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96)

 #16

 5장. 나는 속아서

 발정 난 미친놈.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고. 재희는 헛웃음을 지으며 탁탁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그의 집에서 나온 후, 바래다준다는 권유를 내치고 혼자 온 참이었다.

 열심히 움직이던 발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제 몸을 주욱 훑었다. 단정한 코트, 까만 바지, 하얀 운동화.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카메라를 켰다. 추위에 하얗게 질린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 보면 꽤 봐 줄 만한 것 같기는 한데, 그의 주위에 있을 법한 화려한 미인은 아니다. 밋밋하고 수수한 흔한 여자.

 이 몸과 이 얼굴을 보고 어떻게 ‘가끔 환장해서 발정한다.’라고 할 수 있지. 내가 딱 봐도 섹시한 타입은 아닌데.

 재희는 휴대 전화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는 열심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해가 짧은 겨울이라 벌써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이 동네는 조금만 어두워져도 을씨년스러워진다.

 그림자가 낡은 골목길 뒤로 주욱 늘어졌다. 그리고 그 그림자 뒤로 누군가가 형체를 드러냈다.

“재희야!”

 재희는 우선 한 번 무시했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구인지 알아차렸으나 뒤돌아보고픈 생각은 없었다. 못 들은 척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뒤에서 누가 그녀의 팔을 확 잡아챘다.

“윤재희!”

 결국 재희는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았다. 초조한 표정의 민철이 입술을 짓씹으며 서 있었다. 외모 하나만큼은 깔끔하고 잘생겼던 그의 눈 아래 수심이 잔뜩 달려 있다.

 팔뚝을 붙든 손아귀 힘이 우악스러웠다. 재희는 그의 손을 내치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오래간만이네.”

“오래간만? 오래간만? 우리가 어쩌다가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헤어졌으니까. 그러니 오래간만에 만났지.”

 그녀는 민철을 향해 깔끔히 선을 그었다. 민철의 곧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아직 헤어짐을 인정하지 않은 듯 씨근덕거리며 목을 벌겋게 물들인다.

“네가 내 연락을 안 받으니까! 날 피하니까!”

“헤어졌으니 연락할 필요 없는 거잖아.”

“야, 윤재희!”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민철과 달리, 재희는 그들을 덮은 겨울 공기처럼 냉랭하기만 했다. 민철은 화가 어지간히 났는지 뒤돌아 낡은 돌벽을 쾅 발로 찼다.

“아오, 씨!”

 재희는 몸을 굳혔다. 분노한 민철이 낯설었다. 저보다 훌쩍 커다란 사내가 어둠 속에서 폭력적으로 행동하는데 태연할 수 있을 리가.

 솔직히 두려웠다. 하지만 이내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이 자리를 어서 빠져나가자. 힘으로는 이길 수 없으니 그냥 피하자. 개가 짖으면 도망가야지.

 민철을 두고 급히 뒤돌려는데, 민철이 눈을 벌겋게 물들이고 다가왔다.

“너 진짜 그 새끼랑 만나냐?”

“그 새끼?”

“상무, 그 호텔에 있던 새끼 말이야!”

 어이가 없어 웃음이 샜다. 만나는 사이도 아니거니와, 혹여 만난다 한들 어떤가. 자신이 상무님을 만나든 과장님을 만나든 이제 민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토록 위협하며 눈을 부라릴 필요 없다는 뜻이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그 말에 민철이 소리를 왁 질렀다.

“내가 왜 상관할 바가 아니야! 너 진짜 오해한 거야. 정말 오해라고. 우리 정말 이렇게 헤어질 일 아니었어. 너 나 알잖아!”

“어, 알지. 너 아주 잘 알지. 그래서 더 배신감 느꼈고.”

“오해라고 했잖아! 오해라고!”

“내 눈으로 봤는데 무슨 오해야.”

“네가 나한테 철벽만 안 쳤어도! 내가! 아오, 진짜!”

 민철이 목소리가 저렇게 컸었나. 난 왜 미처 몰랐지. 재희는 그의 악다구니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쾅쾅 발로 땅을 구른 민철이 제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흐트러뜨렸다. 그러곤 재희에게 뚜벅뚜벅 다가와 두 손으로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재희야, 너 평생 이런 거지 같은 동네에서 살 거야?”

“뭐?”

“네 그 쓰러져 가는 집 월세 내 하루 술값도 안 돼. 알지? 내가 네 왕자님 될 수 있다고. 네 수준에서 만날 수 있는 왕자님 마지노선은 딱 나란 얘기야. 그 사람 아니야.”

 재희의 눈빛에 치욕감이 올라왔다.

