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96)

 #12

 세상에 좋은 이별이란 게 있을까. 헤어질 거라면 단호하게 선을 긋는 게 차라리 낫다. 그간 민철이 절 불쌍한 사람 취급했어도, 어쭙잖게 동정하며 내심 속으로 무시했어도 모른 척 넘겼다. 효정이를 살려 준 고마운 은인이니까.

 하지만 이제 끝이다. 그간 쌓은 우정도, 그에게 가졌던 남모를 채무감도 정말 끝이었다.

 민철이 따라올까 봐 다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탁탁탁 뛰듯이 걷는 발소리가 좁은 골목에 가지런히 울렸다. 겨울이라 그런 걸까. 왠지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어깨를 움츠리고 걷다가, 누군가 손목을 붙들어 깜짝 놀라 내쳤다.

“꺅!”

“언니! 왜 그래?”

 효정이었다. 골목 아래 편의점을 다녀왔는지 손목에 낀 비닐봉지가 달랑거렸다.

“아니, 아니야. 갑자기 놀라서.”

“무슨 생각을 하기에 내가 부르는데 듣지도 못하고 막 걸어가?”

“우리 예쁜 효정이 생각.”

“아, 뭐야…….”

 부끄러운지 툴툴거리면서도 효정은 벙긋 웃었다. 재희는 효정의 손을 꼭 잡았다. 찬 바람을 맞아 그런지 효정의 메마른 손끝이 서늘했다. 집에 가서 핸드크림 발라 줘야지.

 손을 맞잡은 둘이 어깨를 나란히 대고 걷기 시작했다.

“아래 보니까 민철이 오빠 있더라?”

“응, 알아.”

“표정 장난 아니던데? 막 욕하면서 가로등 발로 차고 있기에 인사도 못 하고 그냥 왔어. 혹시 싸웠어?”

“뭐……. 그냥.”

 널 구해 줬던 은인을, 내가 찼어. 그냥 잘라 내 버렸어. 그리 말하기 힘들어 재희는 말끝만 흐렸다. 자신이 꼭 은혜도 모르는 후안무치처럼 느껴졌다.

 효정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싸우면 싸운 거지 왜 가로등은 발로 차고 난리야? 욕까지 하고. 민철 오빠, 아니 그 사람 참 별로다.”

“…….”

“나중에 언니한테 막 해코지하는 거 아니야? 그럼 내가 가만 안 둬. 언니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내가 아주 막 그냥……!”

 픽 웃은 재희가 효정의 손을 꾹꾹 눌렀다.

“난 그래도 넌 그러지 마. 그래도 고마운 사람이니까.”

“고맙긴 뭐가 고마워.”

“있어, 그런 게. 그냥 저러다 포기하게 내버려 둬.”

 둘은 이내 솔을 꼭 맞잡고 좁은 골목길을 걸어갔다. 목덜미에 닿는 바람은 차가운데 맞잡은 손이 점점 따뜻해져 춥지 않았다.

 ***

“오후에 영업 팀 한 과장이랑 미팅 잡은 거, 네가 가라.”

“그거 과장님께서 단독 진행한다고 하셨잖아요.”

 재희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김 과장이 현재 진행 중인 제 업무를 맡으라며 다짜고짜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 미팅, 업무 공유도 해 주지 않아 무슨 프로젝트인지조차 제대로 모르는데.

 김 과장은 제 파일을 재희에게 억지로 쥐여 주었다.

“지금 나랑 정 팀장님이 맡은 일이 더 중요하잖아. 영업 팀 건은 네가 맡아, 이제.”

“…….”

“정 팀장님도 전적으로 널 믿는다고 하셨어. 무슨 뜻인지 알지?”

 정 팀장 명령이니 아랫사람인 넌 그냥 따라라. 뭐, 그런 뜻이었다. 재희는 노란색 파일철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꼬리를 굳혀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별수 있나. 하라면 해야지. 팀장님과 과장님이 하라고 하시는데. 실수 없이 철두철미하게 해서 꼬투리 잡히지 말아야지.

