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재희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켜며 눈을 크게 떴다. 심장이 쿵 떨어져 때렸다. 정작 말을 던진 그는 담담해 보이기만 해서 이상하게 억울하기까지 하다.
강주가 재희의 반응을 비웃듯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표정에 오히려 오기가 들었다.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저번 호텔에서 했던 키스가 만족스러웠는지도. 어쩌면 절 놀리고 싶은 것일지도.
다시 침을 꼴깍 삼킨 재희가 가방을 꾹 붙들었다.
그래, 어쩌면 이건 그의 가벼운 유희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가 자신을 상대로 유희를 즐기고 싶다고 한다면.
지금 눈앞의 강주는 키스 후 절 밀어냈던 예전의 ‘강주 오빠’가 아니니까.
재희는 눈을 꼭 감고는 그를 향해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이미 가까운 거리라 조금만 얼굴을 움직여도 닿을 거리였으나, 차마 다가서기가 힘들었다.
고요한 시선이, 찬찬히 다가오는 재희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긴장한 듯 살짝 찡그린 그녀의 눈썹. 꼭 감은 눈두덩이. 섬세하게 깔린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리는 그녀의 긴장을 지켜만 본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다. 뒤이어 두 입술마저 천천히 포개졌다.
‘아…….’
재희는 입술을 꽉 물었다. 그냥 가볍게 맞닿았을 뿐인데,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뛰고 있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보송한 솜털 하나가 가슴 안에서 간질간질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절 한가득 덮었던 커다란 몸을 기억한다. 둘 사이에 맴돌던 열기를 기억한다. 제 다리 사이로 파고들던 뜨거운 손과, 묵직하게 닿던 그의 흥분까지 선명히 떠올랐다. 상상만으로 허벅지가 움츠러들었다. 야릇하면서도 낯선 감정이었다.
재희는 긴장한 숨을 토해 내며 입술을 떨어뜨렸다. 용기는 거기까지였다.
강주는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그녀를 타인처럼 가만히 내려 보았다. 그러다 입술이 멀어지자 재희의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다시 입술이 닿았다. 놀란 재희의 틈을 벌리고 강주의 혀가 들어왔다. 콧대가 닿고 숨결이 얽혔다. 아주 천천히 혀가 엉기기 시작했다.
“으응…….”
재희는 호흡을 멈췄다. 등줄기를 저릿하게 꿰뚫는 감각이 간지럽다. 어지러웠다.
혀가 미끄러질 때마다 젖은 소리가 느릿하게 울렸다. 입 안을 가득 채운 열기가 뜨거웠다.
강주는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재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와 입을 맞추고 숨을 나누는 그녀의 얼굴을 가라앉은 눈으로.
아주 부드럽게 안을 헤집고, 바르르 떨리는 재희의 혀를 감아 빨아 당긴다. 달뜬 호흡도 느릿하게 집어삼키며 뿌리까지 섬세하게 감아올린다.
재희는 끙끙거리며 의자 가죽을 움켜쥐었다. 입 안을 느릿하게 유영하는 혀가 축축하고 뜨겁다. 차라리 난폭하게 절 밀어붙이면 그것을 핑계 삼아 그를 끌어안기라도 할 텐데.
재희의 호흡이 더욱 가빠졌다. 강주는 끙끙거리는 재희의 타액을 모조리 삼키고 젖은 입술을 핥으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엉긴 혀가 축축하게 마찰하며 떨어졌다.
“하아, 하아…….”
떨어진 틈 사이로 신음 섞인 재희의 숨이 어그러졌다. 이런 짧은 키스만으로 사람을 달아오르게 하는 그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느릿해서 안달 나고, 빨리 떨어져 안타까운 입맞춤이었다.
둘의 열기로 차창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 강주의 손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더운 치마 안을 들추어 스타킹을 어루만진다. 뜨겁게 달아오른 살갗이 그의 손 아래 문질러졌다.
재희는 허벅지를 움츠리며 떨었다. 얇디얇은 천 사이를 두고 그의 손길을 느끼자 찌릿한 전류가 발을 타고 흘렀다. 뜨거운 손이 절 어루만질 때마다 만져지지도 않은 은밀한 곳까지 움찔거렸다.
강주가 그녀의 귓불을 약하게 물었다. 재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다행이네요. 두 번째 키스엔 스타킹 찢어 먹지 않아서.”
매듭 하나 없이 부드럽게 펼쳐진 스타킹을 매만지는 강주의 입꼬리에, 시니컬한 미소가 천천히 번졌다.
