 욕먹고 있어, 요새.”

“…….”

“완전 나쁜 애들이지? 오빠한테 하소연하니까 마음이 좀 편하다. 엄청나게 분한 거 있지.”

 강주는 재희의 손끝에 잡혀 입꼬리가 올라간 채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치는 것 같았다. 재희와 싸웠다던 무리 세 명. 임지예, 권은영, 이해란.

 재희는 생각에 잠긴 강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던 손을 스르륵 뗀다.

 이따금 강주 오빠가 멀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예쁘게 펼쳐진 속눈썹이라든가, 우아한 콧대. 정적인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태생부터 모든 걸 쥐고 태어난 재벌 집 아들이란 게 상기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오빠가 대학교에 가고 우리 모두 성인이 되면 지금처럼 지낼 순 없겠지.’

 문득 서운함이 치밀었다. 그는 모를, 제 일방적인 마음을 홀로 사그라뜨려야 하는 아쉬움 역시.

 차강주. 강주 오빠. 제 첫사랑.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길이 갔다. 어둠 속에서 홀로 울고 있던 소년. 처연하고 예쁜 얼굴도 좋았고, 낮고 조용조용한 목소리와 침착한 표정, 소년답지 않게 어딘가 깊고 상처받은 듯한 눈동자도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그 예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노라면 자연히 둘의 시선이 맞닿았는데, 그때마다 목덜미가 달아올라 고개를 돌리고는 했다. 그를 향해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던 그때, 아마 마음이 시작됐던 것 같다.

 어두운 밤. 홀로 창고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의 손을 맞잡을 때. 제게 매달리듯 기대어 겨우 제자리를 되찾는 그를 마주할 때. 왜 그렇게 마음이 아릿하게 아팠던 건지.

 그게 그를 향한 마음 때문인 줄도 모르고 한때는 병인 줄만 알았다. 자꾸만 열이 오르고 심장이 뛰어서 아주 몹쓸 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었다. 밤새 두근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가슴만 콩콩 두드렸었다.

 재희가 홀로 과거에 젖어 있는 사이, 생각에 잠겼던 강주가 눈을 들었다. 피어오르는 햇살 속에서 둘의 시선이 고요히 부딪혔다. 그의 시선이 마치 속마음을 낱낱이 헤집는 것 같았다. 첫사랑을 향해 품고 있는 이 애타는 마음을.

 재희는 어색함을 이기지 못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아휴, 생긴 거 봐.”

“…….”

“너무 잘생겼어.”

“…….”

 강주는 난데없는 칭찬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가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재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귓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나 되게 뻔뻔하지. 이런 말 막 하고.”

 재희의 웃음기 어린 말에, 강주 역시 한 박자 느리게 웃었다. 그리고 뒤이어 부드럽게 말했다.

“난 독하고 뻔뻔한 사람 좋아해, 재희야.”

 순간 재희의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떨어져 내렸다. 재희는 고개를 휙 돌려 강주의 시선을 피했다.

 어떡하지. 내 얼굴 지금 엄청나게 빨개졌을 것 같아. 창피하게.

 그냥 하는 말인데. 그냥 하는 말일 뿐인데. 절 향해 짓는 미소를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 예쁜 눈매가. 절 가만히 응시하는 깊은 눈동자가. 모두 제 심중을 정신없이 뒤흔드는 것이라.

 ***

 강주는 속이 답답해 물을 한 잔 마셨다. 최근 흡수 합병으로 바쁜 차 회장이 오래간만에 시간을 낸 가족 저녁 시간. 강주는 동생 시은의 말에 적당히 대꾸해 주며 식사하는 중이었다.

 문득 차 회장이 물었다.

“공부는 잘되냐.”

“네, 아버지.”

“학교 이사장에게 듣자 하니 수업 태도도 좋고, 성적도 상위권이라고 하더구나.”

“네.”

 차 회장과 강주의 대화는 부자지간답지 않게 삭막한 벽이 있었다. 다정한 눈길조차 섞는 법이 없었다. 둘의 대화를 듣던 시은이 차 회장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아빠, 나도 이번에 10등 안에 들었어요!”

 그제야 딱딱했던 차 회장의 표정이 풀렸다. 이후 시은과 차 회장 사이에 조잘거리는 대화가 이어졌다. 강주는 눈을 내리깐 채 수저질만 했다.