 하루 전, 차강주 전략 기획 조정실 상무 주도하에 TF 팀이 꾸려진다는 공고가 내려왔다.

 선강 그룹의 계열사인 선강 음료, 선강 주류는 업계 점유율 부동의 1위였다. 하지만 최근 경쟁사가 공격적인 마케팅을 기반으로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그 추이를 업계 모두가 지켜보는 바였다.

 때문에, 음료와 주류 쪽 영업 팀, 기획 팀, 마케팅 팀, 홍보 팀에서 인원을 각출하여 방어 TF 팀을 꾸리도록 했는데, 재희가 속한 마케팅 팀에서는 정 팀장과 김 과장이 차출됐다.

 그리하여 이렇게 업무가 아무런 예고 없이 밀려오게 된 것이다.

“그럼 부탁할게. 4시 미팅이야. 알았지?”

 이럴 때만 능글대며 실실 웃는 김 과장의 얼굴이 얄밉다.

“네, 알겠어요.”

 재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 과장의 파일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데이터 그래프와 유통업체 관련 자료가 나열돼 있었다.

 한참이나 정리하던 재희가 피곤한 눈꺼풀을 꾹꾹 누르며 파일을 덮었다. 그리고 자신이 본래 진행하고 있던 녹색 파일을 펼쳤다.

 커버를 넘기자 생수를 중심으로 기획했던 프로모션 자료가 팔락팔락 지나갔다.

“이건 집에 가서 해야지.”

 재희는 말끔한 얼굴로 파일 커버를 덮었다. 기왕 하게 된 것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이참에 영업 1팀 한 과장님과 친분도 좀 쌓아 놓으면 좋고.

 ***

 선강 그룹 본사 6층. 카페테리아 옆 회의실에 여럿이 모여 있다. 단기 프로젝트를 위한 TF 팀으로, 주로 음료와 주류 쪽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들이었다.

 강주가 하얀 스크린을 가리켰다. 모두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응시했다. 경쟁사 청랑 코리아의 빨간 마크가 띄워진 화면이 보였다.

“여기 모이신 이유는 이미 아시죠? 모두 바쁜 분들이시니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전 전략 기획 조정실 상무 차강주입니다. 반갑습니다.”

 절 향해 고개인사를 하는 팀원들을 향해 강주가 이어 말했다.

“여러분 인적 사항은 제가 이미 알고 있으니 자기소개 시간은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본론부터 들어가죠.”

“네!”

 다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회의실 책상은 깨끗했다. 불필요한 서류도, 급히 끼워 만든 프레젠테이션 발표도 없었다.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강주다운 진행이었다.

“우리 선강 음료와 주류 대다수 제품이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최근 청랑 코리아가 무섭게 추격하고 있어요.”

 프레젠테이션 화면이 바뀌었다. 최근 유통업계 조사업체에게 받은 점유율 추이 도표가 나왔다.

“청랑이 치고 올라오는 이상, 우리도 뭔가를 해야겠죠. 그래서 여러분이 모인 겁니다.”

 강주 주도하에 결성된 TF 팀이지만 사실 보여 주기에 가까운 프로젝트였다. 차 회장이 강주를 직접 불러 했던 말 한 마디에 결성된.

 차 회장은 곱게 철된 뉴스 기사 지면을 강주에게 내밀며 말했었다.

‘강주야, 댐이 무너지는 건 작은 벽돌 조각 때문이다. 음료 쪽에서 청랑이 치고 오니 네가 뭐라도 해 봐.’

 강주가 맡은 외식, 유통, 커피 프랜차이즈 사업 중 음료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선강 그룹 전체 사업을 보아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차 회장이 직접 무어라도 하라니 할 수밖에.

