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경쟁 업체인 청랑 음료에서 새로운 프로모션을 연다며 홍보 피드를 올린 것이다. 헬스장, 운동 동호회와 연계하여 음료를 제공하고 선발 대회를 연다는 게 주요 골자였다.
“아, 이거…….”
예전에 자신이 기획하던 봄맞이 프로모션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청랑 음료가 어떤 회사인가. 선강을 뒤쫓는 2인자이다. 그런 시점에서, 청랑과 똑같은 기획안을 본인이 냈다고 상상하면…….
‘당장 파기지. 자존심 상하고 쪽팔린 일이니까.’
등골이 오싹했다.
혹시 차 상무님은 알고 계셨던 건가? 그래서 차에서 내 기획안을 본 뒤 ‘그거 어차피 헛수고였을 거’라며 충고를 해 주려고 했던 것?
재희는 팔뚝을 슥슥 쓸어내렸다. 기획안이 김 과장 선에서 잘린 게 새삼 다행이라 생각됐다.
그 시각. 6층 회의실.
외근 중인 영업 팀장을 제외하고, TF 팀 팀원 모두가 급히 소집됐다. 모두 얼굴이 착잡하게 죽어 있었다. 특히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했던 정 팀장과 김 과장은 맥이 하나도 없는 표정이었다.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엎어지는 거야 흔한 일이었다. 심지어 이번 일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불가항력적 사건 아닌가. 이벤트 주요 골자가 겹칠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금전적인 손해가 발생하는 이상 눈칫밥을 먹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화면에 뜬 청랑 음료의 포스터를 보며, 강주가 안타까운 결단을 말해 왔다.
“지금 우리가 진행 중인 프로모션, 일단 중지입니다. 이유는 아시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벤트가 이렇게 겹치는데 어떻게 더 진행하겠는가.
선강이 청랑을 따라 한다는 오명은, 자존심상 용납하지 못한다. 이미 찍어 놓은 인쇄물과 제작해 놓은 제품, 컨택 업체와의 계약을 무산시키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하고, 다른 방향으로 다시 기획해 봅시다.”
침울해진 분위기를 향해 강주가 가볍게 말을 던졌다. 의자에 편히 앉으며 말을 잇는다.
“우선, 프로모션을 진행하기는 해야 합니다. 청랑이 공격적으로 나오는 이상 방어는 해야 하니까요.”
팀원들이 고개 들어 작게 “네!” 하고 답했다.
“최대한 빨리 치고 나갑시다. 청랑이 화력 다 태우기 전에, 우리가 새 불씨를 가져와야 해요. 묵혀 두었던 기획안이라도 좋으니 우선 다 들고 오세요. 새로 깎으면 되는 거니까.”
“네!”
강주는 고개를 끄덕인 후 이제 나가 보라며 마지막 인사를 보냈다. 회의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조차 아깝다는 뜻이었다.
줄지어 나가는 팀원 중 두 명의 등 뒤에 강주의 목소리가 꽂혔다.
“정 팀장과 김 과장은 잠시.”
나가려던 두 사람이 뒤돌아 주춤주춤 강주 앞에 섰다. 포식자 앞에 선 피식자처럼 두 사람의 어깨가 쪼그라들었다. 저들 잘못이 아니었지만 우선 프로젝트가 무너지니 꼬리가 말렸다.
“앉으세요, 올려다보려니 불쾌하네요.”
“아, 네. 네. 죄송합니다.”
둘은 곧 강주 맞은편 테이블에 앉았다. 턱을 괸 강주가 단조롭게 물었다.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이벤트 주제 겹치는 것 말씀이십니까? 아뇨!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요? 운이 아주 없거나, 감이 몹시 없었던 거네요.”
“아…….”
정 팀장 등골이 쭈뼛 섰다. 눈치껏 파악해 보건대 저 차강주 상무는 지금 프로모션 엎어진 걸 아랫사람 탓하고 싶어 불러 세운 게 뻔했다. 어떻게든 책임 소재를 넘기려고.
재벌가 후계자의 이기적인 성향이야 뻔하지 않은가. 자신이 승인한 프로젝트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엎어진 이상, 그 탓을 실무자에게 돌리고 싶은 거다. 이기적인 놈 같으니.
잘 보이는 건 그른 것 같고 불똥이나 튀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리 생각하며 정 팀장은 목울대를 꿀꺽 넘겼다.
“송구합니다. 저희도 정말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라.”
“정 팀장이나 김 과장을 타박하려는 건 아니에요. 이런 일을 누가 예상하겠습니까. 정 팀장과 김 과장에게 노를 쥐여 준 제 안목에 문제가 있던 거지요.”
