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당황한 정 팀장이 순간 얼굴을 굳혔다.
뭔가를 알고 묻는 건지, 그냥 농담인 건지. 하지만 차강주 상무가 이게 누구 아이디어인지 알 리가 있나.
게다가 자신은 그냥 윤재희라는 사원의 미공개 아이디어를 빌렸을 뿐이다. 같은 팀이니 업무 공유하는 건 당연한 일. 죄책감 역시 느낄 필요 없었다. 마케팅 팀 아이디어가 사원 혼자만의 것이겠는가. 정 팀장은 그렇게 자기 합리화했다.
정 팀장이 허허 웃으며 제 뺨을 착착 두드렸다.
“제가 이렇게 노티 나게 생겨서 다들 아이디어도 구식일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저 마케팅 팀 정 팀장입니다! 아이디어는 항상 새롭고 파릇파릇합니다!”
강주 역시 픽 웃었다. 입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정 팀장을 응시하는 눈빛은 사뭇 싸늘했다.
“그래요, 정말 생긴 대로 놀지 않으시네.”
자칫 무례한 발언이라 느껴질 수 있으나 모두 그냥 웃어넘겼다. 당사자인 정 팀장 역시.
그 이후로도 정 팀장의 프레젠테이션은 계속됐다.
“우리 선강 제품이 역사가 깊다 보니까요, 업계 1위이긴 하지만 이미지가 정체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좀 통통 튀고… 그… 차 상무님께서 말씀하셨던 키치한 이미지! 그걸 끌어올리자고요.”
“근데 그거 너무 뻔하지 않아요?”
“1+1으로 할인 때리는 것보다 낫죠. 생명 터뜨리는 봄에 생기 있게 에너지 충전시켜 주는 수분! 봄꽃하고 색상 연계해서 사진 잘 나오게 디자인 뽑고, 지금 헬스 케어 신규로 나오는 수분 보충제랑 연계해서 광고 때리고. 여름 되면 같은 색상으로 탄산 가고. 주류도 가고요.”
정 팀장을 보조하던 김 과장이 옆에서 거들었다.
“이벤트성으로 커버 예쁘게 해서 나눠 주고 웃긴 문구 넣어 주면 저절로 해시태그 달려서 바이럴 되니까요.”
자신만만한 정 팀장이 말을 넘겨받았다.
“우리 선강 제품이 품질 하나는 알아주지 않습니까. 대신 가격도 비싸지만. 어쨌든 그걸 잘 살려서 비싸고, 예쁘고, 몸에도 좋은, 보장된 제품인 걸 확 드러내는 거죠. 우리 딸기 음료에는 딸기도 많이 들어갔잖아요. 딸기 사진 파스텔 톤으로 예쁘게 확 박아 버리고, 예쁘게 예쁘게.”
전혀 예쁘지 않은 얼굴로, 정 팀장은 예쁘다 예쁘다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강주의 표정을 살피며 마무리 지었다.
“그래서, 저와 김 과장은 여기까지 생각했습니다.”
강주는 턱을 괸 채 아까부터 묘한 눈빛으로 정 팀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정 팀장이 말을 멈추자 눈을 내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강주의 반응을 기다리는 정 팀장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뜸을 들인 강주가 다시 시선을 들었다.
“우리 디자인의 강점도 있으니, 만약 정 팀장 제안이 진행된다면 단발성이 좋겠어요. 헬스장이나 운동하는 사람들 바이럴을 중심으로 헬시한 이미지 살리는 건 긍정적으로 생각되네요.”
“감사합니다.”
“정 팀장 말대로, 다들 과대광고하는 판에 우리 선강 제품은 품질보다 커버가 너무 겸손하죠.”
그 말에 모두 약간 웃었다. 정 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웃는 팀원들을 비집고 강주는 정 팀장을 잠잠히 응시했다. 냉랭하고도 새파랗게.
***
“상무님, 부르셨어요?”
강주의 사무실에 들어온 재희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한참 오후 업무를 하고 있는데 그에게 호출이 와 당장 올라온 것이었다. 이전에 정 팀장에게 혼난 뒤에 올라왔을 때 빼고는, 절대 다시 올 리 없다고 생각한 장소였는데.
서류를 들여다보던 강주가 고개를 들었다.
