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회의가 끝난 뒤, 재희는 콧노래를 부르며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주머니에 강주가 준 보너스가 있다. 택시비로 준 돈인 20만 원도 아껴 모아 놔야지.
예상하지 못했던 돈이라 더욱 기뻤다. 안 그래도 효정이 입학할 때 이거저거 사 주고 싶었는데.
그러다 문득 강주가 떠올랐다. 새삼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도 반찬 가격을 말도 안 되게 준다고 하여 깜짝 놀라지 않았나. 세상에 누가 한 달 반찬값으로 사백만 원을 주느냐는 말이다. 그때 백만 원만 달라 했더니, 진심으로 의아해하던 그의 표정이 기억난다. 그 돈이 재룟값이나 됩니까?
‘참 신기하지.’
그런 사람과 이렇게 자꾸 마주치다니. 마음으로는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그와 맞붙어 있을 때는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어지는 자신이 부끄럽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붉어지는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재희는 총총 걸었다.
등 뒤에서 무언가가 그녀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재희 씨.”
강주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절 향해 다가오는 멀끔한 얼굴이 보였다. 겨울 공기 아래, 차분하게 굳은 얼굴이 새하얀 대리석 조각처럼 매끈했다.
“상무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차는 어쩌시고.”
강주는 손목시계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등 뒤 커다란 건물을 향해 고갯짓했다. 선강 그룹 건물이었다.
“차는 지하 주차장에. 같이 가요. 태워 줄게요.”
“괜찮아요, 바쁘신데 전 혼자 가도 돼요.”
“두 번은 권하고 싶지 않은데. 물론, 거절의 말 듣는 건 더 싫고.”
그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낯은 담담하고 어조는 잔잔하다. 하지만 재희는 왠지 압박을 느껴 저도 모르게 긍정의 답을 중얼거렸다.
“아, 그러면……. 부탁드릴게요.”
재희는 스스로가 궁금해졌다. 왜 그의 앞에만 서면 자신은 자꾸만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걸까. 어째서 몸과 마음을 활짝 열어 달려들고 싶은 건지.
그쯤 되자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불덩이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그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리고 있노라고.
‘아. 어색하다.’
재희는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강주를 곁눈으로 살폈다. 침묵으로 도로를 달린 지 10분이나 지났다. 누가 침묵을 금이라고 했나. 이렇게 불편한 금이 세상에 어디 있어.
눈알만 움직이며 눈치를 보다가 컵 홀더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바스락. 손으로 잡아 들자 우유색 비닐에 싸인 사탕이 보였다.
“아직도 이거 드세요?”
재희가 껍질을 바스락거리며 물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강주의 손에 얼핏 힘이 들어간다.
“네.”
“먹어도 되나요?”
“…그래요.”
강주는 굳은 얼굴로 앞만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뽀작거리며 껍질을 깐 재희가 분홍빛 사탕을 입에 넣었다. 혀 위에 굴리자 입 속에 체리 맛이 퍼진다. 어쩐지 가슴이 아릿해지도록 그리운 맛.
이건 강주가 어릴 때부터 자주 먹던 것이었다.
‘오빠. 아, 해 봐.’
강주가 소년이었을 당시, 어둡고 어두운 창고 안.
재희가 껍질을 깐 사탕을 내밀면 강주는 그것을 조용히 받아먹었다. 마치 아기 새처럼 착하게.
‘오늘도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은 거지? 이거 먹고 다 씻어 내.’
‘…응.’
‘회장 아저씨도 진짜 너무해. 억지로 막 먹이고. 사람이 싫다면 좀 싫은 줄 알지 늘 왜 그래?’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던 강주의 메마른 어린 시절. 차 회장의 엄포로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먹었을 때마다 재희는 강주에게 사탕을 건네고는 했다.
달달한 것을 먹으면 기분도 좋아진다는 엄마의 말도 있었고, 강주에게 남아 있을 불쾌함을 어떻게든 씻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강주는, 혀끝으로 달콤함을 녹이며 재희를 가만히 바라보고는 했다. 달빛 아래 하얗게 번진 소녀의 뺨을. 자신이 무서워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유일하게 알고 있던 윤재희를. 그저 가만히.
그 언젠가 사탕을 주던 소녀. 이제 훌쩍 성인이 된 재희는, 강주의 차 안에 앉아 사탕을 왼쪽 뺨 안으로 굴렸다.
코끝에 사탕 내음이 맴돌자 과거의 기억 역시 살며시 떠올랐다. 창고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강주. 그의 입 속에 살며시 밀어 넣었던 작은 사탕. 어둑한 달밤, 케케묵은 창고 안에서 피어오르던 그 향기가 아직도 떠오른다.
“아직도 해초류는 못 드세요?”
“이제는 먹을 수 있는데, 굳이 먹지는 않아요.”
“아아, 하기야 이제는 차 회장님과 같이 안 사시니까. 차 회장님이 해초류를 좋아하셔서 엄마가 반찬으로 많이 하셨잖아요. 늘 엄마가 미안해하셨어요.”
재희는 과거를 회상하듯 조곤조곤 말했다.
“어릴 때 입맛은 평생 간다던데. 맛있죠, 이거. 아직도 드시는 거 보니까 제가 맛은 잘 골랐었나 봐요.”
