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96)

 #07

 차강주였다.

 강주는 성큼 걸어와 재희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쥔 민철의 손을 떨어뜨렸다. 민철의 손이 떨어지자 재희의 손목에 벌건 자국이 남았다.

“아, 아! 손 좀……!”

 민철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졌다. 제 손목을 감은 강주의 억센 힘이 버거운 까닭이다. 무슨 사람 손아귀 힘이 이렇게 센지.

 강주는 민철의 손을 던지듯 놓고 재희를 향해 손목시계 유리판을 툭툭 두드렸다.

“가죠, 재희 씨. 예약 시간 늦겠어요.”

 재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강주를 응시했다. 가다니, 어디를? 알 수 없이 던져지는 그의 말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날 도와주려는 거로구나.

 자신과 김 과장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눈치로 알아챘던 사람 아닌가. 이번에 우연히 이 상황을 보고,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 모양이다. 눈치도 이런 눈치가 없고,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덕분에 새어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강주가 갑자기 왜 저렇게 구원의 손을 뻗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 기왕에 그가 판을 깔아 준 이상 그 위에서 춤을 추어야겠다. 민철이 무참히 깔아뭉갠 제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회복시킬 그런 춤.

“네, 상무님. 가요.”

 민철이 고개를 휙 돌려 강주를 노려보았다.

 뭐? 상무? 상무님이라고? 재희가 늘 말해 왔던, 주말마다 반찬을 들고 집에 갔던 그 상무님? 설마 진짜? 저렇게 젊은 놈이었어?

 어금니를 꽉 다물고 강주를 해체할 것처럼 훑는다. 깔끔한 옷차림과 매끄러운 피부, 깨끗한 손톱, 섬세하게 빚어진 이목구비까지 모조리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 저놈이 순진한 재희에게 작정하고 덤비는 거지, 지금?

 충격으로 흔들리는 민철의 목소리가 퍼졌다.

“재희야, 가기는 어딜 가. 미팅, 그러니까 업무상 미팅 가는 거지? 그치? 그런 거지?”

 그러나 민철의 바람과 달리, 재희의 답은 모호했다.

“민철아, 상무님하고 휴일에 미팅을 왜 해.”

 그래서 민철은 더 속이 달았다. 그럼 지금 뭐 한다는 뜻인데! 미팅이 아니면 뭔데?

 재희는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가시죠, 상무님. 저 용건 다 끝났어요.”

“그래요.”

 강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멀어지는 둘의 등 뒤로 민철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꽂혔다.

“어디 가! 어디서 뭐 하려고!”

 강주는 민철이 아닌 재희를 향해 고개를 비껴 내렸다.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재희 씨 남자 친구인가요?”

“아뇨, 이제 아니에요.”

 그 답에 민철은 발악하듯 외쳤다.

“내가 재희 남자 친구 맞아! 너 이 자식, 재희 데리고 가서 뭐 하려는 건데!”

 강주는 고개만 돌려 흔들리는 민철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내가 왜 우리가 할 일을 그쪽에게 알려 줘야 하지.”

“뭐?”

“재희 씨가 나와 여기서 식사를 하든, 다른 짓을 하든 이젠 너와 상관없는 일일 텐데.”

 민철의 얼굴이 새파랗게 죽었다. 민철과 한나를 향해 옅은 미소를 남기고, 강주는 멀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재희는 강주에게 허리를 푹 숙였다.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아까 있었던 일과 더불어, 그가 했던 마지막 말 때문에.

 다른 짓을 하다니. ‘우리’가 할 일이라니.

 민철을 효과적으로 엿 먹이기 위한 발언임은 알지만 야릇함이 상상되어 맥박이 세차게 뛰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뭐가 죄송하고, 뭐가 감사한가요?”

 강주가 삐딱하게 물었다. 재희는 붉은 목덜미를 매만졌다. 허리는 아직 약간 구부정했다.

“이런 일에 상무님을 이용해서 죄송하고, 절 그 상황에서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쎄요, 끼어든 건 난데 왜 재희 씨가 사과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심드렁한 그의 답에 재희는 시선을 들었다. 허리도 좀 더 펴졌다.

