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TF 팀 회의를 끝낸 후, 재희는 바로 마케팅 팀 회의에 들어갔다. 이번에 진행하기로 한 탄산수 프로모션을 정 팀장이 TF 팀에 넘긴 탓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음료 쪽은 상무님 쪽에서 지휘하니까, 우리는 주류 쪽으로 기획해 볼까?”
“같은 탄산이니 맥주 어때요?”
“그것도 괜찮겠네. 타깃층은 젊은 직장인 여성으로 잡자. 캐릭터 브랜드 사업체랑 제휴해서 이미지를 좀 젊게.”
“그럼 제가 거래처부터 찾아볼게요. 요새 뭐가 핫한지.”
마케팅 팀 업무 역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한데 아까부터 정 팀장이 보이지 않았다. TF 팀도 빠지기로 해서 이젠 마케팅 팀 업무를 이끌어야 할 텐데 무슨 일인지.
대강 회의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 재희가 김 과장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정 팀장님은요?”
옥외 정원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던 날. 정 팀장이 기획서 훔친 일을 들킨 그날 이후, 재희는 정 팀장을 마주하지 못했다. 어디를 갔는지 늘 자리를 비우기 일쑤. 도통 사무실에 붙어 있지를 않은 것이다.
안 그래도 마케팅 팀원 모두 정 팀장을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팀원들 시선이, 김 과장을 향해 모였다.
김 과장이 수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팀장님, 인사 발령. 곧 공고 날 거야.”
“네? 갑자기요?”
아니, 무슨 이렇게 급작스러운 인사 발령이 다 있는가. 문 밖으로 나가는 김 과장의 꽁지를 향해 임 대리가 물었다.
“혹시 어디로 가시는지 들으셨어요?”
“…지방 바닷가 영업 사무실 어딘가로.”
“네에?”
팀원들의 놀람을 뒤로 하고, 김 과장은 그대로 회의실을 나갔다.
김 과장 역시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정 팀장 꽁무니 쫓아다니며 좋은 거 다 주워 먹었는데 이렇게 끈이 확 떨어져서 어떡하냐. 짜증 나게.’
게다가 정 팀장의 인사 발령이 프로젝트 엎어진 것 때문인 것 같아 영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책임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이 쿵짝 한 사이니까.
심지어 그 바닷가에 갑자기 마케팅 팀까지 신설하여 내려보낸 탓에 부당 전직 구제 신청도 할 수 없었다. 그곳을 지방 거점 삼아 브랜딩 기획을 수립하라는데 무어라 하겠는가. 말이 인사 발령이지, 구덩이로 좌천된 거란 건 지나가던 동네 개도 알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차강주 상무에게 밉보여도 한참 밉보인 게 분명했다. 그게 퍽 신경 쓰였다.
‘다음은 나인가? 아니겠지, 설마. 저 위에 계신 상무님께서 자그마한 일에 손을 쓰셨겠어? 그냥 우연이겠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왠지 목덜미가 서늘했다. 김 과장은 목뒤를 손바닥으로 슥슥 쓸어내렸다.
***
솔직히 말해, 선강이 음료 쪽에서 고꾸라지든 말든 강주는 상관없었다. 청랑에게 시장 점유율을 빼앗기든 말든 역시 상관할 바 아니었다.
애초의 선강의 주력 분야가 음료가 아닌 유통, 호텔 산업, 외식 산업 쪽이기도 했거니와, 강주가 경영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강주는 오랜 친구와 만났다. 상대는 권지혁. 테니스 선수 고유민의 소속사인 OU엔터테이먼트의 상무이자, 그녀의 숨겨진 남자 친구였다.
‘내일 바로 방송 송출될 거야. PPL 아니라서 대놓고는 못 하는 거 알지? 그런데 강주야, 너 갑자기 무슨 일이냐? 경영에는 관심도 없더니.’
‘신경 쓰이는 일이 생겨서.’
‘별일이네. 네가 신경 쓰는 것도 있고. 너 후계 일 배우는 척하다가 대충 튄다더니……. 너무 대놓고 작업을 친다? 우리 유민이 잘 봐줘야 해?’
강주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블릿에 저장된 고유민의 집 내부 사진을 휙휙 넘겼었다. 여기저기 배치된 탄산수가 보였다.