“저번에 제 차 안에서 봤던 재희 씨 이벤트 기획서, 제가 말해 줄 게 있다고 했었죠.”
“네, 상무님.”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탁 던진 강주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거 마케팅 팀에서 진행하는 겁니까?”
“아니요, 초기 기획안이었는데 파기됐습니다.”
“왜죠?”
“너무 뻔해서요.”
초기에 날아가는 거야 늘 있는 일이니 쉽게 답했다.
“마케팅 팀 회의 중에 나온 적 있는 아이디어인가요?”
“아니요, 구상 단계에서 엎어졌습니다.”
“상급자 반대로?”
“네.”
“김 과장이나 정 팀장이었나요?”
“아……. 네.”
어떻게 아셨지? 순간 놀랐으나 이내 가라앉혔다. 제 상사가 그들 말고 한두 명밖에 더 있나. 아무래도 자신과 그들이 사이가 나쁘다는 걸 아니 대충 예상한 모양이다.
강주가 실소를 내뱉었다.
“그거 어차피 헛수고였을 테니 아쉬워하지 말아요. 그거 말해 주려고 불렀는데…….”
그가 말끝을 흐리며 어쩐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바깥을 향해 손짓했다.
“용건 끝났으니 이제 가 봐도 됩니다.”
“예, 상무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희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가자마자 문에 기대서서 쿵쿵 뛰는 심장에 손을 올렸다.
나 제대로 대답 잘 했겠지. 반응 괜찮았겠지? 그가 ‘차 안에서 봤던 이벤트 기획서’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심장이 요동쳐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날 차 안에서 나누었던 키스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뜨겁게 엉기던 혀도, 부드럽게 귓가를 훑던 입술도 아주 생생하게. 상무실 안에서 단정하게 앉아 있는 저 사람이 이따금 눈동자 안에 뜨거운 흥분을 담아낸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정작 키스했던 당사자는 무덤덤하게 일 얘기만 하는데 혼자 달아올라서는.
재희는 긴 숨을 몇 번 내뱉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와의 대화를 돌이켜 보니, 아무래도 충고를 해 주기 위해 부른 것 같았다. 진행해 보았자 헛수고라 한 것으로 보아, 어디서인가 비슷한 이벤트가 기획됐다거나 그랬겠지.
‘무심한 것 같은데 은근히 다정하기도 하고…….’
재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강주의 사무실 앞을 떠났다.
홀로 남은 강주는 턱을 괴고 손끝으로 툭툭 책상을 두드렸다.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그는 몸을 바로 세우고는 사내 전화 버튼을 눌렀다.
-네, 상무님.
“다음 주에 잡혀 있는 TF 팀 회의 날짜 좀 더 당겨 주세요. 최대한 빠른 날로.”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 정 팀장이 주도하는 프로모션이 진행될 참이었다. 그것도 정 팀장 주도하에.
***
여지없이 주말이 왔다. 재희는 늘 그랬듯 강주의 집 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상무님. 좋은 아침이에요.”
“왔어요?”
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그를 향해 인사했다. 강주는 창가에 서서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은 물뿌리개를 든 채 화분에 물을 주는 중이었다.
물줄기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난다. 숙인 이마 위로 앞머리가 비스듬히 떨어져 있는데, 결 좋은 머리카락 역시 볕 아래 반짝거렸다.
재희는 홀린 것처럼 강주를 응시하며 기계처럼 반찬 통을 옮겼다. 투둑투둑, 풀잎 위로 튀는 청량한 물소리. 그의 몸에 감긴 새하얀 반팔 셔츠조차 멋스럽다. 면 티 아래 단단히 드러난 팔뚝까지.
그냥 흰 티에 면 트레이닝복을 입었을 뿐인데. 심지어 머리카락도 대충 흐트러져 있는데. 저렇게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같이 멋있을 필요가 있나.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 소리를 들은 것처럼 강주가 고개를 돌렸다. 그를 훔쳐보던 재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팍 숙였다. 숙인 정수리 위로 그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꽂혔다.
“혹시 TF 팀에 들어올 생각 있어요?”
“정 팀장님하고 김 과장님께서 속한 팀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갑자기 왜요?”