 엘리베이터 벽에 여유롭기 기대어 선 강주가 재희를 응시했다. 상황이 어색한지 제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하얀 손을, 살짝 왼편으로 기울인 우아한 턱선과 귀를 타고 흐르는 가냘픈 목덜미를.

“…….”

 그가 곧 시선을 돌렸다.

 띵. 곧 묵직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정말로 레스토랑에 도착한 것이다.

 재희의 표정이 다시 난처해졌다. 아직 예약 시간인 7시가 되지 않았거니와, 그를 끌고 기어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 자체가 민망했다.

 우물쭈물 엘리베이터 앞에서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다가 속에 맴돌던 말을 충동적으로 뱉었다.

“저……. 여기까지 오셨는데 같이 식사라도 하시겠어요? 감사함에 대접도 할 겸.”

 물론 말하자마자 후회하기는 했다. 세상에, 다른 날도 아니고 크리스마스에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하다니. 스스로가 참 어이없게 느껴졌다.

 강주의 눈이 놀란 듯 살짝 커졌다. 재희가 그런 제안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 하지만 그것도 찰나, 이내 평소처럼 그의 얼굴이 담담해졌다.

“그래요, 그럼 어디 한번 대접해 봐요.”

“네……. 네?”

 도리어 놀란 건 재희였다.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의 수락 역시 그녀에게는 무척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와인 잔 안에 조명 빛이 일렁인다. 어색하게 한 모금 마신 후 재희가 물었다.

“호텔에 계셨던 거 보니까 약속 있던 것 같은데, 아니세요?”

“있는데, 없어요.”

“네?”

 강주는 한 층 위에 있을 둘을 떠올렸다. 차 회장과 시은. 아마 대충 빠져나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차 회장 앞에 허수아비처럼 앉아 있었겠지.

“혹시 여자 친구랑 만나시려던 건?”

“여자 친구 없어요.”

“그래요? 상무님 좋다고 하는 분들 많잖아요. 크리스마스인데 왜 안 만나시고.”

 차강주, 그는 언제나 그랬다. 어렸을 때도, 저 심드렁한 표정으로 여학생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건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미 그를 포기한 지 오래인 저조차도 새삼 홀릴 정도이니.

 개인적인 질문인데도 강주는 쉽게 답했다.

“이런 날엔 더 만나면 안 돼요. 기대하게 만드니까.”

 아… 하고 재희는 잔을 내렸다. 상대에게 기대를 주지 않기 위해 이런 날에는 만나지 않는다, 라……. 그럼 나는 무얼까. 아예 열외겠지.

 아른거리는 램프를 바라보는 사이 다음 메뉴가 나왔다. 재희는 멈칫 굳어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바닷가재. 연어알과 버무린 바닷가재 요리가 있었다.

 캐비어 무슬린과 바닷가재 중 선택하라기에 분명 캐비어를 선택했는데, 어째서. 잘못 나와도 왜 하필.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민철과 호수 레스토랑에서도 이렇게 메뉴가 잘못 나왔었다. 그때 민철이가 뭐라고 했더라.

‘넌 참 운이 없는 것 같아. 재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인생도 모진데, 늘 사소하게 재수가 없다며.

 이거 정말 정말 별일 아닌데, 그냥 메뉴가 바뀌었다며 레스토랑 직원에게 말하면 되는 건데. 재희는 파도처럼 복받쳐 오르는 감정으로 휘청 흔들렸다.

 마음이 마구 요동친다. 실은 감정을 애써 외면한 것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꾹꾹 눌렀을 뿐이다. 남자 친구에게 배신당한 후 멀쩡할 사람 몇이나 있겠는가.

 민철과의 관계가 재희에겐 사랑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남자 친구이기 전에 친구로 지냈던 시간만 삼 년이었다. 우정으로 쌓았던 그 삼 년까지 민철은 배신한 거다.

 그리고 그날. 효정이가 다쳤던 날 받았던 따뜻한 위로까지,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렸다.

 생애 처음으로 기대고 싶었는데, 그래도 한번 믿어 보고 싶었는데, 온전한 내 편이 되어 주리라 생각했는데. 이제 제 인생까지 괜찮지 않을 것만 같았다.

