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96)

 #19

 지금으로부터 약 10분 전.

“피곤하네요. 쉬었다 다시 합시다.”

 강주가 회의를 중지시키고 밖으로 나간 후.

 재희는 손을 움직여 강주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차 상무님, 윤재희입니다.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놀라셨겠지만, 무례한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옥외 정원 화단 옆에서 저와 정 팀장 대화를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정 팀장은 모르도록 비밀스럽게요.]

 마침 옥외 정원에서 찬 바람을 맞던 강주가 지잉, 하고 울리는 휴대 전화를 들었다. 그리고 ‘재희’라고 뜬 메시지 발신인을 보고 조금 놀란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가 내용을 보고는 픽 웃었다.

 생각보다 일이 귀엽게 돌아가는 것 같다.

 그는 뒤돌아 아직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옥외 정원 입구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화단 모퉁이를 돌아 커다란 벽을 지난다. 곧 강주는 정원 중앙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끝 쪽에 서서 화단에 대충 기대앉았다. 이제 재미난 대화를 쥐새끼처럼 몰래 엿들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시 현재.

“상무님!”

 정 팀장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한쪽 발이 어긋나 휘청 몸이 흔들렸다. 허우적거리는 팔로 화단을 간신히 짚고 서서는 핏기 없는 얼굴로 강주를 황망히 응시했다.

 강주가 난간에 등을 대고 편히 섰다.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올렸다가 정 팀장을 향해 손을 내민다.

“담배 있어요?”

“네? 네! 여기!”

 허둥지둥 옷을 뒤진 정 팀장이 그의 두 손가락 사이에 담배 한 개비를 조심스레 끼워 넣었다. 눈만 내려 담배를 응시하던 강주가 짜증이 밴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불도.”

“아! 네! 죄송합니다!”

 달칵. 라이터에서 불꽃이 피어오르자 담배에 불이 붙었다.

 재희는 그의 입에 물린 담배를 멍하니 응시했다. 살짝 고개 숙여 담배를 피우는 그의 모습이 생경하다. 상황이 언짢은지 미간에 살짝 신경질이 배어 있었다.

 사실, 그녀가 강주에게 메시지를 보낸 건 반쯤 도박이었다. 세상에 어느 주임이 감히 상무님께 제 억울함을 알아 달라며 비밀스러운 신문고를 울리겠는가.

 하지만 이대로 지나가기엔 정 팀장이 너무도 괘씸했고 너무도 억울했다. 더불어 강주는 ‘그냥 상무’가 아니었으니까. 예고 없이 절 유혹하는 그인데 저 역시 예고 없이 그를 한 번쯤은 이용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적어도 그날 호텔에서 민철이를 밟고 절 도와줬던 그라면, 그래. 한 번은 다시 기대해 봐도 될 것 같았다. 그냥, 그랬다.

 몇 모금 연기를 빨던 강주가 고개를 들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정 팀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흐트러지는 연기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사뭇 서늘했다.

“정 팀장. 솔직히 누가 누구 아이디어를 훔쳤다……. 이런 거 그다지 중요한 일 아니에요. 뭐, 선강만 잘 나가면 되는 거지. 안 그래요?”

“아……. 네…….”

 강주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어 정 팀장은 말끝만 늘였다. 재희 역시 긴장한 얼굴로 강주를 응시했다. 강주가 이제 무슨 말을 할까. 설마 정 팀장의 편을 들지는 않겠지, 아니란 걸 아는데 괜히 손에 식은땀이 배었다.

 강주가 까딱, 정 팀장을 향해 손짓했다. 정 팀장은 조심조심 강주를 향해 다가섰다.

“부하 잘 구슬려 자료 빼 오는 거. 그것도 능력이지. 알아요.”

 강주의 문장이 시니컬하게 던져진다. 정 팀장을 응시하는 강주가 약하게 남아 있던 웃음기마저 싹 거뒀다.

“그런데 난 싫어해. 그런 비열한 짓, 아주 혐오하거든.”

“…….”

 숨죽인 침묵이 이어졌다. 강주는 정 팀장을 응시하며 담배를 입에 물었고, 재희는 침을 꼴깍 삼켰으며, 정 팀장은 고개를 더욱 숙였다. 식은땀이 당장이라도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정 팀장님,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정 팀장의 정수리에, 평소처럼 느른한 강주의 목소리가 울렸다. 언제 반말을 틱틱 내뱉었냐는 듯 더없이 정중하게.

 정 팀장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아까 자신이 재희에게 한 말과, 방금 차 상무가 제게 한 말이 교차되어 심장이 쿵쿵 뛴다.

‘윤재희, 너 뭔가 잊은 모양인데……. 나 팀장이야. 상사라고. 너 고과 주는 사람도 바로 나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윤재희에게 한 말을 고대로 돌려받은 것이다.

 역시 처음부터 듣고 있었구나. 다 듣고. 다 파악해서 이렇게.

 정 팀장의 속이 쓰리다 못해 참담해졌다. 이 일을 어떻게 무마할 것인가. 제 아무리 사사로운 일에 신경 쓰지 않을 상무라 할지라도 저렇게 말할 정도면 무언가 압박을 가해 올 것이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정 팀장은 숙인 고개를 더욱 숙였다. 사과할까. 잘못했다고 우선은 빌까.

 그의 머리 위로 강주의 퇴출 명령이 냉랭하게 던져졌다.

“가 봐요.”

“아, 네……. 네에.”

 정 팀장은 제대로 된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염소처럼 목소리를 떨다가 참담한 표정으로 쫓겨났을 뿐이다. 터덜터덜 나가는 정 팀장을 향해 강주가 마지막 말을 보냈다.

