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번에 지중해 근처에서 우연히 유선이 만났거든. 너도 알지? 정 회장님 조카.”
“네.”
“걔가 아주 예뻐. 늘씬늘씬 키도 크고. 널 잘 알더라니까?”
강주의 모친 유영현이 소녀같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딱 자른 단발에 큰 키, 시원시원한 몸매, 깊고 날카로운 눈매와 살짝 각진 턱에서 그녀 특유의 당당한 매력이 물씬 풍겼다.
영현이 이탈리아에 기거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게 바로 어제였다. 그녀가 여독을 풀자마자 곧바로 강주를 본가로 불렀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만난 아들을 붙들고 부용 그룹 계열사 사장 딸인 정유선을 입이 마르게 칭찬하는 중이었다.
시은은, 강주를 힐끗 훔쳐봤다. 딱 봐도 엄마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표정이다.
“엄마, 오래간만에 와서 웬 압박이야? 오빠 아직 멀었어.”
“얘는, 뭐 엄마가 만나라고 억지로 들이밀었니? 그냥 그렇다는 거지. 애가 참 착하고 예쁘니까. 우리 강주는 여자 친구 한 번을 안 데려오니까……. 내가 좀 그런 재미는 없어. 그치?”
“오빠 좋다는 사람 많아. 뭘 걱정해.”
“충현이는 스물넷에 장가가서 벌써 애가 셋이야. 일찍 결혼한 애도 많아, 얘.”
잠자코 듣고 있던 차 회장이 티브이를 끄며 제 부인의 말에 동조했다.
“걱정해야지. 가정을 꾸려야 가족 소중한 걸 알고.”
가족 소중한 걸 알고. 그 말에 강주의 입가에 얼핏 조소가 어렸다가 지워졌다. 강주는 잠자코 절 둘러싼 얘기를 듣고만 있다가 뒤늦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야죠.”
“저번에 권 실장 통해서 사진 보냈던 건 다 봤냐. 다들 참하고 예쁜 애들이야.”
“네, 봤습니다.”
“어떻더냐.”
차 회장의 물음에 강주의 답이 담담하게 바로 나왔다.
“별생각 없습니다.”
“사진으로만 보니 그렇지. 직접 만나서 얼굴 보고, 대화하고 그래야 정도 쌓이고 마음도 가는 거지.”
“예, 회장님.”
미소와 함께 강주가 고개를 한 번 숙였다.
몇 달 전부터 차 회장이 비서를 통해 사진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장관 딸이니, 재단 이사장 딸이니 하는 이들이었다. 권력과 명예에는 가깝고 부에는 조금 먼.
차 회장의 속내가 빤히 보였다. 시은을 어떻게든 위로 끌어올리려면 아무래도 차강주 제 기반이 미진한 것이 나을 테니.
“이 애비는 강주 네가 내로라하는 집안 딸과 억지로 결혼하는 그런 거, 원하지 않는다. 구태의연한 압박도 하지 않을 생각이야.”
“예.”
“그러니 넌 조건 같은 거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라. 내가 보낸 사진도 찬찬히 살펴보고. 내가 네 엄마를 사랑해서 만났듯, 너 역시 사랑으로 가정을 꾸리란 말이야.”
“예.”
단정하게 고개를 끄덕인 강주의 입꼬리에 얼핏 조소가 맺혔다.
제가, 그 여자들을 사랑합니까.
잠시 후, 강주는 피곤하다는 말만 남긴 채 2층 방으로 올라갔다.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자고 가라는 모친 영현의 끈질긴 제안에 결국 백기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간 것이다.
모친 영현은 강주의 빈자리를 응시하며 시은에게 투정 부리듯 말했다.
“쟤는 유독 집을 불편해하더라. 하기야 우리 집 구조가 조금 올드하기는 하지? 이참에 리모델링을 싹 해 볼까? 이번에 뉴포트 비치 쪽에 갔는데 엄청 예쁘더라. 창문도 아치형으로 이렇게.”
영현이 손을 둥글게 휘저으며 아치형 창문을 설명했다. 시은은 그저 웃었다.