“아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강주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제게 죄송할 건 없습니다. 다만, 이번 프로젝트에서 두 분은 서포트 중심으로 가도록 하죠.”
재수 없으니 뒤로 빠져 있으라는 뜻이었다. 신규 제품을 발매할 때마다 굿까지 하는 임원들도 있었으니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엎어진 일을 추진하던 관리자를, 운 떨어졌다는 명목하에 뒤로 빼는 일이야 없을 일도 아니지.
“네, 알겠습니다.”
정 팀장과 김 과장은 풀 죽어 어깨를 내렸다.
“저녁 스케줄 다시 체크해 봐요.”
비서에게 말한 강주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데스크에 다다르기도 전에 휴대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네, 차강주입니다.”
-유인환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휴대 전화 너머로 호쾌한 목소리가 반갑게 울렸다. 상대는 선강과 경쟁 관계에 있는 청랑 코리아 유인환 전무. 청랑 대표 이사의 친족이라 임원 자리를 꿰찬 사람이었다.
그와는 모임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유 전무는 술이 들어가면 비밀이 없어지는 타입으로, 일전에 강주에게 제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내용을 낱낱이 밝힌 적 있는 바였다. 헬스장과 연계하여 프로모션을 기획 중이라는.
강주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 프로모션 나온 것 봤습니다. 반응이 괜찮던데 축하드립니다.”
-경쟁 업체 상무님께 그런 말씀을 들으니 어쩐지 낯간지럽네요! 모두 차 상무님 덕 아니겠습니까.
“제가 뭐 한 게 뭐가 있다고.”
-상무님 연락 없었으면 엎어질 뻔하지 않았습니까? 타 업체가 헬스장 연계해서 대대적으로 이벤트 열 준비 한다는 거 몰랐으면 다 준비해 놓고 마음 놓고 있다가 뒤통수 맞을 뻔했습니다! 바보같이!
전화 너머 유 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헬스장 연계 음료 프로모션을 마무리 단계까지 진행하고 오픈 시기를 재는 도중 강주에게 연락을 한 통 받았다. 타 업체가 비슷한 프로모션을 진행하기 위해 여기저기 컨택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일전에 강주와의 술자리에서 술에 취해 준비 중인 프로모션 내용을 떠든 적이 있었는데, 그걸 기억한 강주가 도움을 주기 위해 연락한 것이라 유 전무는 생각했다.
이제 오픈만 남은 마무리 상태인지라, 타 업체와 이벤트 골자가 겹쳐 엎어지는 건 절대 안 될 일. 때문에 유 전무는 강주의 연락을 받자마자 프로모션을 서둘러 오픈했다. 결과는 물론 성공적이었다.
이벤트도 먼저 선점했으며 반응도 괜찮았다. 강주의 덕이었다.
-미리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무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합니까?
“은혜는 괜찮고, 다음에 밥 한번 사 주십시오.”
-예! 예!
이후로 둘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고는 전화를 끊었다. 강주는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언제 웃었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다른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 역시 벨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강주는 인사조차 생략한 채 본론부터 건넸다.
“고유민이 네 여자 친구라고 했나?”
***
“그걸 다 가져가면 탄산수 프로모션은 어떡해요? 우린 이번에 뭐 해요, 그럼.”
마케팅 회의 시간. 재희는 어이없다는 듯 김 과장을 향해 반문했다. 정 팀장과 김 과장이 갑자기 마케팅 팀 회의를 소집하더니, 묵힌 아이디어를 다 내놓으라며 엄포를 놓은 것이다.
재희는 봄맞이 생수 프로모션을 준비했다가 노선을 바꾼 참이었다. 탄산수로 주제를 바꾸어 활기차고 톡톡 쏘는 분위기로.
그리고 팀 회의 끝에 재희의 의견이 채택되어 진행하기로 결론 난 상태였다. 물론, TF 팀 업무 중인 정 팀장과 김 과장에게도 서면 승인을 받은 상태였다. 한데 그걸 내놓으라니? 내일부터 큐 사인만 나면 바로 시작인 것을.
임 대리가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저희 매일 돈만 쓰지 가시적 효과 못 낸다고 여기저기서 욕먹는데……. 이번에 그거 갖고 가시면, 새로운 거 구상하느라 시간 가고. 타격 커요.”
정 팀장이 탕! 하고 테이블을 때렸다.
“됐어! 마케팅 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우선 다시 기획해!”