***
쏴아아.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이 뜨거웠다. 좁은 욕실을 뜨거운 수증기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재희는 스펀지로 허벅지를 문지르다 말고 손을 멈췄다. 그의 손이 닿았던 곳이라 생각하니 절로 숨이 가빠졌다.
‘그만 생각해야 하는데.’
붉어진 뺨을 착착 두드리다가 눈을 감았다. 어지러웠다. 그게 몽롱하게 피어오르는 수증기 때문인지, 제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회상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쉼 없이 쏟아지는 물소리가 귓가를 때렸지만 생각나는 건 단지 하나였다. 아까의 기억.
차라리 그 순간 그가 제 스타킹을 찢어 주기를 바랐다. 부드럽게 감은 손에 힘을 줘 절 움켜쥔 채 마구잡이로 키스해 주기를 원했다. 감질나는 접촉에 절로 애가 탔었다.
“나 정말 미쳤나 봐…….”
자조적인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아래가 젖어 드는 감각에 손을 다리 사이에 넣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그를 애써 지워 내며, 흥분의 흔적 역시 천천히 씻어 내기 시작했다.
손끝에 미끈거림이 느껴졌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입술을 깨물고, 아래 진득하게 고여 있는 애액을 물에 흘려보냈다. 부끄러웠다. 고작 키스에, 손길에, 이렇게 야하게.
무릇 지금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던 차 안에서도. 아찔하고 오싹한 욕망이 절 마구 들쑤셨었다. 팬티가 축축하게 젖었었다. 은밀한 속이 간지러워 초조할 지경이었다.
내가 이렇게 야했나. 그동안 남자와 키스는커녕 손도 한번 안 잡아 봤는데, 속에 어떻게 이런 부끄러운 내가 있을 수가 있어. 어떻게.
야한 몸이 혼란스러웠다. 제 충동과 흥분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그만 마주하면 자꾸 무너지는 제가 있었다. 철옹성같이 단단한 자신을 녹이고, 미숙한 몸을 부드럽게 함락시켰다.
차강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난 아직도 그에게 휘둘리고 있는 거야. 마치, 예전처럼.
재희는 울 것 같은 얼굴로 휘청거렸다. 다리 사이로 끈적한 잔상이 뜨겁게 타고 흘렀다.
4장. 알 수 없는
탁. 탁. 재희는 진지한 얼굴로 서류를 호치키스로 찍었다. 총 여덟 부. 조금 후에 있을 목요일 정기 마케팅 회의에 돌리기 위한 봄맞이 이벤트 제안서였다.
서류 숫자를 다시 한번 세어 본 후 팔을 쭉 늘였다. 나른히 기지개를 켜며 떠올린다. 조금 후에 있을 회의. 김 과장이 한 번은 트집을 잡겠지. 그리고 그 김 과장은 요새 TF 팀 일로 바쁘다. TF 팀을 소집한 건 차강주 상무.
픽, 웃음이 나왔다.
“어이가 없네.”
무슨 생각을 해도 강주에게 귀결되는 머릿속이 어처구니없었다.
온종일 의아했다.
도대체 왜.
왜?
왜 그런 행동을?
단순한 호감, 좋아하는 감정이라 생각할 수는 없었다. 차강주는 예전에도,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다. 모호한 속내는 비밀스럽게만 느껴졌다.
그와의 키스는 항상 이렇게 충동적이었다.
어렸을 때, 그와 했던 첫 키스도 그랬다. 그 키스 후, 날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가차 없이 내치고는 해외로 떠나 버렸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단단히 벽을 둘렀었지.
호텔에서 했던 두 번째 키스 이후에도, 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어제 했던 세 번째 키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어제는 두 번째 키스라고 했을까.’
문득 불필요한 의문이 들었다. 그가 말하지 않았나. 두 번째 키스엔 스타킹이 찢어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세 번째인데. 많지도 않다. 딱 세 번. 그 세 번의 키스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만큼, 자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나 보다.
그의 곁에 여자들이 많으리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러니 이런 입맞춤쯤이야 가볍게 넘길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아닌데, 난 당신과 다른데. 당신에게는 가벼울 스킨십이, 내게는 너무 무겁게만 느껴지는데.
왠지 오기가 들었다.
내 마음 다 알면서, 다 알았으면서. 다가오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멀어지고, 먼저 다가서려 하면 냉정하게 잘라 버린다. 늘 사람을 안달 나게 하고, 간절하게 만드는 괘씸한 사람.
‘고민해 뭐 해.’
재희는 고개를 내젓고는 그를 머릿속에서 털어 냈다. 홀로 끙끙 앓는다고 하여 달라질 게 없지 않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회의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커피라도 한잔할 생각이었다. 카디건을 들고 나서는데 김 과장이 뒤에서 불러 왔다.