예쁜 외모와 출중한 테니스 실력으로 주목을 받는 고유민은 시즌 아웃 시기라 예능 프로그램에 전속 러브콜을 받았다. 그리고 강주는, 그 프로그램에 나가는 유민을 이용해 어떻게든 선강 제품을 띄울 생각이었다.
‘촌스럽게 제품 자체 노출시키는 것보다 그냥 탄산수 자체 노출하는 거로 가는 거야. 우리 유민이 운동선수니까 관리하느라 당분 든 탄산음료 못 마신다고. 대신 탄산수로 간다는 식으로.’
강주는 보고 있던 휴대 전화를 지혁에게 넘기며 답했다.
‘갑자기 광고 모델로 컨택되면 방송 자체를 바이럴로 의심할 테니까, 기사 먼저 띄워 줘.’
‘어떻게? 아아, 테니스 여제, 고유민. 선강의 러브콜 받다, 이런 거? 그래, 그래, 내가 아는 기자한테 미리 연락 넣어 놓을게.’
방송에서 탄산수 자체를 노출시킨다. 고유민의 건강하고 젊은 이미지와 탄산수라는 키워드에 주목한 선강이, 방송 끝나자마자 유민에게 광고 모델 러브콜을 보낸다. 그리고 지금 기획 중인 TF 팀 탄산수 프로모션과 함께 ATL, BTL 광고 순차적으로 노출.
강주가 처음부터 의도했던 일이었다. 정 팀장이 재희의 기획안을 훔쳐 TF 팀 회의에 들고 왔을 때부터 짜 두었던. 무심결에 봤던 재희의 탄산수 기획까지 엮어 한 번에 해결할.
청랑과 프로모션이 겹치니 재희의 기획안은 마케팅 팀에서 애초에 쓸 수 없는 것이었다. 한데 정 팀장이 재희의 기획안을 훔쳐 와 TF 팀 회의에 난데없이 내밀었다.
그래서 우선은 통과시켰다. 훔쳐 온 기획안을 채택해 정 팀장에게 노를 쥐여 준 후, 일부러 배를 엎어 물에 빠뜨려 버린 것이다.
어찌하겠는가. 손버릇 나쁜 벌레는 아예 밟아 죽여 버려야지.
***
강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화분에 물을 줬다. 사내 빌딩 옆, 자그마한 꽃집에서 사 온 월계수 나무였다.
“식물 원산지가 대부분 외국이라, 한국에서 키우려면 적응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들었어요.”
“…예?”
“햇볕도 충분히. 바람도 충분히.”
정 팀장은 난데없이 말하는 강주를 향해 “아, 그렇습니까.” 하고 작게 답했다.
강주가 불러서 오기는 했는데, 나무에 물만 주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정 팀장이었다. 인사 발령 뒤에 부른 것이라 그에 관한 말을 할 줄 알았다. 네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비한 짓은 벌을 받아야 한다. 뭐, 이런.
강주는 빈 물컵을 창가에 올려놓았다. 컵 옆에 푸른 문양 화분이 있었다. 12만 원짜리 월계수를 심은 화분이, 알고 보면 오천만 원짜리 예술품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모를 터였다. 강주의 모친이 입사 선물로 사 준 것이었다.
강주가 창가에 기대앉았다. 등 뒤에서 빛이 쏟아져 내렸다.
“화원에서 말하길,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 나뭇잎이 변색된다고 하더군요.”
“아……. 네…….”
여전히 강주의 말은 모호했다. 그래서 정 팀장 역시 모호하게 말끝만 늘였다.
강주가 이파리를 대수롭지 않게 떼어 냈다.
“썩으면 그냥 잘라 버리는 겁니다. 어차피 새잎은 또 나니까.”
팔랑팔랑. 강주가 툭 털어 버린 이파리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정 팀장의 불안한 시선이 그것을 좇았다.
강주가 손을 툭툭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로운 발령지에서 보이실 활약이 기대되네요. 지켜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정 팀장은 눈동자를 내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이파리를 응시했다.
차 상무가 굳이 절 불러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바닥에 나뒹구는 이파리가 바로 자신이었다. 발령지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썩어 버린 이파리. 가차 없이 잘려 버릴 이파리.
선강에서의 제 커리어는 이제 끝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정말, 끝이었다.