안 그래도 차 상무에게 찍힌 것 같아 기분이 안 좋건만.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사원들 태도에 언짢아졌다. 지금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팀장인 내가 난처하게 됐는데 말이야. 내가 살아야 자기들도 사는 걸 왜 몰라?
“아무튼, 윤재희 넌 기획안 싹 정리해서 내 앞으로 올려. 뚜껑에 이름은 빼서.”
그 말을 끝으로 정 팀장은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김 과장 역시 급히 정 팀장을 쫓아 나가려다가, 문고리를 붙들고 마지막으로 외쳤다.
“윤재희, 너 들었지? 어디 어디 컨택했는지, 공장하고 말은 어디까지 맞췄는지 다 적어 놔!”
그리고 부리나케 정 팀장을 향해 달려 나갔다.
회의실에 침묵이 감돈다. 남겨진 팀원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쾅 닫힌 문만 응시했다. 지금 저 두 사람이 마케팅 팀 소속이 맞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지금 마케팅 팀 팀장이 마케팅 팀 아이디어 무산시키고 TF 팀에 이관시키겠다고 하는 건가?
임 대리가 등받이에 허리를 대며 중얼거렸다.
“와, 저 진상…….”
나머지 다섯의 고개 역시 절레절레 흔들렸다.
***
이틀 뒤.
TF 팀 회의가 진행 중인 실내에는 전운마저 감돌았다. 한 명씩 아이디어를 빠르게 정리하여 발표한다. 정 팀장 역시 차례를 기다리다가 제 순서가 오자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 섰다.
자신만만하게 기획하던 일이 런칭을 바로 앞두고 무너졌으니 떨릴 법도 했다. 이미지 쇄신을 꼭 해야 할 텐데. 저 상무 놈이 기분 나쁘다는 사소한 이유로, 절 파리 죽이듯 누르면 어찌하겠는가.
정 팀장은 재희에게 받았던 파일을 뒤적이며 발표를 시작했다.
“이미 뽑은 샘플과, 알바 인력들을 최대한 활용해 보려고 기획한 안건입니다. 프로모션을 관통하던 생수와 헬스장, 운동 동호회는 키워드는 우선 날렸고요.”
틱틱. 곁에 있던 김 과장이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넘겼다. 탄산수병 사진이 나왔다.
“생수 말고 탄산수로 가는 겁니다. 생수가 주는 활력에 톡톡 쏘는 키치함까지 가미한 이미지를 탄산수가 맡을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운이 좋게 보틀 라벨 크기도 생수와 딱 맞아요.”
“아까 말씀하셨던 알바 인력 대체는 어떻게 하나요?”
“아, 네. 그것도 문제없습니다. 헬스장과 동호회에 파견되기로 했던 인력을 좀 모아서요, 한강이나 이런 곳에 배치해서 다른 이벤트로 가는 겁니다. 포스터는 이런 식으로 시안이 나와 있습니다.”
화면이 넘어가자 민트색 바탕에 쨍한 폰트가 박힌 포스터가 나왔다. 상품 팀 과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정 팀장 편을 들었다.
“그거 괜찮겠네요. 이미 찍은 라벨도 활용할 수 있는 데다가 활력과 생기로 가려고 했던 이미지와도 맞고. 단 거 섞인 음료가 아니니 잘 구성하면 헬스 케어 제품과도 연관 지을 수 있겠어요.”
맞아요, 그러네요. 몇몇이 동조했다. 시간이 없는 이상 적당한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바로 진행하는 게 낫겠다고 모두 생각하는 바였다.
듣고만 있던 강주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기획안 괜찮네요, 정 팀장님.”
“감사합니다, 상무님.”
강주의 긍정적인 피드백에 정 팀장의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이대로만 가면 어떻게 잘 무마될 것 같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질문에 올라가려던 입꼬리를 굳히고 말았다.
“그런데 그것도 정 팀장 아이디어입니까? 부족한 시간에 굉장히 체계적으로 준비하셨군요.”
정 팀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이건 윤재희 것이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업무 공유라 생각하며 적당히 무마하면 되는데. 준비된 자료가 너무 제대로라 발뺌하기가 퍽 마음에 걸렸다.
“아, 그게. 사실 이건 마케팅 팀에서 준비하려다가 사정이 생겨 뒤로 밀어 놓은 기획안입니다. 제가 거기서 조금 살을 덧대서 보기 좋게 포장한 건데, 예쁘게 출하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정 팀장은 반쯤 진실이 섞인 거짓을 술술 뱉었다. 마케팅 팀에서 기획하던 걸 빼 왔다고 말하면 너무 없어 보이지 않은가.
강주의 입꼬리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