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96)

 #18

“좋아요. 정 팀장까지 발표를 마쳤으니, 이제 어떤 기획으로 갈지 오늘 당장 정하기로 하죠. 아시다시피 시간이 부족하니까요.”

“예!”

“그리고 정 팀장은, 그 기획안 구상한 사원 다음 회의에 참석시키세요. 만약 그 기획안이 통과된다면 말입니다.”

“예?”

 자리로 돌아가던 정 팀장이 걸음을 멈추고 반문했다.

“한데 그 사원까지 TF 팀 합류하면 마케팅 팀 인원이 비니… 김 과장은 다음 회의 때부터 참석하지 않아도 됩니다.”

 김 과장이 깔끔하게 내쳐졌다.

 정 팀장은 눈알을 휙 굴려 김 과장을 바라봤다가 최대한 힘차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김 과장이 억울함 밴 눈으로 정 팀장을 올려 보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회의가 시작됐다. 강주는 늘 그랬듯 틀만 단단히 잡아 주고는 여기저기 오가는 의견을 듣고만 있었다. 대충 보아하니, 정 팀장이 갖고 온 기안으로 확정되는 것 같았다. 바로 윤재희의 기획안이.

 강주는 시계를 바라본 후 포켓의 행커치프에 만년필을 툭 걸어 넣었다.

“저는 선약이 있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 회의 때엔 프로젝트 뼈대 만들어 발표할 수 있도록 하세요.”

 그리고 쏟아지는 인사를 뒤로한 채 미련 없이 회의실을 나왔다.

 유하게 미소 짓던 얼굴이 회의실을 벗어나자마자 날카롭게 굳었다.

“쓰레기 새끼.”

 조소 어린 목소리가 울린다. 강주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밟으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

 재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펜을 쥐었다. 6층 회의실 안. 정 팀장이 다짜고짜 다음 TF 팀에 함께 참석하라고 하더니 절 참석시킨 것이다.

 회의에 참석하기 전, 재희를 몰래 불러낸 정 팀장이 협박하듯 목소리를 낮췄었다.

‘윤 주임, 이거 파기됐던 기획이야. 알겠지? 누가 물어볼 일은 없겠지만, 만약 말이 나오면 진행된 적 없는 척 깨끗하게 꾸미란 말이야. 알겠어? 이거 TF 팀 신규 프로모션 갈 거라 아주 중요해!’

 그 말을 듣자마자 재희는 알아차렸다.

 아, 정 팀장이 또 개 짓을 했구나.

 별다른 설명 없이도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TF 팀에서 뭔가 프로젝트가 어그러졌고, 그 뒤 이거로 대체하려는 심산이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이 기획안 주인이 윤재희 자신이란 걸 밝힌다는 사실이었다. 정 팀장 성향이라면 충분히 제 아이디어라고 하고도 남을 사람인데. 의외였다.

 어쨌든 그런 사유로 참석하게 된 회의였다.

 회의실 중앙에 앉아 있던 강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 주임, 경황없겠지만 나와서 바로 프레젠테이션 시작해요.”

 재희는 그제야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이 회의실에 들어오건 말건 눈길 하나 주지 않던 강주가 갑자기 절 지목하자 놀란 것이다. ‘윤 주임.’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제 직함이 생경했다.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마케팅 팀에서 진행했던 건이라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꾸벅 인사를 하며 빔 옆에 섰다. 그리고 삑, 삑 스스로 화면을 넘기며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우선,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바이럴이 자연스럽게 뽑히는 겁니다. 저희 제품 사진이 여기저기 퍼져 나갈 수 있게.”

“안 그래도 제가 컵에 샘플 라벨 붙여서 셀카 찍어 봤는데요, 잘 나오더라고요. 색이 파스텔 톤으로 생기 있게 뽑혀서. 필터도 잘 받고.”

 상품 기획 팀 대리의 호응에, 영업 팀 팀장이 큼큼 목을 울렸다. 본인은 진한 빨강색, 진한 파랑색 등을 추천했는데 그게 묵살된 게 아직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광고하려면 눈에 콱콱 박히는 디자인으로 해야지 저 희끄무레한 분홍, 민트색들은 뭐야? 그 생각이 표정에 빤히 걸렸다.

