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 시각. 재희 역시 영업 1팀 한 과장과 미팅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김 과장이 TF 팀으로 넘어가느라 이관한 바로 그 미팅.
“안녕하세요, 한 과장님. 윤재희 주임입니다.”
손을 내밀자 영업 팀 한 과장은 마지못해 그녀의 손을 잡았다. 툴툴거리기 직전의 입 모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았다.
당연했다. 본인과 미팅이 잡혔던 상대는 김 과장이었는데 갑자기 주임이 나오니 황당했겠지. 어쩌면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불쾌함이 치밀 수도 있다.
이번 미팅이 순탄치는 않으리라 재희는 대번 파악했다. 하지만 이내 싱긋 웃었다. 절 보고 눈썹부터 찌푸리는 사람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김 과장과 정 팀장에게 무수히 받았던 눈길 아닌가. 이제 이골이 난 일.
“김 과장에게 한 과장님의 요청 사항은 모두 전달받아 완벽히 파악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과장님 바쁘실 테니 본론부터 들어갈까요?”
재희는 김 과장이 건넸던 노란 파일철을 펴며 업무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한 과장은 재희가 입을 열자마자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딱 기댔다.
방어적인 태도. 어디 한번 이야기해 보라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시험대라고 할까.
미팅이라기보다는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기분으로 재희가 또박또박 말을 잇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저 한 과장의 팔짱을 풀어야 제대로 된 미팅이 시작될 터.
“한 과장님께서 말씀하셨던 B2B 시장 공략 돌파 건에 대해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요. 여기 그래프를 보시면……. 보세요. 배달 앱 시장이 매우 커졌죠?”
재희의 단정한 손끝이 그래프를 짚었다. 한 과장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고개만 슬쩍 내려 그래프를 확인했다. 재희가 눈으로 그의 표정을 확인한 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영향으로 우리 선강 영업이익도 이렇게 점점 증가하고 있어요. 여기 그래프 보세요. 네, 여기.”
“…그러네.”
“이건 작년에 영업 1팀에서 발표했던 예상 실적 그래프인데요, 자, 여기 이렇게 비교해 보시면 작년 초 영업 팀에서 전망했던 컨센서스를 매우 상회하고 있어요.”
재희는 거기까지 말한 후, 한 과장을 향해 호들갑 떨듯 손뼉을 쳤다.
“연초에 터졌던 성과급이 다 영업 팀의 노력 덕인데, 이 자리를 빌려 다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 다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저희 선강 제품 중 특히 탄산 쪽이 B2B 쪽에서 청랑에게 위협받고 있으니 무어라도 같이 해 보자고 하셨잖아요?”
재희의 아부 같지 않은 아부에 한 과장의 표정이 슬쩍 풀렸다. 적당히 띄워 주고 알아주는 반응이 그리 싫지 않은 모양이다. 좋아, 팔짱 풀리고 있어. 재희의 눈이 반짝 빛났다. 슬쩍 상체를 내린 그를 향해 재희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이번 영업 팀 공략 목표를 배달 쪽으로 돌리는 거죠. 여기 보시면, 이 배달 앱 캐릭터 엄청 귀엽죠? 이 캐릭터랑 선강 제품을 콜라보로……. 기업 차원에서 이벤트로 지원해서…….”
팔락팔락. 몇 장에 달하는 종이를 넘겨 가며 재희가 나긋나긋 이야기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의자에 붙어 있던 한 과장의 등은 어느새 책상 앞으로 쭉 나왔다. 매듭처럼 단단하게 얽혀 있던 팔짱은 풀어 헤쳐져 펜을 꽉 쥔 지 오래였다.
잠시 후, 한 과장은 어느새 제 치킨 취향까지 늘어놓으며 재희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완벽한 무장 해제였다. 그러다 아차차 하고는 펜을 다시 불끈 쥐었다.
“…그러니까, 치킨이랑 햄버거, 이런 게 또 엄청 나간단 말이야. 그러면 탄산 소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윤 주임 말대로, 나도 이런 쪽에서 돌파구를 찾기 원했어. 말이 좀 통하네!”