 차 회장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호시탐탐 시험대에 올려 절 갉아먹으려 했다. 그 웃는 얼굴을 마주하노라면 늘 기분이 깔끔하지 않다.

 강주가 판을 깔자 팀원들이 그제야 의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청랑 음료가 추격하는 제품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게 낫겠죠?”

“제 생각도 그래요. 지금 그쪽이 과일 음료 중심으로 SNS 이벤트를 하고 있거든요. 복숭아 인간, 포도 인간 선발 대회 진행하면서요.”

“네, 저도 봤어요. 유명한 개그맨이 분장한 사진 SNS에 올린 거.”

 상품 기획 팀 유 대리가 으, 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맨 앞쪽에 있던 전략 영업 팀 김 팀장이 목을 문지르며 말을 끼웠다.

“이상한 이벤트 그거 다 쓸데없어. 머니로 가자고. 지금 청랑에서 2+1 이벤트 하니까 우린 1+1 해서. 양손에 선강! 이런 이벤트 열어서 양손에 음료수 두 개 들고 SNS에 올려 해시태그 걸면 경품 주고, 그런 거.”

“1+1 이벤트는 10년 전 이후로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가격 후려치는 건 이미지에 타격이 있으니까, 색다른 이벤트 중심으로 가죠.”

“할인 때리는 게 최고야. 1+1이 제일이라고.”

 영업 팀 김 팀장이 등을 의자에 기댔다. 이런 회의를 하는 것조차 지루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B2B 영업 바닥에서 굵직하게 뼈가 굵은 능력자였는데, 선강이 경쟁사의 추격을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은 뻔하다고 생각하는 바였다. 싼 가격으로 물량 공세. 색다르게 보일 이벤트를 대충 늘어놓고. 그거면 끝이었다. 이런 TF 팀을 만들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듣고만 있던 강주가 그를 불렀다.

“주류 전략 영업 2팀 김 팀장님이시죠?”

“아, 예, 상무님.”

“좋은 의견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벤트 판매가 내리는 건 지금 제가 전화 한 통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니, 우선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죠. 그 방법은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있어요.”

“아……. 네.”

 머쓱한 표정으로 김 팀장이 턱을 긁었다.

“단순하게, 매출 향상을 위한 단기성 이벤트 말고, 기존 저희 인지도를 유지하고 고객의 충성도를 높이는 쪽으로 장기 프로젝트 진행합시다.”

 김 팀장이 몇 올 남지 않은 머리를 넘기며 은근슬쩍 물었다.

“혹시 매출 빨리 못 올리면 저희 실적에 영향 있는 건 아니겠죠?”

“일 던져 주고 몸 뺄 생각 없습니다. 제가 주도한 일이니 타인에게 책임 전가할 생각도 없고. 걱정은 뒤로하고 우선 진행하세요.”

 강주가 딱 잘라 노선을 정해 주자, 그제야 김 팀장이 허허 웃었다.

“혹시 생각해 놓으신 건 있으십니까?”

“솔직히 딱히 없습니다. 하지만 큰 줄기를 말해 보자면, 요새 청랑 쪽에서 키치한 이미지를 추구하며 마케팅을 짜고 있으니 우리도 그쪽으로 가도록 하죠. 방어 차원으로.”

“아, 네.”

“아시다시피 ATL 쪽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45일 안으로 초기 프로모션 짜서 오픈합시다.”

 다들 노트에 ‘45일’이라는 글자를 적어 동그라미를 슥슥 그렸다. 시간이 촉박하지만 차 상무가 있으니 뭐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하고.

 강주가 그들의 손놀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소비자가 소셜 쪽에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바이럴로 연결할 수 있는 소재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번에 헬스 케어 제품도 런칭했으니, 그쪽과 연계해서 진행할 수 있는 쪽이면 더 좋겠습니다.”

“네! 이벤트 타깃층도 그쪽으로 맞춰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팀원들이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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