***
사내 야근은 잠정적 금지였다. 법정 근로 시간 준수 때문이었다. 대기업의 경우 더욱 철퇴를 맞는지라 야근이 필요할 땐 시간 외 PC 사용 신청서를 내야 했고 구구절절 사유도 적어 설명해야만 했다.
솔직히 그 덕에 칼퇴가 쉬워 늘 흡족한 재희였으나 이따금 곤란할 때가 있었다. 마치, 오늘처럼.
TF 팀은 빌딩 옆 스터디 룸을 빌렸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져 시간이 없는데, 사내에서 회의를 할 수 없어 퇴근 후 모인 것이다.
재희 역시 회의에 참여하여 진지한 얼굴로 조곤조곤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서 한강 이벤트 스팟은 여기 잠실 쪽 하고…….”
“…그러면, 그 자리에서 해시태그 올리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증정하면…….”
커피에, 케이크에, 와플 파이까지. 끝없이 펼쳐진 간식을 배경으로 회의가 계속됐다. 그렇게 당분을 보충하며 이어 가다가, 9시가 넘어서야 결국 회의가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아유, 피곤할 텐데,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서로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며 격려의 인사를 전했다. 할 말들이 많아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졌지만 그래도 대충 각이 보이는 것 같아 낯빛에 부담은 없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팀원 중 가장 막내인 재희가 밝게 외쳤다. 그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컵과 그릇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강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 손을 움직였다. 재희를 도와 포크를 모으는 손길이 제법 싹싹하다.
“아, 상무님…….”
랩톱 가방을 들던 영업 팀 과장이 허둥지둥 컵을 치우기 시작했다. 상무가 컵을 정리하는데 자리를 홀랑 떠날 수 있을 리가.
덕분에 엉망진창이었던 테이블이 삽시간에 깨끗해졌다.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은 강주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에는 스터디 룸을 나가지 못한 팀원들이 주욱 서 있었다.
“오늘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강주가 무언가를 하나씩 내밀었다. 다들 손을 펴고 엉거주춤 서서 작은 봉투를 받았다.
이게 뭐지. 눈만 끔뻑이며 봉투를 내려다보는데, 강주가 의자에 걸려 있던 코트 안주머니에서 다른 봉투를 꺼내 또 내밀었다. 방금 전 것보다는 큰 것이었다.
“이건 택시비.”
눈을 굴리던 영업 팀 과장이 제일 먼저 봉투를 열었다. 그러곤 “어이고!” 하며 눈을 번쩍 떴다.
“택시비치고는 너무 많은데요, 상무님! 잘 타고 가겠습니다!”
봉투 안에 있는 것은 빳빳한 5만 원권 지폐 네 장이었다. 너스레를 떨던 과장이 돈을 주머니에 스윽 넣고는 작은 봉투 역시 열었다. 안에 있는 것은 기프트 카드였다. 과장의 눈동자가 도록 내려가 금액을 확인했다.
80만 원. 택시비와 합치면 딱 100만 원.
“허어……. 음.”
그 금액에는 차마 너스레조차 떨지 못했다.
코트를 둘러 입던 강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사측에서 시간 외 수당을 따로 챙겨 주기는 힘들어요.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보너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영업 팀 과장이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기프트 카드 역시 주머니에 냉큼 넣기는 했는데 몇 시간 동안 수당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과한 게 사실이었다.
“주시니까 받습니다만……. 하이고…….”
코트를 툭 털던 강주가 고개를 들었다.
“적습니까?”
그러고는 불쑥 지갑부터 꺼내 들었다.
“제가 이런 쪽으로는 무지합니다. 미안해요.”
강주 옆에 선 재희가 깜짝 놀라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아니요, 상무님! 충분합니다! 충분해요!”
이럴 때마다 재희는 느꼈다. 나와는 참 다른 세계 사람이구나.
“상무님, 더 안 주셔도 돼요. 정말이에요!”
재희는 고개까지 휙휙 내저으며 강하게 만류하고 있었다. 강주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제 손목을 붙든 그녀의 손을 본다.
강주가 아래를 보고 있자 그를 따라 고개 숙인 재희가 화들짝 놀라 손을 놨다. 이 무슨 무례한 짓을.
웃기게도, 그와 손을 잡는 건 처음이었다. 비록 자신이 그의 손목을 움켜쥔 것에 불과했지만.
“죄송합니다!”
재희의 허리가 푹 수그러들었다.
강주는 대답 대신 제 손목을 가만히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