“엄마, 여기가 바닷가야? 서울 한복판에 무슨.”
“집이 좀 예뻐지고 그래야 강주가 다시 집에 오지. 저렇게 혼자 나도는 거 보기 싫어서 그래. 자꾸 마음 쓰이고.”
“…마음 쓰이면 한국에 계속 있으면 되잖아. 그럼 오빠도 다시 들어올 줄 누가 알아?”
밝았던 영현의 얼굴에 구름이 드리웠다.
강주. 어떻게 저렇게 생겼는지 보면 볼수록 예쁜 내 아들. 그를 볼 때마다 영현의 마음엔 약간의 미안함과 죄책감이 딸려 나왔다. 누구보다 사랑을 주고 싶으나 강주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제 부끄러움을 민낯으로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오래 보고 있기 힘들었다. 영현이 늘 해외를 맴도는 이유 때문이었다. 선강 그룹 선대 회장 딸로 태어나, 흠 없이 매끄럽게만 살아온 유영현. 그녀 인생에 유일하게 튀어나온 자그마한 압정이 바로 강주였기에.
“시은이 네가 나 대신 오빠 좀 잘 챙겨 줘. 알았지? 혼자 생활하면 외로울 테니까 집에도 좀 들어앉히고. 엄마가 늘 신경 쓰여서 그래.”
“…응.”
눈을 내리깔며 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오빠가 이 집에 들어올 일 없어. 엄마가 오빠를 홀로 뒀을 때부터, 오빠에게 여긴 늘 소리 없는 전쟁터였으니까.
***
재희는 지잉지잉 울리는 휴대 전화를 들었다. 알 수 없는 번호가 떠 있다. 결국 받지 않고 뒤집어 진동을 껐다.
“그러게 그러지 말지.”
드라이기에 머리를 말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번호. 분명 민철일 게 뻔했다. 3년 친구, 반년 좀 넘는 남자 친구였던 민철이. 호텔에서 그렇게 헤어진 뒤, 민철의 전화와 문자 공세가 시작됐다. 번호를 수신 거부하니 이제는 새로운 번호로 연락했다.
‘재희야, 내가 정말 잘못했어. 한 번만 용서해 줘.’
잘못을 빌었다가,
‘너 정말 독하다. 너 진짜 나 안 볼 거야? 애인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그동안 친구로 지내 온 게 얼만데 그 우정까지 다 무시하면서?’
화를 냈다가,
‘내 탓만 있어? 네가 너무 철벽 치니까, 외로워서 잠깐 정신이 나갔던 거야. 윤재희, 네 탓이 없는 건 아니라고.’
그녀를 원망했다. 그러다 다시 애원하며 잘못을 빌었다.
솔직히 말해, 지겨웠다.
그간 민철이가 상처 줄 때마다 넘어가고 포용했었다. 효정이를 도와준 것과, 절 위로해 준 건 아주 고마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부풀어 오른 풍선이 결국 터지듯, 호텔에서 다른 여자와 있으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때 제 인내도 끝났다.
그동안 내가 네게 해 준 게 얼만데, 그리 말하는 민철이가 낯설어 재희는 통장 잔고를 확인하기까지 했었다. 그가 그렇게 억울해한다면, 그동안 얻어먹은 밥값이라도 돌려주기 위해서.
휴대 전화는 곧 진동을 멈췄다. 머리를 다 말린 재희가 부엌으로 가 비닐장갑을 꼈다. 반찬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힐끔 올려다본 반지하 창문 밖이 아직 새파랗다. 주말의 이른 새벽. 그녀는 쌀을 안치고 채소를 씻기 시작했다.
기댈 벽이 되어 준다던 남자 친구가 배신했어도, 크리스마스가 지나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어도, 그리고.
‘상무님과 그런……. 그런 일이 있었어도 할 건 해야지.’
그리고 강주와 소파 위를 뒹굴었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잠시 후, 반찬을 들고 나선 재희는 오래지 않아 강주의 집 앞에 섰다.
오늘은 집에 있을까.