“윤 주임.”
“네.”
재희가 뒤를 돌았다. 늘, 어이, 혹은 야, 라고 부르던 사람이 웬 윤 주임? 김 과장이 재희 자리에 서서 준비한 회의 자료를 살피고 있었다.
“이따 이거 회의에 발표하려고?”
“네.”
팔락팔락. 김 과장은 재희의 서류를 넘기며 무어가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또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일전에 그에게 초기 줄기를 말했더니 고리타분하다며 공격당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우선 회의에 올려 보고 다른 기획안들과 비교하기로 할 참이었다.
“이거 우선 이번 회의에 빼.”
“그러면 저는 회의에 뭐 들고 가요?”
“네 거는 내 선에서 잘랐다고 할게. 임 대리랑 유 사원 거도 있잖아. 아니면 우리가 머리 싸매서 새로 만들면 되는 거고.”
재희는 잠시 고민했다. 김 과장이 저렇게까지 나오는 이상, 이 기획안이 통과될 일은 없다. 정 팀장과 작당해서 무조건 밟아 놓을 테니까.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네, 알겠습니다. 전 발 뺄게요. 이제 아이디어도 없어요.”
“그래.”
어차피 기획안 탈락이야 늘 있는 일 아닌가. 진행된 후에 파기되는 것보다야 초기에 고꾸라지는 게 오히려 낫다.
김 과장은 자신이 파쇄기에 가는 김에 처리해 준다며 서류를 들고 뒤돌았다. 그거 이면지로 쓰려고 했는데, 하고 재희는 입을 벙긋거렸지만 그는 이미 바람같이 사라진 뒤였다.
잠시 후. 김 과장은 재희의 이벤트 기획안을 들고 정 팀장과 머리를 맞댔다.
“이거 우선 재희 걔한테 폐기하라고 했거든요. 차 상무가 장기적으로 브랜드 이미지 올리는 쪽으로 가자고 했으니까 이거부터 차근차근 시작하자고 제안하면 될 것 같아요, 팀장님.”
“그래, 생수로 시작해서 하나하나 단계 밟아 가며 브랜드 이미지화. 그렇게 밀자고.”
“네네.”
정 팀장은 히죽 웃는 김 과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TF 팀 회의안에 내놓을 자료를 구해 온 김 과장이 이뻐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재희에게서 빼앗아 왔든, 땅에서 주워 왔든 알 바 아니었다.
***
정 팀장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중앙에 섰다. 생수병 샘플을 들어 여기저기 보여 준다.
“이전 회의 이후에 바이럴로 이어질 수 있는 소재를 제가 열심히 생각해 보았는데요, 생수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브랜드 이미지를 잡아 올리면 어떨까, 하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6층 회의실 안. 저번에 소집되었던 TF 팀 1차 회의 이후 2차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저번 회의의 결론은 간단했다. SNS나 팸플릿 등을 이용한 BTL 마케팅을 중심으로 프로모션을 꾸리고, 다음 회의에 각자 아이디어 하나씩을 가져오자는 것이었다. 헬스 케어 제품과 연계하여 걸 수 있는 소재를 고려하여.
정 팀장이 생수병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파스텔 색상의 이벤트용 커버를 씌운 생수병 샘플이었다.
“봄이고 운동 많이 하니까, 헬스장 선별해서 무료로 생수를 제공하는 겁니다. 유명한 SNS 스타 애들이 해시태그 달게 유도하는 거예요. 헬시한 이미지 살리게.”
정 팀장이 생수병을 제 얼굴 곁에 갖다 붙이며 이어 말했다.
“요새는 이쁘고 힙한 게 다예요. 보세요. 디자인하고, 색상. 예쁘죠? 사진 잘 나오겠죠? 여기에 있어 보이는 문구도 넣는 거죠. 봄, 꽃 피우다. 뭐 이런 거. 몇몇 SNS 스타 포섭하고요.”
털이 숭숭 난 손으로 생수병을 내린 정 팀장이 씩 웃었다.
주위를 쭉 둘러보니 다들 표정이 좋았다. 이 안건, 아무래도 먹힐 것 같다. 차강주 상무가 머리로 있는 프로젝트에서 주요 의견을 낸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차근차근 추가 설명을 곁들여 요리해 볼 차례였다.
그때, 정 팀장의 미소를 마주한 강주가 입을 열었다.
턱을 괸 채, 정 팀장을 향해 무신경하게 묻는다.
“그런데 정 팀장님, 그거 정 팀장님 아이디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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