“문 잠그고 가요.”

“알겠습니다…….”

 정 팀장은 달칵, 안에서 문을 잠그고는 밖에서 살며시 닫았다.

 추운 겨울 화단에 남은 건 냉랭한 겨울 공기와 둘뿐이었다. 재희는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눈을 내렸다. 제 앞에서 한없이 당당했던 팀장이 터덜터덜 패잔병이 되어 떠나자 솔직히 속이 시원했다. 강주의 권력에 기생하여 얻어 낸 사이다라 하더라도 당장은 그랬다.

 강주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손에 든 담배를 자연스레 밟아 껐다.

“사실 잘 안 피워요. 냄새가 싫거든.”

 재희는 아, 하고 목을 울려 어렴풋이 수긍했다.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계급의 힘이 이렇게 놀랍다고 너스레라도 떨어야 하나.

 자신이 부탁한 일이었고, 그가 깔끔히 해결해 줬는데 괜히 속이 긴장됐다.

 강주가 화단 난간에 비스듬히 앉았다.

“이리 와 봐요.”

 어느새 그의 얼굴에서 냉랭함이 풀려 있었다.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절 부르자, 재희는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다가섰다. 강주는 화단에 걸터앉은 제 위에 재희를 당겨 앉혔다.

 재희는 어정쩡하게 그를 타고 앉았다. 스스로가 우스웠다. 오란다고 오고 하란다고 하나. 세상에 이토록 쉬운 여자가 있을까.

 강주는 멀어지려는 재희의 허리를 가볍게 끌고 와서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재희 씨는 냄새가 늘 좋아요.”

 목 아래 그의 목소리가 스몄다. 차가운 바람 때문일까. 맞닿는 그의 살갗이 유독 뜨겁게 느껴졌다.

“정 팀장이 늘 저런 식으로 행동했나요?”

“네, 항상요.”

 재희는 마치 아빠에게 친구의 잘못을 이르는 아이처럼 대꾸했다.

“그냥 한 대 쳐 버리지 그랬어요.”

 농담처럼 가볍게 말하는 음성이 살갗을 간지럽게 어루만진다. 재희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래도 상사니까요.”

 정 팀장. 제 고과를 쥐고 있는 사람이자, 절 얼마든 괴롭힐 수 있는 사람. 야비하고 저열하지만 그럼에도 제 위에 있는 사람. 그래서 약자인 자신은 당할 수밖에 없었다.

 목 아래, 옅게 웃는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목덜미에 있던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와 그녀의 귓가를 느릿하게 훑었다. 입술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재희는 그의 다리에 걸친 제 허벅지를 흠칫 움츠렸다.

“나 왜 불렀어요?”

 그 말에 재희는 잠시 답을 쉬었다. 저 역시 모르겠다. 왜 불렀는지. 상사라서 억울함을 알아 달라며 불렀다기엔 그와 그렇게 가깝지 않은데.

 어쩌면 기대고 싶기라도 한 걸까.

 재희는 떨림을 숨기고 담담히 답했다.

“상무님이시니까요.”

 날 도와줄 힘을 가진,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녀의 목덜미에서 그가 옅게 웃었다. 어쩐지 허무하게 들리는 낮은 웃음소리.

 상체를 떨어뜨린 그가 재희의 두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던 손이 슬그머니 얇은 니트 안으로 들어왔다.

 주위는 무척이나 고요했다. 재희는 겨울이 주는 침묵 속에서 숨을 바짝 들이마셨다. 단단한 손이 그녀의 맨살갗을 어루만진다. 손바닥이 주는 열기와 함께 겨울의 한기가 스며들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맨등을 쓸었다. 재희는 숨을 멈췄다. 저도 모르게 긴장해 아랫배가 오목하게 들어갔다. 척추뼈를 천천히 더듬으며 강주가 물었다.

“그럼 지금 저와 이러는 것도, 제가 상무라서 그런 건가요?”

 등을 타고 올라온 손끝에, 브래지어 끈이 툭 풀렸다.

“아……!”

 이음새 풀린 브래지어가 놀랄 새도 없이 휙 말려 올라갔다. 큰 가슴이 출렁 떨어져 내린다. 옥죄었던 가슴이 풀리자 재희는 당황하여 고개를 내렸다. 니트가 얇아 가슴 형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천 아래, 늘어진 젖가슴 윤곽 위로 비밀스러운 정점이 은밀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강주가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유두를 엄지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빙글빙글 돌리며 자극한다.

“으응…….”

“내 앞에서 이렇게 젖꼭지 세우고 있는 것도, 그래서 그런 거예요?”

 니트 천을 사이에 두고 비벼지는 감각이 야릇하다. 차라리 직접 손을 넣어 만지면 이런 느낌은 들지 않았을 텐데. 감질나는 감각에, 재희는 대답하지도 못하고 앓는 듯한 신음만 내밀었다.

 그의 손끝이 재희의 단단해진 유두를 밀어 올렸다. 아읏, 하고 재희는 목 안을 울렸다.

“그런 거라면 조금 서운한데.”

 낮게 잠긴 목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강주는 엄지와 검지로 꼭지를 잡아 부드럽게 비볐다. 재희는 안절부절못하며 어깨를 움츠리고 신음했다. 으슬으슬하게 쓸리는 감각이 흥분을 불러온다. 그의 손길에 젖꼭지가 아플 만큼 단단히 부풀어 올랐다.

 고개 숙인 강주가 천 위로 볼록 나온 유두를 한 움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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