“난 왕자님 바란 적 없어.”

“근데 현실이 그렇잖아. 네가 어떻게 그 사람을 만나. 주제를 알아야지. 몸 주고, 마음 줬다가 무슨 꼴 당하려고.”

“…….”

“나니까 널 이런 구렁텅이에서 구해 줄 생각 하는 거야. 잘 생각해 봐, 재희야. 응? 현실적으로, 미래를 생각해서. 나한테 튕기면서 자존심 세울 때 아니란 말이야.”

 …뭐, 이런.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샜다. 분노가 한계에 다다르면 그냥 웃음이 나는가 보다. 재희는 픽픽 웃으며 민철을 물끄러미 올려 봤다. 내가 왜 미처 몰라봤지. 이런 놈을.

 민철이 그녀의 팔뚝을 더욱 꽉 쥐며 고개를 내렸다. 뱀처럼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그녀를 헤집었다. 문득,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센 손아귀 힘도. 까맣게 너울거리는 눈동자도.

‘상무님은 이렇지 않았는데.’

 강주가 떠올랐다.

 그를 가까이 마주하노라면 심장이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두 팔 벌려 그를 끌어안고 싶은 낯부끄러운 충동만이 일었었다. 그가 절 가만히 들여다볼 땐, 아랫배에 미열이 흐르고 흥분이 고여 발끝이 자르르 떨리고는 했다.

 분명, 정민철을 눈앞에 둔 지금과는 상반된 감정이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야 비로소 확실히 깨닫고 말았다. 차강주, 그를 향해 자신이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애타는 연정. 그와 떨어져 있던 동안 잊었다고 생각한 마음. 그가 절 밀어냈을 때 지워 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마음.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돌아와. 내가 다 용서해 줄게. 그 새끼랑 뭘 했든, 어떤 더러운 짓을 했든, 다 넘어가 줄 테니까. 응?”

“나 너한테 용서받을 일 한 적 없어.”

 재희는 절 움켜쥔 손아귀 힘을 뿌리쳤다. 온 힘을 다해 그의 어깨를 밀치자, 민철은 두 걸음 뒤로 움직여 부스러지기 시작한 돌담에 부딪혔다.

“정신 차려, 정민철.”

 재희가 그를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네가 뭔데 날 구해 줘? 돈 몇 푼 더 가졌다고 내게 우월감 느끼기라도 한 거야?”

“그게 아니라, 난 현실을!”

“뭔가 착각하나 본데 우리 관계, 네가 아니라 내 선택으로 시작된 거였어. 너 한 거 아무것도 없어. 우리 사이 끝난 것도 다 내 의지였다고.”

 민철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재희의 말에 차마 반박할 수 없어 더욱 분노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재희는 그에게 붙잡혔던 팔뚝을 불쾌한 듯 툭툭 털었다.

“민철아, 너 왕자님 아니야. 내게 선택됐다가, 필요 없어서 버려진 놈일 뿐이야.”

“…….”

“그리고 네가 말하는 ‘그 사람’ 입장에서는 너나 나나 다 거지야. 왕자는 무슨. 우리 같은 거지끼리 추하게 이러지 말자.”

 냉정한 그녀의 말이 송곳처럼 박혔다.

 민철을 몇 초간 노려보던 재희가 이내 등 돌렸다. 그리고 어둠으로 새까맣게 물든 골목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절 노려보는 민철의 음습한 눈빛을 피해 멀리멀리.

 후다닥 문을 걸어 잠그는 재희의 손짓이 다급했다. 재희는 얇은 철문을 걸어 잠그고는 차가운 벽에 이마를 댄 채 잠시 심호흡을 했다. 추위가 아닌 공포와 두려움에 기인한 떨림이 손끝을 타고 흐른다.

“언니?”

 의아한 효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발끝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당당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표독한 말을 전했으나 사실은 무서웠다.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제 팔뚝을 붙들던 힘도, 무시무시하게 절 노려보던 눈빛도 받아들이기 벅차 입술이 떨려 왔었다.

 재희는 심호흡 끝에 겨우 팔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에 닿던 벽을 지지해 상체를 세운 후, 효정을 향해 뒤돌았다.

“언니, 뭐 해? 왜 그래?”

“아니야, 잠깐 어지러워서.”

“괜찮아?”

“응, 괜찮아. 이제 저녁 먹자. 뭐 먹고 싶어?”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척 덤덤하게 웃었다.

 정민철. 그놈은 절 두려움에 떨게 할 수 없다. 그의 말처럼 다 떨어져 가는 집에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 예쁜 효정이가 있는데. 약해질 새가 어디 있겠는가.