‘괜찮아, 재희야…….’

 그렇게 위로해 주던 민철이마저 등을 돌렸으니까.

 정말 난 재수 없는 사람일지도 몰라. 그러니 하필 크리스마스에 남자 친구가 바람이 나지. 게다가 음식 메뉴까지 바뀌고. 심지어 내가 먹지 못하는 메뉴로. 아무리 바쁜 날이라고는 하나 호텔 같은 곳에서 이러기도 쉽지 않은데. 내 인생은 정말 왜 이럴까.

 추한 자기 연민까지 들었다. 스스로를 구덩이로 처박는 못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전 정말……. 재수가 없나 봐요.”

 혼잣말같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간신히 막았던 흐느낌이 터질 것 같았다.

 안 돼, 상무님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하지만 참으려 해도 자꾸만 시선 끝에 보이는 접시가 물기에 잠겼다. 이까짓 메뉴가 뭐라고 사람 기분을 이렇게 만들어.

 입술만 꼭 깨물고 있던 순간이었다. 길쭉하고 단정한 손이 그녀의 접시를 가져갔다. 재희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강주 자신 앞에 있던 접시를 그녀 쪽으로 옮겨 놓는 모습이 보였다. 새까만 캐비어가 예쁘게도 올라와 있다.

“잘됐어요, 갑자기 바닷가재가 끌려서 후회하고 있었는데.”

 강주는 재희 것이었던 바닷가재를 포크로 찍어 우아하게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삼킨 후 담담히 덧붙였다.

“맛있네요, 재희 씨 덕에 재수가 좋아요.”

 재희의 눈망울이 휘청 흔들렸다. 마치 눈물이라도 떨굴 것처럼 젖어서.

“왜 울려고 하지? 내 얼굴이 새삼 감동적이에요?”

 그가 필시 농담일 말을 무표정하게 던졌다. 그제야 재희의 입술 틈으로 바람 빠진 웃음이 샜다.

 저 눈치 빠른 남자는 이미 알고 있는 거다, 비로소 차오르기 시작한 배신감과 슬픔을. 그래서 나름의 위로를 해 주는 거다. 눈가에 고인 눈물은 모른 척 눈감아 주며.

 우습게도, 그의 위로에 오히려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슬퍼서는 아니었다. 민철을 향한 배신감 때문만도 아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눈물이 났다. 바닷가재 접시를 바꿔 준 거, 그게 뭐라고.

 아마, 저 사람은 내가 남자 친구와 헤어져서 슬퍼 우는 줄 알겠지. 실상은, 그에게 묘한 위로를 받아서인데.

 민철의 배신 하나로 제 인생이 안 괜찮다고 느낀 것처럼, 그의 배려 하나로 다시 인생이 괜찮아졌다. 생기가 돌았다.

 당신은 알까, 방금 당신이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워 더러워진 옷을 무심히 털어 주었다는 걸. 그로 인해 기울어진 세상이 다시 온전히 자리를 찾았다는 사실을.

 꽉 문 입술이 아프다. 숙인 고개 아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턱 끝에 위태로이 매달렸던 물방울이 치마 위로 떨어져 조그만 물 자국을 만들었다. 그에게 제 감정을 알리기 싫은데, 바르르 떨리는 어깨가 자꾸만 티를 냈다.

“잠시만.”

 잠자코 재희를 응시하던 강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 전화로 누군가와 통화하며 밖을 향해 벗어난다.

 재희는 홀로 남겨졌다. 정신을 차리니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기껏 위로해 주었더니 우는 모습이나 보이고, 주책이나 떨고. 고마운 사람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청승인가 싶었다.

“일어나요.”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다시 울렸다. 그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재희는 물끄러미 고개를 들었다. 눈물 젖은 뺨이 조명 아래 애처롭게 반짝거렸다. 그녀의 흠뻑 젖은 얼굴을 마주하는 강주의 턱이 살짝 굳었다.

 단단한 손이 그녀를 향해 내밀어졌다.

“가죠.”

“…어디를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울먹울먹 묻는 재희의 손을 꽉 잡고, 강주가 답했다.

“재희 씨가 마음껏 울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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