재희는 현관 지문 인식 창에 쉽사리 손을 올리지 못했다. 항상 거리낌 없이 드나들던 곳인데 그가 있으리라 생각되니 입술이 차가워졌다.
첫 키스도 아닌데, 촌스럽게. 하기야 첫 키스를 고등학생 때 했으니 퍽 오래되기는 했다. 강주와의 키스가 처음인 것처럼 생각될 만큼, 이제는 휘발된 아득한 기억.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서자, 커튼이 환하게 걷힌 거실 창이 그대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쏟아지는 볕 아래 그가 있었다.
“왔어요?”
턱을 괴고 책을 읽으며, 돌아보지도 않고 그가 인사를 건넸다. 재희는 화들짝 놀라 과하게 큰 목소리로 답했다.
“네! 왔습니다!”
“알아요.”
그의 입꼬리가 픽 웃는 게 보였다. 어쩐지 창피했다. 상대는 아무렇지 않은데 혼자 긴장하고 있는 게 속상할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를 흐트러뜨리기 싫어 조심조심 반찬 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조차 숨을 죽였다.
“불고기는 냉동실에 넣을게요. 해동시켜서 드세요.”
그는 해동시키라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주제를 꺼내 왔다.
“반찬 가져오는 거 괜찮아요?”
턱을 괴고 책을 읽으며 쳐다도 보지 않고 남 일 말하듯 툭 묻는다.
“네?”
“귀찮지 않나 싶어서.”
심드렁히 건네는 말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혹시 힘들다고 하면 그만하라고 할 셈인가. 그건 좀 곤란한데. 그가 주는 반찬값 100만 원, 재룟값 70만 원. 그게 오죽 큰돈인가. 덕분에 효정이랑 먹을 식비도 해결되고 여윳돈도 생기는 거라 당장 끊기면 타격이 크다.
“전혀요, 전혀 힘들지 않아요. 혹시 요새 반찬이 입맛에 안 맞나요? 간장을 바꾸기는 했는데……. 다시 예전 거 쓸게요.”
혹여 그가 그만두라고 할까 봐 손까지 휘저었다.
강주는 읽던 책을 뒤집어엎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희는 괜히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가 편하게 걸친 새하얀 티셔츠마저 눈이 부셨다. 저런 사람과 키스했다고 생각하니 괜히 속이 달았다.
“오늘 뭐 해요?”
숙인 머리꼭지 위로 심드렁한 질문이 닿아 왔다. 얼굴을 들자 팔을 나른하게 늘여 스트레칭하는 그가 보였다. 단단하게 도드라지는 팔뚝 근육만 멍하니 응시했다.
재희에게서 답이 나오지 않자, 고개를 기울여 목덜미를 주무르던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이제 내 집에서 나간 후에 남자 친구 만나러 가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네?”
“늘 그랬잖아요. 할 일 끝나면 도망치듯이 빠져나가서.”
나른히 늘였던 팔을 내리며 그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시선을 들어 빤히 응시하는 눈빛이 어쩐지 서늘했다.
저 눈빛. 언젠가 보았던 눈빛이다.
그때. 내 마음 다 알면서 모른 척 외면하고, 단호하게 날 내쳤던.
강주가 냉장고 속 생수병을 꺼내며 가볍게 물었다.
“울었어요?”
“네?”
“그 일 이후에 울었냐고.”
그는 물을 몇 모금 마신 후 반 남은 물을 싱크대에 부어 버리고는 텅 빈 병을 구석에 던졌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재희의 정신이 돌아왔다. 아, 그날 민철과 헤어지고 난 후에 또 울었냐고 묻는 건가 보다.
“전혀요, 안 울었어요.”
억울하고, 분하고, 화가 났으나 눈물은 나지 않았다. 참고 쌓였던 감정을 터뜨려 민철을 내치자, 속이 후련하기까지 했다. 어려울 때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질질 끌려다녔는데 이렇게 끝내 주니 오히려 고마워지기까지 한 것이다.
“울었으면 또 위로해 주려고 했는데 아쉽네요.”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다.
재희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말하는 위로가 무언지 대번 알아차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