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96)

 #08

 한편, 호텔 로비 앞.

 민철과 한나 사이 칼날 같은 말들이 오갔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분노를 참을 수 없는지 민철의 목에 퍼런 핏대가 섰다.

 믿을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재희가, 재희가 방금 절 버려두고 웬 남자와 위로 올라갔다. 몇 년이나 기다려 얻은 제 보물, 아름다운 트로피 윤재희가.

 결혼까지 생각한 사이인데 이까짓 오해로 사이가 어긋났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다 박한나 때문이었다, 저년 때문에!

 박한나는 민철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포기해요.”

“뭐? 포기해?”

“이 오해는 진짜 풀기 힘든 종류잖아요. 크리스마스에 호텔에서 다른 여자랑 만나는데, 누가 용서를 해요. 미쳤다고.”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어 민철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누구 탓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다른 이의 책임이라며 책임 전가하며 이 폭발하는 감정을 쓸어버리고 싶었는데 그러기 힘들어 더욱 부아가 돋는다.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그게 왜 나 때문이에요? 선배가 먼저 만나자고 했잖아요.”

“네가 밀당이니 뭐니 그런 말만 안 했으면, 내가 널 만났겠어? 이런 날에? 너 같은 애 만나느라 재희 혼자 뒀겠냐고!”

 한나의 표정이 상처받은 듯 굳어졌다.

 한나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그를 노려봤다. 너 같은 애라니, 세상에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말이 어디 있는가. 돈 좀 있고 잘생겨서 어떻게든 꼬시려고 했더니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눈꼬리를 뾰족이 세운 둘이 서로를 노려봤다. 한참이나 민철을 노려보던 한나는, 코끝이 달아오르고 눈꼬리에 눈물이 맺히자 그제야 악에 찬 목소리를 냈다.

“그 상무란 사람, 누구인지나 알아요?”

“내가 어떻게 알아? 오늘 처음 봤는데.”

“모르니 다행이네. 포기해요, 선배 그 사람한테 안 돼.”

 민철의 얼굴이 광분으로 가득 찼다.

“그 새끼가 누구건 무슨 상관이야! 갑자기 끼어든 놈이 재희에 대해 뭘 안다고! 재희를 가장 오래 본 것도 나고, 재희 불쌍한 인생 구제해 줄 것도 나야!”

 발을 꽝꽝 굴리며 분노를 토해 내는 민철은 반쯤 미친 사람 같았다. 한나는 그를 피해 한 걸음 물러서며 눈물을 닦았다. 민철이 혼잣말처럼 아득바득 중얼거렸다.

“재희한테는 나밖에 없어, 나밖에 없다고. 걔가 기댈 사람도, 걔를 잘 아는 사람도, 그 가난에서 구해 줄 사람도 나밖에 없어.”

 민철은 다시 재희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덜덜 떨리는 손이 ‘예쁜 재희’를 마구 눌렀다.

 괜찮아. 그 상무인지 뭔지 하는 놈에게 잠시 홀렸대도 괜찮아. 결국, 재희는 내게 돌아올 거니까. 오늘 만난 것도 별거 아닐 거야. 그냥 내가 안 만나 주니까 속상해서……. 밥이나 한 끼 하려고 만나는 게 분명하다고.

 그는 다시 재희에게 미친 듯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물론 재희는 아까부터 휴대 전화를 꺼 놓은 상태였다.

 ***

 강주의 코트가 소파에 툭 걸렸다.

 소파에 등을 대고 앉아 다리를 꼬고 앉은 강주가 재희를 가만히 올려 보았다. 턱을 괸 채 그녀를 살핀다. 재희는 엉거주춤 소파 앞에 서 있는 참이었다.

“시작해요.”

“네?”

“울어 보라고.”

 강주가 아예 판을 깔아 주었다.

“…….”

 재희는 뜨거운 눈 아래만 비볐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추하게 울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스위트룸에 서 있었다.

 재희는 절 빤히 구경하는 강주를 난처하게 응시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턱까지 괴고 우는 걸 기다리다니. 하지만 이마저도 그의 독특한 위로법일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안 슬퍼요? 아까는 잘만 울더니, 왜.”

 재희는 입술을 꼭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눈물 흘리는 대신 직각으로 붙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눈물 다 들어갔어요, 상무님 덕분에.”

 강주는 말없이 티슈를 뽑아 그녀에게 건넸다.

 마스카라가 번진 눈 아래를 꼭꼭 누르며 재희가 티슈 뒤로 웃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오늘의 스위트룸 숙박료는 아마 세상에서 제일 비싼 눈물 비용일 거다.

“남자 친구 많이 좋아했나 봐요.”

 취미를 묻듯 아주 가볍게 그가 물었다. 재희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제 손을 응시하며 생각에 빠졌다.

 좋아했나, 좋아했던가.

 좋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건 확실하다. 제게 힘이 되어 줄, 힘이 되어 줬던, 몇 년이나 쫓아다녔다던 그의 진심에 보답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었다. 그것이 끝내 이성적인 사랑으로 발전되지 않아 입조차 맞추지 못했지만.

 어쩌겠는가. 마음이란 게 움직이고 싶다고 움직여지던 것이던가.

 한참을 고민하고 고민하던 재희가 작게 속삭이듯 고백했다.

“좋아했어요, 많이 좋아했고…….”

 물론 친구로서. 그러나 굳이 그런 설명을 붙일 필요는 없다. 강주의 표정 온도가 서늘히 내려갔다. 재희는 참회하듯 이어 웅얼거렸다.