재희가 반쯤 녹은 사탕을 어금니로 깨물며 말했다. 강주에게서는 아무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까득까득 단 알맹이를 씹으며 고개를 돌리자, 핸들에 손을 얹은 채 절 빤히 바라보는 그가 보였다.
유리창 너머, 신호등이 빨갛게 타올랐다. 마치 그녀의 선 넘은 행동을 경고하듯.
“죄송해요, 주제넘게 아는 척했죠.”
재희가 눈을 내리깔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침묵이 버거워 아무 말이나 쏟아 냈었다. 저렇게 서늘한 눈빛이 쏘아질 줄도 모르고. 제 옆의 상무님은 제가 싸구려 사탕이나 건네주던 그 차강주가 아닌데. 괜히 혼자 반갑고 들떠서는.
혀끝에서 느껴지던 달콤함이 아릿하게 절 찔렀다.
그녀의 옆얼굴 위로 강주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닿았다.
“재희 씨가 기억할 줄은 몰랐네요. 다 잊은 줄 알았는데.”
“…….”
붉은 신호등이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강주는 액셀을 밟았다.
“내가 무서워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혼자 다 알면서. 단 하나만 몰랐어요, 재희 씨는.”
“네……?”
그녀의 반문을 마지막으로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차 안에 다시 막막한 적막이 깔렸다. 혀끝에 잔상처럼 남은 달콤함을, 그녀는 억지로 되새겼다.
골목은 새까맸다. 불빛마저 숨죽인 시간. 바스러지는 돌담을 지나 재희는 걸음을 옮겼다.
오늘 역시 강주는 집 앞까지 바래다준다고 했다. 밤이 늦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었다. 반지하 집. 날카롭게 녹슨 철문 앞으로 그를 데려가기 싫었다.
바로 오늘, 그와 제 세상의 차이를 절실히 느끼지 않았나. 고작 80만 원짜리 기프트 카드 하나에 커다란 벽을 느끼며.
자신의 다 무너진 집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이미 보일 것 다 보이고 까일 것 다 까였는데.
그냥. 그냥… 그랬다. 설명하기 힘든 묘한 감정.
‘사는 곳을 알려 드리는 건 좀 곤란해요. 죄송합니다.’
그 답에 강주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언뜻 눈빛 위로 아프게 파인 감정이 스쳤지만, 재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와 그의 사이의 벽을 스스로 얼마나 높이 쌓았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재희는 바삐 발을 움직였다. 탁탁탁. 좀은 골목에 울리는 발소리가 어쩐지 을씨년스럽다. 코트 깃을 바리바리 세우며 집 근처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였다. 집 앞을 서성이던 인영이 불쑥 뛰어나왔다.
“야.”
민철이었다.
재희는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심장이 사정없이 두근거린다. 눈을 드니 반쯤 풀린 눈을 한 민철이 보였다.
“잤냐?”
반쯤 꼬부라진 민철의 혀가 짧은 문장을 던졌다.
그에게서 짙은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위험하다. 재희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거리가 벌어진 만큼 민철이 다가왔다.
“윤재희, 너야말로 그날 호텔에서 뭔 짓 했는데? 어? 내가 한나 그년 좀 만났다고 내치더니, 넌 무슨 짓 했냐고.”
“…….”
“그 새끼랑 떡이라도 쳤어?”
가로등 빛이 그의 눈동자 안에서 번들거린다. 재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회를 보아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으로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바보같이.
성큼성큼 다가온 민철이 기어코 재희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난 손가락 하나 못 만지게 하더니, 씨발……. 거지 같은 년이……!”
무서워.
재희는 팔뚝을 옥죄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공포에 젖은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막막한 어둠. 저보다 체구가 커다란 사내. 충혈되어 절 형형히 노려보는 눈동자. 입술 틈으로 두려움에 찬 숨이 가쁘게 새어 나왔다.
그녀는 민철을 억지로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민철이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는 순간, 그의 손을 털어 내고 냅다 뛰었다.
등 뒤로 우악스러운 힘이 그녀를 덮쳤다.
“사랑한다고 했잖아!”
민철의 목소리는 광기에 젖어 있었다. 억센 힘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강하게 잡아당겼다.
“꺄악!”
재희는 뒤로 휘청 흔들렸다. 거세게 잡아당기는 힘에 반항하며 몸을 비틀었지만 결국 바닥에 콰당 넘어져 버렸다. 차가운 돌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온다.
“네가 뭐가 그렇게 잘났어! 얼굴 좀 반반하다고 예쁘게 봐줬더니 씨발, 주제도 모르는 게!”
술기운에 젖은 목소리가 그녀를 마구 파헤쳤다. 재희는 도망가기 위해 다리를 버둥거렸다. 저도 모를 눈물이 뺨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 없는 새까만 어둠이 두렵고 두려워 참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땅바닥을 나뒹구는 핸드백처럼, 그녀의 몸도 바닥을 나뒹굴었다. 민철의 굳은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향해 뻗어 나왔다.
“내가 받들어 모시고 오냐오냐하니까, 내가 우스워서 그렇게-”
하지만 이를 갈며 고함치던 그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퍼억! 묵직하고 커다란 타격음과 함께, 커다란 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으악!”
민철의 비명을 향해 커다란 몸이 재희 곁을 휙 스쳐 지나갔다. 요동치는 공기 속에서 재희는 얼핏 익숙한 내음을 느꼈다. 차갑게 냉기를 품은 듯 청량하게 피어오르는 향기. 강주의 향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