“잘 먹었습니다, 그럼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잠시 후, 강주는 먼저 수저를 내려놓았다. 평소라면 차 회장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었으나 오늘은 속이 불편해 참기가 힘들었다.

“나가서 잠깐 기다려라. 식사 후에 할 말이 있으니.”

“네.”

 강주는 방으로 올라가려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로 갔다.

 거실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강주 뒤로, 두 부녀가 다가왔다.

“시은이, 넌 먼저 올라가.”

“왜요, 아빠? 나도 얘기 좀 같이 하자. 응?”

 시은은 투정 부리듯 차 회장 팔에 매달렸다. 강주와 마주하는 일이 드물었기에 이렇게 시간을 마무리 짓는 게 아쉬웠다.

 강주 오빠는 늘 제게 딱딱한 선을 그으며 그의 반경에 절 들이지 않았다. 보아하니 가정부 딸들과는 퍽 친밀하게 지내는 것 같던데.

 하지만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시은은 차마 강주에게 모른 척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오빠를 창고에 가두던 아빠를 여러 번 보았다. 두려움에 새파랗게 굳은 소년이 밖으로 끌려 나가는 것을 외면하고 무시했다.

 오빠가 뭔가 잘못한 게 있겠지. 아빠가 괜히 그러겠어.

 때로는 이유 없는 악의도 있을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 만약 알았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오빠는 정말 ‘내 오빠’가 될 수 있었을까.

“너는 올라가서 공부해. 아빠가 이따 들어가 확인할 거야.”

 차 회장의 말에 시은은 결국 발을 옮겼다. 왠지 모를 아쉬움으로 계단을 오르며 뒤를 돌았다. 부드럽지만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의 차 회장. 무표정하지만 언뜻 권태가 묻어 있는 강주.

 마주한 둘을 본다. 절대 섞일 수 없는 것 같은 호적상 부자를.

“드세요.”

 가정부가 찻잔을 차 회장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강주 앞에도 따끈한 초콜릿 한 잔을 내리며 미소 지었다.

“강주 학생은 핫 초콜릿. 뜨겁지 않게 살짝 식혔어. 맛있게 마셔.”

 곱고 단정한 외모. 나이가 들었음에도 여전히 우아한 그녀는 재희와 효정의 모친이자 이곳의 가정부인 강미령이었다. 차를 내주고는 미령은 다시 자리를 떠났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강주의 담담한 물음에 차 회장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목이 타는지 홍차를 몇 모금 마시고는 큼큼, 목을 울린다.

“학교생활은 어떠냐.”

“할 만합니다.”

“영어 실력이 좋다고 하던데.”

“어릴 때부터 배웠으니까요.”

 강주는 덤덤히 대꾸했다. 이런 신변잡기를 물으려 부른 건 아닐 텐데. 별 필요 없는 질문만 나열하던 차 회장이 이윽고 폭탄 같은 본론을 던졌다.

“너, 대학은 미국으로 가라.”

“네?”

“아비가 다 준비해 둘 테니까, 우선 몸만 가.”

“…….”

“마침 네 국적이 미국이기도 하고……. 지금 가서 세컨더리 12학년 더 다녀라. 거기서 MBA까지 따고 들어오면, 그때 회사에 자리 하나 내어 줄 테니.”

 차분하던 강주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갑자기 이 무슨 말인가. 한국을 떠나 미국을 가라니.

 늘 절 눈엣가시로 여기는 차 회장이었기에 언젠가는 내치리라 생각은 했으나, 이런 식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발끝부터 한기가 타고 오르는 기분이다.

 차 회장의 학대에도 침묵으로 버텼다. 절 깔아뭉개며 무시하는 그의 경멸 역시 인내하며 참았다.

 언젠가 생일 선물로 무얼 받고 싶냐는 모친의 질문에, 강주는 농담처럼 답했었다.

‘대학에 가면 따로 나가 살고 싶어요. 좋은 집 하나 마련해 주세요.’

 모친은 벌써 둥지를 떠나 날아갈 생각만 하느냐며 웃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네가 혼자 자립할 시간이 되면 그리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래서 견딜 수 있었다.

 때가 되면 그 애에게.

 그 애와.

 그 희망만을 기다리며 지옥을 버텼는데.

 강주의 눈빛이 서늘하게 벼려졌다.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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