 재희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해시태그 퍼질 구심점으로, SNS 유명인들 몇몇 컨택해 놨어요. 공장에 연락해서 이벤트용 머리띠 샘플도 요청해 놓은 상태입니다.”

“머리띠?”

“네, 듀엣 가수가 머리에 음료수병 달고 나왔던 거 기억하시죠? 그런 식으로 탄산수병 올려놓은 머리띠 제작해서, 무료 배포할 생각입니다.”

“아, 그거 웃기던데, 음료수병.”

“커다란 탄산수병도 하나 프라모델처럼 제작해서 사진 찍을 수 있는 자리 마련할 예정입니다.”

“예쁘게만 뽑히면 잘 찍히겠네.”

“네, 그거로 해시태그 유도하는 거죠. 배경으로 한강 보이면 청량한 이미지도 나올 수 있으리라 판단됩니다. 우리 선강 그룹 역사가 깊다 보니 브랜드 이미지가 조금 올드한데 그거 탈피해야죠, 화사하게. …아, 죄송합니다, 상무님.”

 재희가 강주를 의식해 목을 꾸벅 숙였다. 말하다 보니 선강 그룹이 고루하다 욕을 하게 됐는데, 차강주 상무가 바로 그 선강의 주인 아닌가. 회장 아들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피식 웃은 강주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얼굴을 괴었다.

“괜찮아요, 이번 기획은 소비자 바이럴로 자연스럽게 유도될 수 있어 좋겠네요. 요새 자발적으로 퍼져 나가는 광고가 더 효과적이니까.”

 그 말에 재희는 한숨 놓았다. 회사에서 업무적으로 만난 적은 없어 사실 좀 긴장했는데, 의외로 사적으로 만나는 것보다 마음이 편했다.

 그때, 정 팀장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불쑥 손을 들었다.

“그런데, 윤 주임. 그거랑 헬스 케어 제품이랑은 어떻게 연결할 거야?”

 실상 정 팀장은 꽤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지금 모든 공이 자칫하다가는 재희 쪽으로 돌아가게 생겼기 때문이다. 급하게 발표하면서 저렇게까지 능수능란하게 말할 줄은 몰랐는데. 어버버, 하면 적당히 자신이 끼어들려 했건만 이건 아예 판에서 제외되게 생겼다.

 그래서 자신이 데려온 재희임에도 불구하고 괜히 삐딱선을 타는 것이다.

“헬스 케어 제품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좋은 고견 부탁드립니다.”

 사실 그녀는 정 팀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이걸 헬스 케어 제품과 연결해서 기획 짜라고 말했던 적도 없으면서. 하지만 우선 물어보니 모른다고 할 수밖에.

 홍보 팀 권 과장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말을 돌렸다.

“어쨌든, 이것도 새옹지마라고, 헬스장하고 연계한 생수 프로모션 엎어져서 어떻게 헬시하게 가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또 잘 무마가 되네요. 물론 이제부터 새로 시작이지만요.”

 순간 재희의 얼굴이 굳었다.

 헬스장하고 연계한 생수 프로모션이라니? 너무도 귀에 익은 기획이다. 재희가 구석에 앉은 정 팀장을 향해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정 팀장은 모른 척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이제야 머릿속에서 합이 착착 맞았다. 김 과장이 제 기획에 어깃장을 놓아 엎은 것. 둘이 쿵짝 해서 TF 팀에 온 심혈을 기울인 것. 경쟁사 청랑 음료에서 생수 연계 헬스장 이벤트가 나온 것. 갑자기 TF 팀 일이 어그러진 것. 그리고 새롭게 꾸며지는 기획.

‘하, 둘이 내 거 뭉개 놓고는 여기 와서 풀었구나. 그리고 청랑에서 비슷한 거 나와 엎어지니까 마케팅 팀 거 다시 들고 여기 왔고.’

 저러고도 상사라고. 귓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절 싫어하는 줄은 알았지만, 뒤에서 그렇게까지 작당을 한 줄은 몰랐다. 차라리 아이디어가 부족하니 네 걸 달라고 했으면 나았을 텐데.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감정이 일렁거려 참기가 힘들었다. 웃고만 있던 재희가 표정을 굳히자 덩달아 다른 TF 팀원 얼굴에도 의아함이 돌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그때, 강주의 목소리가 울렸다.