“제게는 무척 고마웠던 사람이었어요. 말하자면, 은인 같은.”

“…….”

“힘들 때 곁에 있어 줬던 사람이라 기대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배신감이 더욱 크기도 했고.”

 기대고 싶었으나 기대지 못했다. 그에게 받았던 건 상처뿐이었는데, 어째서 부질없는 기대를 붙들어 그를 곁에 뒀었는지.

 고개가 절로 다시 수그러들었다.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막상 울라며 판을 깔아 주었던 아까는 웃더니, 담담히 제 속마음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다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슬픈 건 아니었다. 민철을 향한 원망마저 이제는 사그라졌다. 다만, 제 외로움과 힘겨움을 알아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민철은 제 마음을 알아 준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지금의 눈물은 추한 자기 연민. 사무치는 배신감은 스스로 불러온 고통이라 함이 옳았다.

 속눈썹 끝에 달렸던 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뺨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자 강주가 바로 앞에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제 우는 모습을 잠잠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고요하고도 정적인 눈동자가 마치 절 헤집는 것만 같았다.

 재희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상무님?”

“그거 알아요?”

 하지만 도리어 질문이 돌아왔다. 재희는 눈물로 풀어진 얼굴을 저었다. 그의 입꼬리에 언뜻 미소가 배었다.

“상대가 약할 때 파고드는 거, 정말 치사한 짓이라는 거.”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젖어 들었다. 그녀의 뺨 위로 강주의 손이 닿았다. 크고 단단한 손바닥이 재희의 달아오른 뺨을 쓸고 젖은 눈물을 훔쳤다.

 재희의 목덜미에 오싹오싹 솜털이 돋았다. 불쾌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부감 역시 아니었다. 그가 눈물을 닦아 주고 위로해 줄 뿐인데, 부드러운 손길에 자르르한 전류가 몸을 관통하는 기분이었다.

 숨 막히는 긴장과 간지러운 떨림, 그 중간에 나신으로 던져진 것 같은 느낌이다. 꼭꼭 숨겨 놓은 감정이 그의 앞에서 모조리 발가벗겨지는 기분.

 살며시 다가온 그가 젖은 눈가에 입을 맞췄다.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젖어 든다.

“우는 사람 위로해 준답시고 수작 부리는 거, 정말 야비한 짓이거든.”

 그의 저음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을 녹였다. 재희는 눈을 감았다. 툭 떨어진 눈물을 핥는 혀가 느껴진다. 으슬으슬한 느낌에 어깨를 움츠렸다. 뺨을 타고 느릿하게 내려오는 그의 입술이 믿을 수 없도록 다정했다.

‘아……!’

 알 수 없는 전율로 몸이 떨렸다. 재희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눈물 틈으로 흐릿하게 번지는 강주의 얼굴을 응시하며 고백하듯 읊조렸다.

“저는… 치사하고 야비한 게 좋아요.”

 그의 눈꼬리가 연하게 웃었다.

‘난 독하고 뻔뻔한 사람 좋아해, 재희야.’

 절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던 어린 시절의 그처럼.

 강주가 얼굴을 내려 살며시 입을 맞춰 왔다.

 재희는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입술 위에 닿은 온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정말 그와 입을 맞추고 있는 걸까. 차강주, 그와 내가, 감히.

 긴장으로 입술이 굳었다.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데, 그것이 제게서 피어오르는 열기 때문인지, 강주의 체온 때문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긴장으로 가득한 몸을 휘청이다가 강주의 옷을 바짝 움켜쥐었다. 무어라도 부여잡고, 어디에라도 기대야 살 것 같았으나 그를 끌어안을 수 없었다. 닿을 수 없는, 탐낼 수 없는 보석을 차마 건드리지조차 못하는 것처럼.

 강주는 그녀의 꽉 닫힌 입술 틈을 혀끝으로 문지르며, 재희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달래듯 그녀의 손을 풀어 제 목덜미에 둘렀다.

 재희의 덜덜 떨리는 손이 타의로 그를 끌어안는다. 마주 닿은 두 입술처럼 두 몸도 꼭 포개어졌다.

 강주의 한 손은 그녀의 등을, 다른 손은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마치 뭉개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 부드러운 손길로.

 재희의 팔뚝에 근질거리는 소름이 돋아 왔다. 입술을 느릿하게 빨아 당기며 문지르는 부드러운 감촉에 발끝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나무토막처럼 빳빳했던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강주는 얼굴 각도를 비틀어 혀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으응…….”

 그녀에게서 숨죽인 신음이 흘렀다.

 강주의 혀가 부드럽게 안을 침범했다. 뜨거운 살덩이가 안을 헤집으며 끈적하게 휘젓는다. 재희의 몸이 뒤로 천천히 넘어갔다. 커다란 몸이 주는 묵직함이 묘하게 안락하다.

 살살 달래듯 부드럽게 시작했던 키스가 점점 농밀해졌다. 그녀의 입 안에 모조리 밀어 넣고 가쁘게 유린했다. 그녀를 소파에 눕히며 강주는 제 넥타이를 풀어 뒤로 던졌다.

 재희의 위에 올라타, 그녀의 치마를 들치어 올린 후 다리 사이에 제 무릎을 끼워 넣었다. 그녀의 입술을 격하게 빨아 당기고 혀를 휘감을 때마다 젖은 소리가 야하게 울렸다. 두 숨결이 가쁘게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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