“아니면, 제가 상품 기획 팀하고 회의해서 아예 초기부터 그쪽 공략으로 방향을 잡아 보는 건 어떨까 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도 괜찮지. 내가 처음에는 상품 기획 팀한테 얘기하려고 했는데 너무 일이 커지는 것 같더라 이거지. 솔직히 나도 그건 귀찮거든. 여기저기 발 뻗어 봤자 나한테 뭐 떨어지는 것도 없고.”
“그럼요, 한 과장님은 영업으로 빵빵 터트리셔야 하는 바쁜 몸이신데요. 서포트는 제가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가슴팍을 팍팍 두드리며 하는 재희의 장난스러운 말에 한 과장이 허허 웃었다.
생각보다 미팅이 흡족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김 과장 그놈은 매일 말만 빙빙 돌리고 질질 끌어서 영 탐탁잖았는데, 대타로 온 윤 주임이라는 애는 싹싹하니 말이 참 잘 통했다.
처음에 재희가 나타났을 땐, 하다 하다 폭탄 돌리기 취급인가 싶어 부아가 치밀었다만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이야.
‘윤 주임? 걔 싹싹하고 빠릿빠릿해서 일 잘한다고 소문났어요. 대신 뻗댈 땐 되게 뻗대서 상사랑은 사이가 안 좋다던데?’
윤재희 주임. 암암리에 돌던 그녀의 소문이 딱 맞았다. 한 과장은,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무리 짓자며 파일철을 야무지게 정리하는 재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회의에도 윤 주임이 나오는 거지? 김 과장 그 새낀 됐다고 그래.”
***
재희는 서류철을 바리바리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김 과장에게 갑자기 일을 넘겨받은 탓에 기존 업무가 밀렸다. 기한을 맞추려면 빠듯한 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돌아 나왔다. 로비 밖은 이미 어둠이었다. 봄은 언제 오려나. 발목에 감기는 찬 기운을 떨치며 씩씩하게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이제 갑니까.”
익숙한 저음에 깜짝 놀라 옆을 올려 보았다. 지나가던 사원 하나가 그를 향해 꾸벅 목 인사를 건네고 지나간다.
차강주 상무였다.
“네, 상무님도 이제 가시나 봐요.”
재희가 파일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그가 사내에서 이렇게 말을 건 적은 없었기에 퍽 의아했다. 게다가 차는 주차장에 있을 텐데 로비엔 어쩐 일인지.
“업무가 많은가 봐요.”
강주가 담담히 물었다. 그의 시선이 재희의 파일에 꽂혔다. 재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상무에게 업무가 많다며 다이렉트로 징징대는 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상무님께서 소집한 TF 팀 때문에 김 과장 일이 넘어와서 그래요, 그런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아뇨, 많지 않습니다. 이건 뭐 어쩌다 보니.”
“김 과장이 넘겼어요?”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가 물었다.
“네?”
덜컥 놀란 재희가 파일을 꽉 쥐었다. 혹여 제가 속에 있는 말을 꺼낸 건가 싶을 정도였다. 재희의 반응을 본 강주가 픽 웃었다.
“재희 씨도 참 거짓말을 못하네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예전.
그 단어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늘 그랬다. 그와의 과거 일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릿해 입을 열기가 힘들다.
어느새 로비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밖을 향해 나가는 그녀 뒤로, 강주의 무거운 저음이 따라붙었다.
“가지 말아요.”
그 소리에 재희의 멈칫 뒤를 돌았다. 반 발짝 뒤에 그가 있었다. 가지 말라니. 강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태워 줄게요.”
아, 그 말이구나. 재희는 그제야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좋아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가 쉽지 않다. 이전에 그의 차에 탄 적이 있지만, 그건 버스가 없던 요양 병원에 다녀오느라 그랬던 건데. 여기는 사내이고, 저분은 상무시고, 나는 직원이고.