물뿌리개 끝에서 물방울 하나가 똑 떨어졌다. 그가 물뿌리개를 대충 털어 내고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조만간 바빠질지도 모르거든.”
재희는 짐짓 미간에 주름이 진 채 생각에 잠겼다.
“저야 그냥 일개 사원이니까 상무님께서 지시하시면 당연히 참여해야겠지만요. 솔직히 선뜻 용기는 나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니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제 상사들이 제게 호의만 갖고 계신 건 아니라서요.”
“그래요, 알아요.”
“여기서 더 악화시키고 싶지는 않아요. 가능하면 회사에 오래 붙어 있고 싶고.”
“우리 회사 복지가 좋기는 하죠. 상무도 멋있고. 오래 다니고 싶은 거 이해해요.”
강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진담같이 농담을 던지고는 물뿌리개를 들고 거실을 벗어났다.
잠시 후, 돌아온 그는 소파에 앉아 재희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재희는 그의 시선을 느꼈으나 우선 모른 척 무시했다.
음, 조금 불편한데.
제 손길 하나, 몸짓 하나에 따라붙는 눈빛이 신경 쓰여 자꾸 속이 초조해졌다. 진한 스킨십 후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상대를 마주하는 건 자신에게 퍽 힘든 일이다.
얼마나 많은 여자를 만났으면, 그런 일이 있는데도 이렇게 덤덤한 걸까. 왜인지 그를 향한 미약한 원망까지 들었다. 자신이 결코 가져서는 안 될, 가질 이유도 없는 주제 모를 원망.
착착착 반찬 통을 정리해 놓은 후 재희가 뒤돌았다. 그리고 여전히 절 시선으로 좇는 그를 향해 용기 내어 말을 건넸다.
“그런데, 상무님. 그날 저한테 왜 그러신 건가요?”
늘 속으로만 삼키던 깊은 의문을.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모를 일이었다. 홀로 고민하며 이렇게 끙끙 앓느니 차라리 직설적으로 묻는 게 낫겠다. 강주가 다소 뻔뻔한 얼굴로 반문했다.
“무슨 일을 말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그……. 상무님하고 제가…….”
어떻게 물꼬를 터야 할지. 재희는 단어 선택을 고심하며 대리석 상판을 문질렀다. 상무님이 제게 먼저 키스하셨던 거요. 이렇게 물으면 되는 건데,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강주가 픽 웃었다.
“차 안에서 먼저 입 맞추라고 했던 거 말하는 거예요?”
“…….”
“아니면 호텔에서 키스했던 거?”
“아…….”
“그것도 아니면. 내가 재희 씨 다리 사이에 고개 처박고 개처럼 핥았던 거?”
그는 한없이 덤덤한 얼굴로, 고저 없는 목소리로, 폭탄 같은 말만 던졌다. 재희는 새빨개진 얼굴로 입술만 달싹였다. 그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글쎄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재희 씨 우는 얼굴이 내 취향이라? 지금도 재희 씨 벗겨 먹고 싶어서 환장한 변태라?”
커브 없는 질문을 받아들이기엔 그녀의 머릿속이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그의 낯선 면을 이런 식으로 마주할 때마다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의 마치 아이를 상대로 하듯,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재희 씨는 내가 왜 이러는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모르니까 물어봤고요.”
“모르고 싶은 건 아니고?”
“아니에요, 도대체 그게……. 그게 무슨 소리세요.”
자신 역시 그처럼 평온하게 답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둘 사이에 있는 부끄러움이란 감정은 오롯이 제 몫인 것만 같았다.
이유 모르게 억울했다. 괜히 속상했다. 혼자만 애타고 안달하는 스스로가 싫을 정도였다.
그가 자리에서 훌쩍 일어났다. 그리고 재희에게 다가와 찬찬히 고개를 숙였다. 재희는 차마 가까이 다가온 그를 마주하지 못했다. 눈앞에 보이는 그의 단단한 가슴팍만 응시했을 뿐이다.
강주는 제 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학습이 더딘 아이를 가르치듯, 지독히도 친절하고 상냥한 문장이 재희의 귓가에 박혔다.
“그냥 가끔씩 재희 씨 얼굴에, 몸에, 환장해서 발정하는 미친놈이라고 생각해요. 마음 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