 ***

 재희는 민철이 보낸 메시지를 경찰관에게 내밀었다.

“이런 경우엔 혹시 접근 금지 같은 거 신청할 수 있나요?”

 그녀는 지금 막 민철과의 일화를 경찰관에게 설명한 참이었다. 휴대 전화를 넘겨받은 경찰이, 심각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너 진짜 후회할 거야.]

[아니야, 내가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제발 다시 생각해 줘. 시간을 두고 돌이켜 보면 내가 그리워질 거야.]

[내 탓만 있어? 네 탓도 있잖아. 너 진짜 독하다, 윤재희]

답 한번 보내지 않음에도 지치지 않고 몰아치는 메시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무서웠다. 그날 이후로도 민철은 기어코 다시 찾아왔었다. 그를 발견한 후 재희는 다시 골목을 돌아 나가 동네 입구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절 데리러 온 효정이와 함께 들어갔었다.

 다행히 민철은 가고 없었지만, 몹시 억울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해서. 만나서 해결하고 싶기는 했으나 본능적으로 거리낌이 들었다. 저번에도 느끼지 않았나. 민철이 절 우악스럽게 쥐었을 때 느꼈던 힘의 차이를.

 한참이나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던 경찰이 다시 그것을 건넸다. 그리고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기는 한데, 이 정도 일은 신고 사유가 되지 못해요.”

“그런가요.”

 별다른 기대 없이 온 터라 재희는 담담하게 답했다. 타인의 눈에는 그저 흔한 사랑싸움으로 생각될는지도 모른다. 재희는 새삼 팍팍한 현실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그럼 어쩔 수 없죠.”

“조심하시고요. 해 드릴 게 없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수고하세요.”

 재희는 한숨처럼 웃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

 그 이후, 재희는 아예 휴대 전화 번호를 바꿔 버렸다. 민철이 모르는 번호로 자꾸 문자나 전화를 해 대는 통에 힘들었던 탓이다. 번들거렸던 민철의 눈동자를 떠올릴 때마다 솔직히 무서웠다. 내겐 든든하게 힘이 되어 줄 엄마나 아빠도 없는데.

“야, 너 영업 팀 과장이 칭찬하더라? 말귀 척척 잘 알아듣는다고?”

 김 과장의 이죽거림이 옆에서 들려왔다. 재희는 옆을 돌아보았다. 느끼하게 윙크하는 김 과장의 얼굴이 보였다.

“내 일 제대로 진행해 줘서 고마워. 커피 하나 살게.”

“괜찮습니다, 김 과장님. 이제 제 일이니까요.”

“이야, 선 딱 자르는 거 봐. 그래, 네 일이다. 됐지?”

 아, 저 능글거림 너무 싫다. 재희가 눈썹을 살며시 구겼다.

“아무튼 내가 요새 좀 바쁘잖냐. 계속 부탁할게. 고맙다?”

 딱딱한 손이 내려와 재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떠났다. 재희는 기분 나빠 어깨를 털었다. 일 맡긴 후 튀어 놓고는 사람 좋은 척은.

 요새 김 과장 얼굴이 싱글벙글이었다. 이번에 차강주 상무님 TF 팀에 들어가서 정 팀장님과 둘이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 중이라나?

 주요 프로젝트에서 운전대를 잡아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지금이야 차 상무가 푸드, 음료 쪽 계열사만 맡고 있다지만 그가 회장 아들인 이상 곧 선강 그룹 전체를 주무르게 될 터다. 아무래도 정 팀장과 김 과장은 차 상무와 이어질 핑크빛 망상이라도 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분명 두 사람과는 억만 광년 떨어진 차강주 상무인데.

‘…핑크빛 망상.’

 김 과장의 둥실둥실 떠다니는 마음을 욕하려니, 마치 스스로를 욕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나 역시 상무님을 향해, 아니 강주 오빠를 향해 혼자 핑크빛 연정을 품었었으니.’

 김 과장과 다른 점이라고는, 자신은 이제 헛된 희망을 꿈꾸지 않는다는 점. 풍선처럼 부푼 마음을 가졌다가 막상 강주에게 내쳐졌을 때의 상심을 몸서리칠 만큼 잘 알고 있다는 점.

 ***

 다음 날, 아침. 재희는 출근하자마자 인터넷 검색창을 열었다. 경쟁사 업체에서는 어떤 프로모션을 새로 냈는지, 무슨 기사가 났는지, 하나하나 체크하며 메모했다. 그리고 SNS에 들어가 경쟁사들 게시물을 하나하나 내려 보는데.

“…어?”

 깜짝 놀란 재희가 마우스질을 멈췄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