그를 향한 마음을 평생 숨겨만 왔던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괜히 혼자 찔렸다. 늘 가까이 있다 보면 흔들리는 제 마음을 드러낼 것 같다. 마치, ‘예전’처럼. 그래서는 안 되는데.
재희는 멍하니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바깥은 춥고, 새까맣고, 어두웠으니까. 이상한 핑계였지만, 그래도 그의 제안을 거부하기 싫었다.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조명으로 반짝거리는 서울 거리를, 차가 물살처럼 가로질렀다. 재희는 강주를 향해 말을 걸어 보려다가 포기했다. 차가운 옆얼굴이 새삼 멀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개 숙여 제 파일만 내려다보았다.
이번 봄맞이 이벤트는 생수 위주로 하자. 생명을 터뜨리는 봄에, 생기 있게 에너지를 충전시켜 주는 수분. 이런 주제를 관통하게……. 이미지 색상은 파스텔 톤으로 파릇파릇. 연두색 새싹과 분홍 벚꽃. 이벤트 장소로 헬스장도 좋을 것 같네. 춥지만 한강 쪽도 괜찮을 것 같고.
홀로 중얼거리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고요해진 뒤였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큰길가 뒤, 자그마한 골목 끄트머리에 차가 멈춰 있었다.
“벌써 다 왔나요? 잠깐 파일 본다는 게. 감사합니다. 혹시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잠깐 본다는 걸 집중하느라 계속 봤다. 마치 택시 탄 것처럼. 이 무슨 무례인가. 주섬주섬 파일을 정리하자 운전대에 팔을 걸친 강주가 느른히 재희를 주시했다.
“괜찮아요, 우리 회사 사람이 열심히 일한다는데 싫어할 상무가 어디 있겠어요.”
“아, 네.”
“난 늘 재희 씨에게 차강주 상무일 뿐인데.”
“…….”
재희는 답을 쉬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재희 씨가 기획하는 그 이벤트.”
강주는 재희가 들여다보던 파일에 시선을 두며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멈췄다. 사적으로 업무 이야기를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 얘기는 알아보고 다음에 해 줄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 뒤로는 침묵이 이어졌다. 재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괜히 가방만 만지작거렸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안녕히 가세요, 하고 그냥 나가면 되는 건가. 어려운 산수 문제를 들여다보며 고민하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가방의 조그마한 태슬도 만지작, 차갑게 식은 금속 지퍼도 만지작. 주저하는 그녀의 손짓을 보던 그가 옅게 웃었다.
“왜요, 또 돈 준다는 소리 하려고?”
“네?”
재희가 화들짝 손을 가방에서 뗐다. 제 몸짓이 그렇게 보였던 걸까.
“재희 씨는 내게 갚지 못해 안달 난 사람 아니에요.”
“그건 죄송하고, 감사해서.”
그에게 마냥 받을 수만은 없는 건, 늘 그의 앞에서 딱딱하게 얼굴이 굳고 몸짓이 어색해지는 건. 어쩌면 그건, 제 속에 몰래 눌러 놓은 연모의 마음 때문은 아닐까. 삭이지 못한 감정이 부끄러워서. 들켜서 안 될 마음을 들키기 무서워서.
흔들리는 그녀 눈동자를 좇던 그가 상체를 숙여 왔다. 어둑한 차 안에 그의 향기가 가까워졌다. 은은하게 스며드는 향수 내음.
그의 눈빛은 늘 절 맨몸으로 발가벗기는 것처럼 예리하게 느껴져 숨이 가빠진다.
“죄송하고 감사하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보상해요.”
귓가에 나른한 목소리가 감겼다. 재희는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홀린 듯 응시했다.
“상무님께서 원하는 방식이 뭔데요?”
그의 눈동자 안에 희미한 가로등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 흐릿한 빛이 불꽃이 되어 너울거린다. 멍하니 그를 마주했다. 섬세한 콧대와 부드러운 입술 선.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부드럽고 촉촉했던 감촉이 떠올라 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키스해요. 재희 씨가 내게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