“피곤하네요. 쉬었다 다시 합시다.”

 그는 얼어붙던 재희의 분위기를 깨뜨린 후 아무렇지 않게 먼저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다른 이들도 와글와글 수다를 떨며 의자에 편히 등을 대고 앉았다.

 재희는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누군가에게 메시지 하나를 보내고는 정 팀장에게 다가갔다.

“저랑 대화 좀 해요, 팀장님.”

 둘 사이에 아주 많은 대화가 오갈 예정이었다.

 재희는 휙 뒤를 돌았다. 회의실 근처 옥외 정원. 인적 드문 곳에 나와 비밀스러운 대화를 할 참이었다.

“팀장님,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뭘? 무슨 소리야, 갑자기.”

 정 팀장은 우선 발뺌했다. 재희의 말이 무언지 분명 알 텐데도 모른 척 외면한 것이다.

“김 과장님하고, 팀장님께서 저 싫어하는 거 잘 알아요. 그래도 이건 아니죠.”

“윤 주임, 난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뭐야, 진짜.”

 어쨌든 재희의 기획안을 들고 온 건 김 과장이었다. 정 팀장과 김 과장이 재희의 기획안을 들고 쿵짝 하기는 했으나 궁극적으로 그걸 훔친 건 정 팀장 자신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렇기에 반 정도는 진실로 뻔뻔할 수 있었다.

“봄맞이 생수 프로모션 제가 기획한 거였잖아요.”

“그랬어? 난 몰랐지.”

“김 과장이 고루하다고 접으라고 해서 저 우선 접었어요. 그런 걸 이런 식으로 쓰는 건 정말 너무하셨습니다, 팀장님.”

“아, 씨. 몇 번 말해? 난 몰랐다니까!”

 결국 정 팀장이 왁 소리를 질렀다. 목에 단단히 핏줄이 돋는다. 끝까지 그냥 몰랐다고 발뺌할 생각이었는데, 침착한 얼굴로 절 혐오스레 쳐다보는 재희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당히 휘어지고 싹싹 비빌 줄 알아야지. 저래서 사회생활을 어찌하려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예뻐하려야 예뻐할 수가 없는 것. 얼굴만 반반하게 이쁘장하면 단가.

“야, 윤재희, 나는 진짜 몰랐다니까. 김 과장이 자신만만하게 이거로 가자고 하니 간 거지! 그걸 나한테 덮어씌우려고 하면 어떡해?”

“아뇨, 팀장님 알고 계셨어요. 제가 초기 기획할 때 팀장님 메일로 뼈대 잡아서 보낸 적 있었잖아요.”

“…….”

 입술을 짓씹던 정 팀장이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화단에 앉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제 식대로 나갈 생각이었다. 주임 주제에 네가 나한테 뭐 어쩔 건데?

“야, 넌 애가 왜 그렇게 피곤하게 구냐? 좀 사근사근, 부들부들해야 내가 예뻐해 주고 그러지.”

“팀장님께 부들부들 예쁜 짓 하려고 들어온 회사 아닙니다. 그리고 팀장님도 제 기획안 훔치려고 팀장 되신 건 아니실 테고요.”

“야이씨……! 말을 해도 재수 없게!”

 정 팀장은 순간 욕설을 뱉으려다가 겨우 참았다. 마음 같아서야 한 대 뺨이라도 쳤는데. 그는 다시 억지로 웃더니 재희를 향해 고개를 삐딱하게 들었다.

“알겠어, 윤재희. 내가 네 기획안을 좀 업무 공유했다고 쳐. 그런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

 오히려 그가 당당하게 나오니 재희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너 뭔가 잊은 모양인데, 나 팀장이야. 상사라고. 너 고과 주는 사람도 나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협박하듯, 회유하듯, 정 팀장은 말했다. 재희는 그 말에 오히려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태도가 어처구니없기도 하거니와…….

 웃는 재희를, 정 팀장은 능글맞게 올려다보았다. 저게 화가 나다 못해 미쳤나 보다, 그리 생각하는 참이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전 잘 모르겠네요. 정 팀장님.”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저음이 나른하게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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